군산부사(영인본) (양장본 Hardcover)

군산부사(영인본)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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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1899년 개항 이후부터 개항 35주년이 되는 1934년까지 군산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자료집.
- 일제강점기시대 출판되어 본문은 일본어로 표기

『군산부사』에는 군산이 조그마한 촌에서 거대한 항구 도시로 바뀌게 되는 과정이 기록되었으며, 개항 당시와 1900년 이후 증가하는 일본인의 수와 출신 지역이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되었다. 또한 군산에 이주안 일본인들이 만든 자치 기구 성격의 일본 민회와 일본 거류민단의 조직 과정과 활동이 관련 자료와 함께 기술되었다.

특히 『군산부사』에는 군산에 설치된 의료 기관, 경찰서 등 제반 시설의 연혁과 규모가 함께 실려 있어 『군산부사』는 지방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또한 군산항의 수출입 규모와 액수, 수출입 물품 목록 등이 1899년에서 1934년까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군산부사』는 일제의 수탈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자료가 된다.
『군산부사』는 1935년 군산부에서 발간한 책으로 총 39장, 356 쪽으로 구성되었다. 『군산부사』는 현재 우리나라 각 지역에서 발간되는 도지(道誌)·군지(郡誌) 등과 같은 성격으로 개항 시기부터 1934년까지의 군산의 정치·사회·경제 등 군산에 대한 거의 대부분의 정보가 기술되었다.
저자

군산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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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제국주의일본은쌀과국내각지에서수탈한각종물자들을일본으로가져가기위해1899년5월에군산항을개항시켰다.더불어당시큰시장을이루었던강경·공주·전주등조선내의상권에용이하게침투하여이익을최대화하기위한전초기지로써의역할까지기대하였다.

이러한의도로1900년8월에는군산과오사카[大阪]를잇는직항로를개설하여일본본토와직교역이가능하도록하였고,또한수탈의가속화를위해1910년10월에서1914년1월까지대전-가수원-두계-논산-강경-이리-김제-광주-송정리-영산포-목포를연결하는약261.3㎞의철도를건설하고,여기에더해이리[익산]에서군산으로이어지는24.8㎞의철로까지완공하였다.이로써호서,호남,영남의미곡과수탈물품들을군산항으로신속하게이송할수있게되었다.그결과1908년당시군산항의수출품중80%가쌀이었고,99%가대일수출품이었다.

이와같이군산지역이가진지리적이점으로1900년이후일본인뿐만아니라타지역사람들도대거유입되었다.타지역사람은개항이후촉발된노동력의수요와관계가있고,이는일본인도마찬가지로이들대부분은군산조계(租界)에거주하였다.

『군산부사』에따르면개항직후군산에이주한일본인은77명,조선인511명이었으며기타외국인은거주하지않았다.그러나개항1년후인1900년에는일본인422명,조선인780명,기타외국인24명으로거의6배가까이증가했다.『군산부사』가나오기이전인1934년군산의인구분포도를보면,일본인9,408명,조선인27,144명으로폭발적인인구증가추세를보이는데이는군산지역이물류·상업·공업의중심지로변모하여인력의수요가증가했기때문이다.

1934년현재군산의일본인9,408명중야마구치현[山口縣]출신이1,355명,나가사키현[長崎縣]출신이868명,에히메현[愛媛縣]출신이602명순이었고,이들의직업은공무(公務)및자유업1,107명,상업및교통업831명,공업289명순으로공무및자유업이가장큰비중을차지하였음을알수있다.

이렇게일본인의수가늘어나자군산거주일본인들은군산일본민회(群山日本民會)를창설하여일본인민회규칙(日本人民會規則)까지제정하고13명의의원을선출하였다.이민회는1906년목포일본영사관군산분관이폐지되고군산에이사청이개설되면서민단법이시행되자군산거류민단(群山居留民團)으로바뀌었다.군산거류민단은일종의자치기구이자법인체로써일제의보호아래공공사무를처리할수있었다.

군산이1914년부(府)로승격되던해에일본인들은교육사업을위한‘군산학교조합’을발족하였다.군산거주일본인들은자녀교육을위해학교를건립·운영하는데많은노력을기울였는데최초의교육시설은1899년에영사관분관주임(領事館分館主任)인아사야마겐죠[淺山顯藏]의부인이세운군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群山公立尋常高等小學校)였다.그리고1912년11월에는군산공립상업보습학교(群山公立商業補習學校)가군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에부설되었다.

군산공립상업보습학교는설립당시학생수가약100명이었고교직원은1명뿐이었으며외지의소학교직원이겸무하는형태였다.군산공립상업보습학교는1918년군산공립간이상업전수학교(群山公立簡易商業專修學校)로개칭되었다가,1923년교육령의개정으로다시상업보습학교(商業補習學校)로개칭되었다.

한편1911년에군산공립보통학교(群山公立普通學校)가세워졌으나3.1운동과관련하여불타버렸다.군산에서도만세운동이일어나자보통학교학생들이적극참여하였다.3월14일에군산공립보통학교출신인김학술과70여명의학생들이동맹하여퇴학원을제출하는운동을벌였고,이후김수남과이남율이중심이되어23일에일본의교육기관이었던군산공립보통학교를방화한것이다.군산공립보통학교는이후다시증축되었으며,1929년제1공립보통학교로개칭되었다.18개의학급에학생1,207명,직원20여명의규모였다.

또한군산공립중학교(群山公立中學校)는1923년에군산부학교조합(群山府學校組合)에의해건립되어1928년에1회졸업생을배출하였다.5년제학교로10개의학급이있었으며,학생수는470여명,직원은20여명이었다.이밖에도군산공립고등여학교(群山公立高等女學校),군산공립청년훈련소(群山公立靑年訓練所),군산사립가정학교(群山私立家政學校),군산공립양영학교(群山公立養英學校),군산사립유치원(群山私立幼稚園),사립영신유치원(私立永信幼稚園),군산교육회(群山敎育會)등이설립되어일본및조선자녀들의교육을주도하였다.

군산거주일본인들은1915년5월에전라북도내최초로수도사업(水道事業)을시행했다.급수대상은대부분일본인으로약1만여명이었다.

그리고1921년군산자혜의원(群山慈惠醫員)이본관,전염병실(傳染病室),간호부기숙사,소독실,해부실등5개동,숙소3개동등의건물을신축하여진료를전개하였다.1929년에자혜의원은‘조선도립병원관제공포’에따라전라북도립병원(全羅北道立病院)으로개칭되었는데,최초내과와소아과두개과로시작했던것이내과·외과·안과·산부인과·소아과·이비인후과·치과·피부과의8개과로분화되었고,1934년당시의사6명,의원4명,약제사1명,서기2명,간호사25명등이근무하였다.이밖에도군산에는대략20여개의사립병원들이생겨났다.

또한인구의증가와상공업의발달로인해조선은행지점,조선식산은행지점,조선상업은행지점,군산금융조합,옥구금융조합,군산동부금융조합등의금융기관들이생겨났다.

언론기관으로는1904년에최초로『군산일보(群山日報)』가주간지로발행되다가1907년에는『한남일보』를흡수하여일간지가되었다.이후1919년에는『실업의조선(實業の朝鮮)』이란월간(月刊)잡지도발행되는등약18개의신문지국등이생겨났다.

한편,1899년에목포영사관군산분관소속으로설치되었던군산경찰서는1906년에군산분관이없어지고이사청이들어서자이사청소속으로바뀌었는데,일제가조선을병탄한1910년이후조선인과기타외국인들에대한치안유지와탄압역할을자행했다.1934년현재서장,경무계주임,위생계주임,고등계주임,사법계주임,보안계주임등에각각1명씩배치되었으며5개과로분리되어있었다.

조그마한촌에불과하던군산이짧은기간에근대적도시로성장할수있었던것은호남평야를끼고있었고항만을가지고있었기때문이다.물론군산항은개항초기입지조건이좋거나규모가큰편이아니었다.하지만일본은수탈의전초기지로삼기위해군산항을꾸준히수축(修築)[집이나다리,방죽따위의헐어진곳을고쳐짓거나보수함]했다.일본의산미증식계획이발표되자1926년에는거금을들여7개년계획으로항만수축을진행할정도였다.당시군산항수축공사기공식에참여한사이토마코토[齊藤實]조선총독은부두에집적된쌀을보고“아!쌀의군산이여”라고탄성을지를정도였다고한다.일본은계획대로1933년3월에항만수축공사를완료함하여3천톤급6척이접안할대규모항구를건설하였다.
그리고이로인해쌀에대한수탈은1925년99만8,769석(石)에서1934년에는228만5,114석(石)으로가파르게증가하였다.이쌀들은오사카[大阪],고베[新戶],도쿄[東京]등지로보내졌다.쌀수탈의증가와함께군산항의무역액역시1925년에는총5,608만111엔(円)중에수출이3,773만8,706엔을차지한데반해,1934년에는총7,439만3,371엔에서수출비중이5,595만904엔으로상승하는추세였다.

『군산부사』[群山府史](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