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제 1 호 ~ 제 71 호 | 1927. 4 ~ 1933. 5 | 양장본 Hardcover)

별 (제 1 호 ~ 제 71 호 | 1927. 4 ~ 1933. 5 | 양장본 Hardcover)

$300.00
Description
1927년 천주교 경성교구 청년연합회 천주교월간지 - 영인본
한국 가톨릭 언론의 출발

세계 가톨릭교회는 신자들에 대한 교육과 함께 복음을 널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서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 왔다.
그 가운데서도 교회는 특히 출판과 언론 활동을 통한 신자들의 교육과 미신자(未信者) 들에 대한 선교에 많은 힘을 기울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대중전달(Mass Communication)의 수단으로서 라디오나 TV와 같은 전파 매체(電波媒體)가 발달하기 전에는 신문· 잡지 등이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기 때문에 교회는 일찍부터 이에 관심을 두었다.
그리하여 17세기 말 ∼ 18세기 초 유럽 각국에서 근대적인 신문 · 잡지가 발행되기 시작할 때에 가톨릭교회는 이에 발맞춰 프랑스(1701), 영국(1790), 이탈리아(1848)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교회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저자

한국학자료원편집부

출판사 서평

한국가톨릭언론의출발

세계가톨릭교회는신자들에대한교육과함께복음을널리,그리고효과적으로전파하기위해서갖가지수단과방법을이용해왔다.
그가운데서도교회는특히출판과언론활동을통한신자들의교육과미신자(未信者)들에대한선교에많은힘을기울여많은성과를거두었다.
특히오늘날과같이대중전달(MassCommunication)의수단으로서라디오나TV와같은전파매체(電波媒體)가발달하기전에는신문·잡지등이이러한목적을수행하는데가장효과적인수단이었기때문에교회는일찍부터이에관심을두었다.
그리하여17세기말∼18세기초유럽각국에서근대적인신문·잡지가발행되기시작할때에가톨릭교회는이에발맞춰프랑스(1701),영국(1790),이탈리아(1848)를비롯한여러나라에서교회신문과잡지를발행하기시작하였던것이다.
그리고이러한추세에부응(副應)하여교황레오13세〔LeoXⅢ,1878~1903재위〕와비오10세[PiusX,1903~1914재위〕는‘모든주교·신부와교우들이성교회(聖敎會)신문과잡지를많이발간하여운영하고,신자들은물론외교인(外敎人)들까지도볼수있게하라’고촉구하였다.
한국천주교회에서도일찍부터출판을통한신자교육및선교의필요성에관심을갖고이에많은도서를목판본,또는활판본으로간행해온바있었다.이러한출판활동은1886년한불수호통상조약의체결로점차로공개적인선교활동이가능하게된뒤에는더욱활발해졌다.
그러다가한국교회는1883년우리나라최조의근대적신문인〈漢城句報〉가간행되고,1886년에는최초의순한글민간신문인〈독립신문〉이간행된이후계속된일간지(日刊紙)의발행에자극을받는한편,앞에서든역대교황들의촉구에힘입어1906년10월19일순한글로된주간지(週刊紙)인〈경향신문〉(京鄕新聞)과그부록인〈보감〉(室鑑)을발행하게되었던것이다.
〈경향신문〉은교회의기관지(機關紙)이자일반시사지(一般時事紙)로서국내외의교회와사회소식,논설,그리고일반상식이나생활에필요한지식,문예작품등다양한기사(記祖)를싣는한편,그부록인〈보감〉에는주로신자를대상으로한교리적논설,한국천주교회사,법률해설등을실어알려줌으로써천주교신자들은물론일반국민들에게유익한지식을제공하고계몽하는데큰이바지를하였다.뿐만아니라아직까지도천주교를그릇이해하고있거나,좋지않은인상을갖고있던비신자(非信者)들에게올바른인식과호감을갖게함으로써선교및호교(護敎)면에서도큰몫을하였던것이다.그러나1910년한일합병(韓日合井)이되자〈경향신문〉은창간당시부터지켜왔던‘政敎分離에입각한政治不干涉主義'의편집방침에도불구하고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강요에의해서폐간되지않을수없었다.그리하여교회당국은총독부의요구대로1910년12월30일자,제220호로폐간하고,그대신에종교적인내용만을수록하는《경향잡지》(京鄕雜誌)를발간하기로하였다.
1906년10월9일창간된〈보감〉의후신인《경향잡지》는일제의탄압과물자난(物資難)으로한때폐간된적도있으나[1945년5월15일제975호로폐간되었다가해방뒤인1946년8월에속간〕오늘날까지발행을계속함으로써교리,교회소식,교회사,법률문답,독자투고,문예작품등을수록하여신자교육은물론가톨릭문화의보급계몽과전교에도큰역할을하였다.《경향잡지》의발행이후한국교회에는아직다른잡지나신문이출현하지않았다.그러다가1919년3·1독립운동이후전국적으로일어난민족문화운동과청년운동의열기(熱氣)는각지에서민족언론기관의창설과〈東亞日報〉〈朝鮮日報〉등의신문발행,그리고각종청년단체의설립과활동을가져왔다.
이때에천주교회에서도당시교황비오11세[PiusXI,1922~1939재위〕도촉구한바있는‘가톨릭운동’(CatholicAction)의일환으로각지방본당에서청년회가조직되어청년운동이활발히전개되기에이르렀다.그러자이러한본당청년회들을교구차원에서통합할필요가생기게되어서1922년6월에는서울에서경성교구천주교청년회연합회(京城敎巨天主敎靑年會聯合會)가,1924년7월에는대구에서남방천주공교청년회(南方天主公敎靑年會)가발족하여가톨릭청년운동을연합적,체계적으로전개하게되었던것이다.
이때에두청년연합회는가톨릭청년운동을효과적으로홍보(弘報)·선전(宣傳)함은물론회원들과일반신자들의교육,호교(護敎),전교등을위해서기관지(機關紙)발행의필요성에눈을뜨게되었다.
그리하여먼저1927년4월1일남방공교청년회에서는"一은南方敎匡內의消息報道요,二는敎會發展에對한意見交換이요,三은步調一致“를목적으로4·6배판4면의월간신문인〈天主敎會報〉〔오늘날의〈가톨릭新聞〉의前身〕를발간하게되었다.
그러자이에자극을받은경성교구천주교청년회연합회〔이하·경성청년연합회로줄임〕역시기관지의발행을서둘러3개월뒤인같은해7월10일자로〈별〉보를발간하기에이르렀다.
그리하여〈천주교회보〉와〈별〉보는서울과대구의두청년연합회기관지로서서로선의(善意)의경쟁을벌이게되었다.

한국학자료원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