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낙랑고분 (樂浪古墳)
대동강이 흐르는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황해도와 평안남도에 걸쳐서 확인되는 한대(漢代), 혹은 서진대(西晉代) 병행기에 조성된 무덤으로서 중국식, 혹은 그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과 재지 전통이 강한 묘제로 구성된다. 평양 근교 토성리(土城里)에는 남북 10여 리, 동서 수십 리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1,300여 개의 낙랑고분이 산재해 있고, 황해도에도 무수히 분포되어 있다. 낙랑고분으로는 널무덤과 덧널무덤, 그리고 벽돌방무덤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독널무덤[甕棺墓][^1]과 기와널무덤[瓦棺墓][^2], 그리고 소형 벽돌덧널무덤[塼槨墓]도 일부 포함된다.
널무덤
낙랑지역에서 확인되는 널무덤은 무덤구덩이〔墓壙〕에 판재(板材)주3를 조립하거나 통나무를 2분할하여 내부를 파낸 널〔木棺〕을 안치하고 무덤구덩이와 널 사이 혹은 나무널의 머리맡과 발치에 부장품(副葬品)을 두는 경우가 많다. 물론 봉분주4을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널무덤은 낙랑주5과 관련된 묘제 중에서는 등장 시기가 가장 빠른 형식으로 이해되는데, 세형동검 유형의 청동기를 부장하던 전단계의 재지계 움무덤〔土壙墓〕과 분명한 계승관계가 인정된다.
덧널무덤
널무덤에 이어서 출현하는 덧널무덤은 크게 홑무덤〔單葬〕덧널무덤과 합장(合葬)류 덧널무덤으로 구분되는데 후자는 다시 병혈합장(竝穴合葬)과 동혈합장(同穴合葬)으로 분류된다. 홑무덤 덧널무덤은 글자 그대로 홀로묻기 전용으로 조성된 덧널무덤을 일컫는다. 이는 판재식 덧널무덤과 귀틀 덧널무덤으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무덤구덩이를 조성한 다음 나무 판재를 여러 장 잇대어 덧널을 만든 것이고, 후자는 각재를 쌓아 올려서 무덤구덩이 내에 부장공간을 만든 것이다. 판재를 잇기 위해서 나무쐐기주8가 사용된다는 점이 중요한 특징인데, 이는 재지사회의 장구 제작법과는 뚜렷하게 다른 방법이다. 널과 덧널 사이의 공간, 즉 두부(頭部) 쪽 공간과 측면 공간이 모두 껴묻거리를 두는 공간으로 활용되며, 널 내부에는 착장형 유물만이 부장된다.
낙랑지역의 대표적인 병혈합장묘로 정백동 37호와 53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무덤에는 전 단계와 마찬가지로 세형동검이 여전히 부장되고 취사전용 토기인 화분모양토기도 동반된다. 전한경(前漢鏡)의 일종인 이체자명대경(異體字銘帶鏡)의 부장이 많은 것을 참조하면 서기전 1세기대에 유행한 묘제임을 알 수 있다.
벽돌방무덤
낙랑의 벽돌방무덤은 요동지역이나 산동성의 벽돌방무덤과 유사성이 높은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애초 낙랑 벽돌방무덤은 2세기 말에 출현하여 3세기대에 가장 유행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문양전(文樣塼)이 병용된 덧널무덤의 시기가 1세기인 것이 있어 이를 근거로 낙랑에서 벽돌방무덤의 상한연대를 서기 1세기대로 소급시켜야 된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발굴조사를 통해서 1세기대의 벽돌방무덤이 확인된 것은 아니다.
또 늦은 시기의 벽돌방무덤에는 돌천장이 채용되거나 벽면의 일부를 깬돌〔割石〕로 축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도 북한학계에서는 낙랑 벽돌방무덤이 고구려의 특징적 묘제인 돌방무덤〔石室墳〕으로 변해가는 과도기적인 현상으로 설명한다. 나아가 그러한 변화는 낙랑군이 멸망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평양역구내 벽돌방무덤에서 서기 353년의 기년이 적힌 벽돌이 출토된 사실을 참고하면 낙랑지역의 벽돌방무덤은 낙랑 · 대방군이 멸망한 4세기까지 계속해서 축조된 것이 분명하다. 황해도 봉산군에서 발견된 장무이(張撫夷) 무덤도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벽면에 석회를 바르거나 널길 좌우에 작은 딸린방〔耳室〕을 두는 등 고구려 고분의 영향이 농후하다. 이들은 모두 무덤방의 축조에 석재(石材)가 혼용되거나 천장에 판석을 얹은 것이다.
기타 무덤
한편 낙랑 · 대방 시기의 독무덤은 대부분 이음식〔合口式〕으로 화분모양토기와 대형 두드림무늬짧은목항아리가 선호되는 경향이 있다. 남경 독무덤처럼 독무덤 만으로 구성된 분묘군이 있는가 하면 덧널무덤이나 벽돌방무덤에 딸리거나 유아묘(幼兒墓)주13로 사용되는경우도 있다. 소수의 사례가 보고된 기와널무덤과 벽돌덧널무덤도 대개 유아묘로 판단되는데, 만약 성인묘라고 할 지라도 부장된 유물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하위 계층의 묘제로 보인다.
낙랑고분의 주요 묘제는 덧널무덤과 벽돌방무덤으로서 같은 시기 한반도에 존재했던 국가들의 묘제와는 현저히 다른 특징을 보인다. 덧널무덤과 벽돌방무덤의 축조방법에서 당시 낙랑 건축기술의 높은 수준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들 묘제는 중국한나라 문화를 대변하는 것이다. 특히 벽돌방무덤의 “활모양으로 둥글게 휜 천장”은 구조적으로 무게의 분산을 꾀하였고, 사용 위치에 따라 벽돌의 형태를 달리하여 튼튼하고 아름답게 쌓아 서구의 벽돌 건축물에 비견될 만하다.
껴묻거리는 토기 · 동기 · 철기 · 도기(陶器) · 옥기(玉器) · 목기(木器) · 칠기(漆器) · 장신구 · 문방구 · 인(印) · 명기(明器)주14 등 매우 풍부하여 그 당시의 생활상과 문화수준, 그리고 금속공예수준을 가늠케 해준다. 특히 내행화문경(內行花文鏡) · 용호금수경(龍虎禽獸鏡) ·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 등 청동거울은 정밀하고 섬세한 세공공예의 정수이며, 그 자체로서 연대구분의 표지적 유물로서 기능한다. 한편 낙랑고분에서 출토된 칠기에 적힌 명문으로 연대나 관명 · 제작자 · 제작장소 등을 알 수 있으며, 칠기에는 일반적으로 그림이나 글씨 및 금속장식 등을 하여 낙랑의 회화수준까지 엿보게 한다.
오관연왕우분묘는 고려시대(918년-1392년)에 존재했던 왕릉(王陵)으로, 현재는 대한민국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오관연왕은 고려의 제11대 광종(재위: 949년-975년)의 아버지이자 왕이었습니다. 그의 묘소인 오관연왕우분묘는 현재 안산시에서 중요한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대한민국에서 보존되고 있는 문화재 중 하나입니다.
오관연왕우분묘는 경기도 안산시의 관광 명소로도 유명하며, 국내외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곳 중 하나입니다. 해당 분묘는 고려시대의 건축 양식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연구자들에게도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대동강이 흐르는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황해도와 평안남도에 걸쳐서 확인되는 한대(漢代), 혹은 서진대(西晉代) 병행기에 조성된 무덤으로서 중국식, 혹은 그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과 재지 전통이 강한 묘제로 구성된다. 평양 근교 토성리(土城里)에는 남북 10여 리, 동서 수십 리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1,300여 개의 낙랑고분이 산재해 있고, 황해도에도 무수히 분포되어 있다. 낙랑고분으로는 널무덤과 덧널무덤, 그리고 벽돌방무덤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독널무덤[甕棺墓][^1]과 기와널무덤[瓦棺墓][^2], 그리고 소형 벽돌덧널무덤[塼槨墓]도 일부 포함된다.
널무덤
낙랑지역에서 확인되는 널무덤은 무덤구덩이〔墓壙〕에 판재(板材)주3를 조립하거나 통나무를 2분할하여 내부를 파낸 널〔木棺〕을 안치하고 무덤구덩이와 널 사이 혹은 나무널의 머리맡과 발치에 부장품(副葬品)을 두는 경우가 많다. 물론 봉분주4을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널무덤은 낙랑주5과 관련된 묘제 중에서는 등장 시기가 가장 빠른 형식으로 이해되는데, 세형동검 유형의 청동기를 부장하던 전단계의 재지계 움무덤〔土壙墓〕과 분명한 계승관계가 인정된다.
덧널무덤
널무덤에 이어서 출현하는 덧널무덤은 크게 홑무덤〔單葬〕덧널무덤과 합장(合葬)류 덧널무덤으로 구분되는데 후자는 다시 병혈합장(竝穴合葬)과 동혈합장(同穴合葬)으로 분류된다. 홑무덤 덧널무덤은 글자 그대로 홀로묻기 전용으로 조성된 덧널무덤을 일컫는다. 이는 판재식 덧널무덤과 귀틀 덧널무덤으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무덤구덩이를 조성한 다음 나무 판재를 여러 장 잇대어 덧널을 만든 것이고, 후자는 각재를 쌓아 올려서 무덤구덩이 내에 부장공간을 만든 것이다. 판재를 잇기 위해서 나무쐐기주8가 사용된다는 점이 중요한 특징인데, 이는 재지사회의 장구 제작법과는 뚜렷하게 다른 방법이다. 널과 덧널 사이의 공간, 즉 두부(頭部) 쪽 공간과 측면 공간이 모두 껴묻거리를 두는 공간으로 활용되며, 널 내부에는 착장형 유물만이 부장된다.
낙랑지역의 대표적인 병혈합장묘로 정백동 37호와 53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무덤에는 전 단계와 마찬가지로 세형동검이 여전히 부장되고 취사전용 토기인 화분모양토기도 동반된다. 전한경(前漢鏡)의 일종인 이체자명대경(異體字銘帶鏡)의 부장이 많은 것을 참조하면 서기전 1세기대에 유행한 묘제임을 알 수 있다.
벽돌방무덤
낙랑의 벽돌방무덤은 요동지역이나 산동성의 벽돌방무덤과 유사성이 높은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애초 낙랑 벽돌방무덤은 2세기 말에 출현하여 3세기대에 가장 유행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문양전(文樣塼)이 병용된 덧널무덤의 시기가 1세기인 것이 있어 이를 근거로 낙랑에서 벽돌방무덤의 상한연대를 서기 1세기대로 소급시켜야 된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발굴조사를 통해서 1세기대의 벽돌방무덤이 확인된 것은 아니다.
또 늦은 시기의 벽돌방무덤에는 돌천장이 채용되거나 벽면의 일부를 깬돌〔割石〕로 축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도 북한학계에서는 낙랑 벽돌방무덤이 고구려의 특징적 묘제인 돌방무덤〔石室墳〕으로 변해가는 과도기적인 현상으로 설명한다. 나아가 그러한 변화는 낙랑군이 멸망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평양역구내 벽돌방무덤에서 서기 353년의 기년이 적힌 벽돌이 출토된 사실을 참고하면 낙랑지역의 벽돌방무덤은 낙랑 · 대방군이 멸망한 4세기까지 계속해서 축조된 것이 분명하다. 황해도 봉산군에서 발견된 장무이(張撫夷) 무덤도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벽면에 석회를 바르거나 널길 좌우에 작은 딸린방〔耳室〕을 두는 등 고구려 고분의 영향이 농후하다. 이들은 모두 무덤방의 축조에 석재(石材)가 혼용되거나 천장에 판석을 얹은 것이다.
기타 무덤
한편 낙랑 · 대방 시기의 독무덤은 대부분 이음식〔合口式〕으로 화분모양토기와 대형 두드림무늬짧은목항아리가 선호되는 경향이 있다. 남경 독무덤처럼 독무덤 만으로 구성된 분묘군이 있는가 하면 덧널무덤이나 벽돌방무덤에 딸리거나 유아묘(幼兒墓)주13로 사용되는경우도 있다. 소수의 사례가 보고된 기와널무덤과 벽돌덧널무덤도 대개 유아묘로 판단되는데, 만약 성인묘라고 할 지라도 부장된 유물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하위 계층의 묘제로 보인다.
낙랑고분의 주요 묘제는 덧널무덤과 벽돌방무덤으로서 같은 시기 한반도에 존재했던 국가들의 묘제와는 현저히 다른 특징을 보인다. 덧널무덤과 벽돌방무덤의 축조방법에서 당시 낙랑 건축기술의 높은 수준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들 묘제는 중국한나라 문화를 대변하는 것이다. 특히 벽돌방무덤의 “활모양으로 둥글게 휜 천장”은 구조적으로 무게의 분산을 꾀하였고, 사용 위치에 따라 벽돌의 형태를 달리하여 튼튼하고 아름답게 쌓아 서구의 벽돌 건축물에 비견될 만하다.
껴묻거리는 토기 · 동기 · 철기 · 도기(陶器) · 옥기(玉器) · 목기(木器) · 칠기(漆器) · 장신구 · 문방구 · 인(印) · 명기(明器)주14 등 매우 풍부하여 그 당시의 생활상과 문화수준, 그리고 금속공예수준을 가늠케 해준다. 특히 내행화문경(內行花文鏡) · 용호금수경(龍虎禽獸鏡) ·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 등 청동거울은 정밀하고 섬세한 세공공예의 정수이며, 그 자체로서 연대구분의 표지적 유물로서 기능한다. 한편 낙랑고분에서 출토된 칠기에 적힌 명문으로 연대나 관명 · 제작자 · 제작장소 등을 알 수 있으며, 칠기에는 일반적으로 그림이나 글씨 및 금속장식 등을 하여 낙랑의 회화수준까지 엿보게 한다.
오관연왕우분묘는 고려시대(918년-1392년)에 존재했던 왕릉(王陵)으로, 현재는 대한민국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오관연왕은 고려의 제11대 광종(재위: 949년-975년)의 아버지이자 왕이었습니다. 그의 묘소인 오관연왕우분묘는 현재 안산시에서 중요한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대한민국에서 보존되고 있는 문화재 중 하나입니다.
오관연왕우분묘는 경기도 안산시의 관광 명소로도 유명하며, 국내외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곳 중 하나입니다. 해당 분묘는 고려시대의 건축 양식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연구자들에게도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낙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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