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 (의사 윤봉길 선생 편 | 양장본 Hardcover)

애국지 (의사 윤봉길 선생 편 |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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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윤봉길의사가 1930년 3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기 위해 고향인 충남 예산을 떠나면서 남긴 ‘이향시(離鄕詩)’ 한글 원문이 공개됐다.

이 시는 윤봉길의사 기념사업을 하는 월진회(月進會)의 윤주(尹洲) 이사가 국회도서관에서 발견한 것으로 ‘애국정신선양회’가 1951년 발행한 ‘애국지’ 시리즈 가운데 ‘의사 윤봉길 선생’편에 실려 있었다.

윤이사는 “1933년 중국 상하이에서 발간된 중국어판 ‘윤봉길전’(김광 지음)에 이 시의 중국어 번역문이 실려 있긴 하지만 한글 원문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조량리(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목바리마을) 광현당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고려 시대의 명장이었던 윤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윤황(尹墴)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이다. 1911년 3월 4세 때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하였다.[2] 1918년 덕산보통학교(현 덕산초등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조선인이 조선말을 못 쓰고 일본말을 써야 하는 것과 교장이 일본인인 것에 불만이 많았고, 게다가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일본말을 배우는 것과 일본인 교장 밑에서 교육을 받는 식의 식민지 노예 교육을 배격하면서 부모님 앞에서 학교를 자퇴할 것을 선언하였고, 그렇게 학교를 그만 두었다. 대신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함께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21년 유학자인 매곡 성주록(成周錄)의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오치서숙에서 윤봉길은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두루 익혔다.[2] 1922년 15세에 성주 배씨 배용순(裵用順)하고 결혼하였다.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1923년 16세에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을 하기도 했다. 1926년 윤봉길은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얻었다.[2] 1928년 18세 되던 해에는 시집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椎) 등을 발간하였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 한학수업을 마쳤다.

농촌 계몽 활동
청년 시절에는 농민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한 윤봉길은 농촌 계몽 활동, 농촌 부흥 운동, 야학 활동, 독서회 운동 등을 시작하였다. 1927년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였다. 1928년 부흥원 설립을 기념하는 공연인 우화 「토끼와 여우」의 공연과 월례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기사년 일기〉(己巳年 日記)를 지었다. 이어 위친계(爲親契) 조직, 월진회, 수암 체육회 등을 조직하였다.[2]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후에 이 정보를 일본 경찰이 입수하여 미행,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출옥 후에 중국의 만주로 망명하였다.
폭탄 투척 직후 체포, 곧바로 헌병으로 넘겨지면서 보다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8] 1932년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32년 11월 18일 일제 대양환 편으로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되었다.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에서 총살형을 당했다.[2] 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미쓰코지야마 서북골짜기에서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 묶인 사형수(윤봉길)는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뒤에 순국했다. 시신은 아무렇게나 수습되어 가나자와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밑에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사형 집행 전에 미리 파 놓은 2미터 깊이의 구덩이에 시신을 봉분(封墳)도 없이 평평하게 묻어놓은 것으로,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윤봉길 의사가 수뇌부를 섬멸시킨 데 대한 일제 군부의 처절한 복수였다
저자

애국정신선양회

(尹奉吉)

근대사인물일제강점기때,한인애국단에입단하여훙커우공원투탄의거를전개한독립운동가.
이칭-호:매헌(梅軒)
출생연도:1908년
사망연도:1932년
본관:파평(坡平,지금의경기도파주)
출생지:충청남도예산

윤봉길은일제강점기훙커우공원투탄의거와관련된독립운동가이다.1908년에태어나1932년에사망했다.3.1운동후식민지노예교육을거부하고덕산보통학교를자퇴,농민계몽·부흥운동에전력했다.1930년본격적으로독립운동에투신하기위해만주로망명했으며,이듬해상해로옮긴후김구를찾아가독립운동에신명을바칠각오를호소했다.1932년한인애국단에입단,김구의주관하에전승축하기념식에폭탄을투척하기로계획하고실행에옮겼다.거사직후현장에서체포되어사형을선고받고일본으로이송후총살형으로순국했다.

생애및활동사항
1918년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입학했으나다음해에3·1운동이일어나자이에자극받아식민지노예교육을배격하면서학교를자퇴하였다.이어최병대(崔秉大)문하에서동생윤성의(尹聖儀)와한학을공부했으며,1921년성주록(成周錄)의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사서삼경등중국고전을익혔다.1926년서숙생활을마치고농민계몽·농촌부흥운동·독서회운동등으로농촌부흥에전력하였다.다음해이를더욱이론적으로뒷받침하기위해『농민독본(農民讀本)』을저술하고,야학회를조직해향리의불우한청소년을가르쳤다.

1929년부흥원(復興院)을설립해농촌부흥운동을본격화했으며,그해1월초부터1년간기사일기(己巳日記)를쓰기시작하였다.그해2월18일부흥원에서학예회를열어촌극「토끼와여우」를공연해성황리에마치게되자일제당국의주목을받았다.그러나이에구애받지않고지방농민들을규합해자활적농촌진흥을위해월진회(月進會)를조직,회장에추대되었다.또,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설치,운영하면서건실한신체바탕으로독립정신을고취하고자하였다.

1930년“장부(丈夫)가집을나가살아서돌아오지않겠다.”라는신념이가득찬편지를남기고채3월6일만주로망명하였다.그러나도중에선천(宣川)에서미행하던일본경찰에발각되어45일간옥고를치렀다.그뒤만주로탈출,그곳에서김태식(金泰植)·한일진(韓一眞)등의동지와함께독립운동을준비하였다.그해12월에단신으로다롄[大連]을거쳐중국칭다오[靑島]로건너가1931년여름까지현지를살펴보면서독립운동의근거지를모색하였다.이곳에서세탁소의직원으로일하면서모은돈을고향에송금하기도하였다.

1931년8월대한민국임시정부가있는상해로활동무대를옮겨야보다큰일을수행할수있을것이라믿고상해로갔다.상해프랑스조계샤비루화합방[霞飛路和合坊]동포석로(東蒲石路)19호안공근(安恭根)의집3층에숙소를정하였다.우선생계를위해동포실업가박진(朴震)이경영하는공장의직공으로일하면서상해영어학교에서공부하였다.그러면서노동조합을조직해새로운활동을모색하였다.그해겨울에임시정부의김구(金九)를찾아가독립운동에신명을바칠각오임을호소하였다.

1932년한인애국단의이봉창(李奉昌)이1월8일동경에서일본왕을폭살하려다가실패하자상해일대는복잡한상황에빠졌다.더욱이일제는1월28일고의로죽인일본승려사건을계기로상해사변을도발하였다.이때일본은시라카와[白川義則]대장을사령관으로삼아중국과의전쟁을승리로이끌었다.윤봉길은이해봄야채상으로가장해서일본군의정보를탐지하였다.4월26일한인애국단에입단해김구의주관하에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등의협의와동의아래4월29일이른바천장절(天長節)겸전승축하기념식에폭탄을투척하기로하였다.

식장에참석해왕웅(王雄,본명은金弘壹)이만들어폭발시험까지했던수류탄을투척하였다.이때상해파견군사령관시라카와,상해의일본거류민단장가와바다[河端貞次]등은즉사하고,제3함대사령관노무라[野村吉三郎]중장,제9사단장우에다[植田謙吉]중장,주중공사시게미쓰[重光葵]등이중상을입었다.거사직후현장에서잡혀일본군법회의에서사형을선고받았다.그해11월18일일본으로호송되어20일오사카[大阪]위수형무소에수감,가나자와[金澤]에서12월19일총살형으로순국하였다.

목차

1.켜지지않는성냥(7)
2`의사의탄생.(15)
3.자라나면서.(학교공부16)
4.진리를찾아서ㆍㆍ(독학)(21)
6.망국민의설움(1.상공업2.관리3.농촌.4.수리조합.5.어촌과광산동경지진)(24)
6.후생회설립(32)
7.월진회의조직(35)
8.할아버지의유언(40)
9.유랑의길(42)
10.유랑시(45)
11.신의주를거쳐청도로(47)
12.종에게(52)
13.상해시대(53)
14.친목회조직(58)
15.때는왔다(60)
16.의거의준비(63)
17.일편단심(69)
18.유가족을찾아서(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