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미술전람회도록 1: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도록 1: 19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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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미술 작품 공모전.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하여 성장한 작가들은 광복 이후 우리나라 미술계의 지도적 인물이 되어 한국 현대 미술의 전개에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따라서 조선미술전람회는 비록 우리나라 근대 미술의 자율적 성장을 위축시켰다고 하더라도 작가 활동의 기반 조성에 따른 화단의 활성화에 기여한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

조선총독부

1910∼1945년까지우리나라를지배한일본제국주의최고의식민통치기구.

출판사 서평

약칭으로‘선전(鮮展)’또는'조선미전(朝鮮美展)'이라부른다.1922년부터1944년까지23회를거듭하였다.관전(官展)주1형식의권위주위로한국근대미술전개에매우큰영향을미쳤다.

조선총독부의이른바문치정책의하나로창설되어많은미술가들을배출,성장하게하는등작가활동의기반조성에기여한바도있다.하지만한국근대미술의일본화에촉진적구실을함으로써화단을일본화(日本畵)의영향으로물들게하였다.

전람회의창설은1921년10월28일개최취지를발표한데이어같은해12월27일당시김돈희(金敦熙),정대유(丁大有),이도영(李道榮),김규진(金圭鎭)등의서화계인사를총독부로초청하여이에관한의견교환회를가짐으로써구체화되었다.여기서전람회의명칭이조선미술전람회로정해졌다.

공모부문은제1부동양화,제2부서양화및조각,제3부서예의3개의부로,제1회전람회를1922년봄에열기로하는등의시안이마련되었다.공모부문에있어서서양화및조각을독립되게설정한것은우리나라미술의근대화에뜻깊은의의를지닌다.하지만전통회화를동양화로명명한것은한국전통회화의타율적전개를반영하는불투명한용어로서오늘날까지사용하게되는계기가되었다.

전람회의운영제도는그당시일본의가장큰관전이었던제전(帝展)으로약칭되는제국미술원전람회(帝國美術院展覽會展)의체제를따라공모심사의입선·낙선제및시상제를채택하였다.

‘조선미술전람회규정’에의하면,조선의미술을장려,발전시키기위한다는취지하에①매년한번씩의개최횟수와공모부문,출품및무감사(無監査)의한계,그리고출품시의운송비와보관상의책임소재,출품된작품에대한투영묘사등의규제,②출품에관한사항을10개조항으로나누어1인당2점이내의출품작품수의제한과작품의크기,출품할수없는작품의한계와출품과반출상의주의할점등의규정,③감사및심사에관한사항으로,각각위원의과반수출석과출석위원과반수의동의에의하여제반사항을결정하되심사의등급을1∼4등으로나누어결정,④포상에관한규정,⑤출품작에대한매매시의계약방법과대금지불방법,폐회후의반출방법의명시,⑥관람시간과관람시의주의사항등이명시되어있다.

이와같은규정은전람회가1944년제23회로막을내릴때까지6차의부분적인운영제도에대한개정이있었다.1924년제3회전람회의개막전에첫번째의부분적인개정이있었는데,제1부의동양화부에속해있던사군자(四君子)주2를제3부인서예부로옮겼다.

1926년의제5회전람회에서는1등에서4등까지등급으로나누어졌던시상제도를특선제로바꾸었고,특선자의무감사폭을넓혀놓았다.그리고평의원주3의자격이조선총독부관리로한정되어있던것을조선미술에공이있는자로바꾸었다.조선미술전람회에서여러번특선한사람중에서총독이위촉하는참여제도의항목이추가되었다.

제7회전람회가열렸던1928년에는출품자격에관하여부분적인개정이있었다.한국에본적이있는자또는전람회개회때까지6개월이상거주한자로출품자격이제한되었다.단,계속해서3회이상입상또는특선한자는이제한을받지않게하였다.1932년의제11회전람회부터는서예부분을없애고사군자는동양화부로합치게함으로써전통서화부문을축소시켰다.그대신공예부를신설하였다.

1936년제15회전람회에서는추천제도가신설되었다.이제도에의하여추천작가는전람회초기부터출품하여특선을계속한사람으로동양화부와서양화부에각각5명씩,그리고공예부에3명을두되,심사위원장의추천에의하여계속무감사진열의특혜를받게하였다.이때한국인으로서추천된자는동양화부에제4회전람회(1925년)이후연속특선의기록을세운이상범(李象範)과역시특선을거듭한이영일(李英一)두사람이었다.

1937년의제16회전람회부터는다시참여작가제도가실행되었다.그에따라한국인으로는김은호(金殷鎬)가맨먼저참여작가에오르고,다음해에는이상범이두번째로참여작가가되었다.

이와같은조선미술전람회의체제와규정은광복이후창설된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국전)에서도그대로답습되었다.조선미술전람회가23회를거듭하는동안에많은작가들이이전람회를통하여배출되고성장하였다.

특선이상의대표적작가들의면모를살펴보면다음과같다.우선동양화부를보면,1922년제1회전때허백련(許百鍊,추경산수도,2등상),김은호(미인승무도,4등상),이용우(李用雨,고성춘심도,4등상),김용진(金容鎭,묵란,4등상)등이입상하였다.

제2회전(1923)에서는노수현(盧壽鉉)의「귀초(歸樵)」와허백련의「추산모애(秋山暮靄)」가각각3등상을받았으며,제3회전(1924)때는이한복(李漢福,엉겅퀴,2등상),김은호(부활후,3등상),변관식(卞寬植,가을,4등상)이각각입상하였다.

제4회전(1925)에서는이상범,이영일이3등상을,변관식이「추산모연도(秋山暮煙圖)」로4등상을받았다.그리고제5회전(1926)에서제8회전(1929)까지는이상범이계속특선을하였고,노수현(5회전),이영일(6·7회전),김은호(6·7회전),허백련(6회전),변관식(8회전),최우석(崔禹錫,6회전)도특선을하였다.

제9회전(1930)에서박승무(朴勝武)의「만추도(晩秋圖)」가처음특선되었고,이상범,이영일,최우석이연속특선을하였다.제10회전(1931)때이응노(李應魯)가「청죽(晴竹)」으로처음특선하였고,이상범의「한교도(閑郊圖)」와「귀초도」두점이특선되기도하였다.

제11회전(1932)에서는이상범과백윤문(白潤文)이,제12회전때는이상범과이용우가,제13회전(1934)에는이상범과백윤문이특선하였다.이상범은연속특선으로제14회전(1935)부터는추천작가가되었다.

제14회전부터는신진작가들의진출이더욱두드러지게나타나기시작하였다.정찬영(鄭燦英)이「소녀」로특선하였다.제15회전(1936)에서는김중현(金重鉉)이「춘양도(春陽圖)」로특선하였고,이때백윤문도같이특선하였다.

제16회전(1937)부터는김은호가추천되어참여작가가되었으며,이때김기창(金基昶)이「고담(古談)」으로,박원수(朴元壽)가「만추(晩秋)」로처음특선하였다.제17회전(1938)에서김기창이「하일(夏日)」로,심은택(沈銀澤)이「정교(靜郊)」로,그리고제18회전(1939)에서는김기창이「고완(古翫)」으로,이응노가「황량(荒凉)」으로,이용우가「하정(夏汀)」으로각각특선하였다.

1940년의제19회전에서는김기창이「여일(麗日)」로,최근배(崔根培)가「봉선화」로,정종여(鄭鍾汝)가「석굴암의아침」으로,1941년의제20회전(1941)에서는김기창이연속특선으로추천작가가되었다.장우성(張遇聖)과정말조(鄭末朝)가「푸른전승」과「여(旅)」로처음특선을하였다.

제21회전(1942)때는장우성,정말조,조중현(趙重顯)이,제22회전(1943)에는장우성,정말조,박내현(朴崍賢)이,그리고마지막회인23회전(1944)에서는장우성,이유태(李惟台),정말조,조중현,허건(許楗)이특선을하였다.

이밖에도1935년경부터진출하기시작한신진작가로배렴(裵濂),박생광(朴生光),김영기(金永基),천경자(千鏡子)등을들수있다.이들은대부분이김은호와이상범의제자들로서조선미술전람회를통하여배출되고성장하여한국현대화단의전통회화를주도하는대표적인작가들이되었다.

서양화부문에서도박수근(朴壽根),박영선(朴泳善),이마동(李馬銅),이봉상(李鳳商),이인성(李仁星),김인승(金仁承),심형구(沈亨求)등이이전람회를통하여성장하면서한국서양화단의선구를이루었다.

조각부문은제4회전(1925)때처음신설되어김복진(金復鎭)이3등으로입상하였고,제5회전때역시김복진이특선하였으며,제6회전때는구본웅(具本雄)이「목의습작」으로특선하였다.제16회전에서김복진이「나부」로다시특선하였고,제17회전때김복진은무감사로출품하였다.

제22회전때김경승(金景承)이추천작가가되었고,조규봉(曺圭奉)과윤효중(尹孝重)도특선을하였다.그리고이밖에윤승욱(尹承旭),이국전(李國銓)도이전람회를통하여성장하였다.

1932년(제11회)에신설된공예부에서는응모수95점에입선수가56점이었는데,그중한국인의작품은6점이었다.이때이남이(李男伊)가우리나라의전통적인촛대형식에촛불대신전기를켤수있는「플로아스탠드」로특선하였다.

제12회전때는강창규(姜昌奎)가동경에서공예를전공한후귀국하여처음특선한이래제13·16·17·18·19회전에서특선하여우리나라공예계의대표적인작가가되었다.그리고이밖에장기명(張基命)등도이전람회를통하여작가로서의발판을굳혔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