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잃어버린 200년 (통일신라 불교 확산의 거점)

화엄사 잃어버린 200년 (통일신라 불교 확산의 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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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부처가 지리산으로 간 까닭은?
단일 사찰의 역사를 단행본 한권으로 고증한 비범한 연구
대렴의 차 씨를 뿌린 곳은 화엄사, 차 문화의 중심지로 재조명
불교가 경주를 벗어나 전국으로 확산하게 된 것엔
거점 사찰 화엄사의 역사가 존재한다
철저한 사료 분석으로 화엄사의 초기 역사 200년을 밝힌 수작

무진 스님이 풀어낸 통일신라 화엄사의 모습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수도인
경주를 위주로 하던 불교가 화엄사를 거점으로 삼아 전국 불교로 퍼져 나갔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통일신라 남악 화엄사는 의상의 화엄종보다 앞서는 창건주 연기의 화엄종 본찰이었다는 점입니다. 셋째는 화엄사가 구례 지리산의 차 재배를 선도하여
한국 차 문화를 퍼트린 장본인이라는 점입니다.
_ 추천사, 화엄사 주지 덕문
저자

무진

無盡

2003년충북제천시가은산에위치한옥천사에서오명스님을은사로출가했다.2006년직지사에서영허스님을계사로사미계를수지하고,2011년통도사에서고산스님을계사로비구계를수지했다.
경기도광주시초월읍학동리작은법당에서포교에전념하다빛고운절을창건하고화엄사말사로등록했다.이후제19교구화엄사성보박물관부관장과문화국장을역임했다.
서양철학,한국사상사·유교경전,불교학,문화재학등을전공했으며,중앙승가대학교문화재학박사학위를취득했다.

목차

추천사
머리말신비의화엄사한국불교의역사속으로

제1장서론

제2장중관해안의『화엄사사적』과창건주연기
제1절『화엄사사적』의비판적검토
1.화엄사의격을높이려는시도와연기의문제
2.신라의땅구례와지리산에대한의미
3.『화엄사사적』이화엄사의사료가될수없는원인
제2절연기와연기의화엄에관한성격검토
1.연기와적멸당‘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
2.통일신라황룡사의자장계화엄
3.자장계연기의화엄사와관혜

제3장선사의비문에보이는화엄사관련사료
제1절통일신라시대선사의비문검토
1.통일신라시대선사의비문성격고찰
2.17명의선사를통한연기의성격비교고찰
제2절통일신라시대화엄과선문의연관성분석
1.통일신라시대선문의특징과화엄의관계
2.화엄종과선문산사사찰의공통된표현방식
3.통일신라화엄사찰과선문사찰의연관성
제3절9세기~나말여초사찰의상황분석
1.사찰의창건과주지임명의과정
2.9세기불사와나말여초불사의차이
3.선사의부도탑과사사자삼층석탑의비교

제4장통일신라불교확산의거점화엄사
제1절화엄사위상변천과정
1.통일신라대렴이들여온차씨재배와화엄사의위상
2.고려시대연기화엄의변화와화엄사
3.조선시대화엄의성격이사라진연기와화엄사
제2절8세기중반지리산권역화엄종확산의근거자료검토
1.754년호남의불사『백지묵서화엄경』
2.766년조성된독창적화엄본존불,비로자나불좌상
3.8세기중반화엄의확산배경과독창성
제3절화엄사의독창적인창작물의성격과조성시기분석
1.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
2.차공양인물상과석등
3.최초의고복형화엄사석등
4.‘화엄석경’
5.화엄사동·서오층석탑
제4절통일신라화엄사의가람배치분석
1.통일신라화엄사의건축유구검토
2.통일신라건축물의배치구도

제5장결론


참고문헌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수많은해석이경쟁하는역사라는전쟁터에는늘붐비는곳도있지만,고증의손길이미치지않는빈곳도많다.그중에서도사찰의역사는특히그러하다.사찰의역사는수백년에달하지만전해내려오는이야기몇토막이일반인들이알고있는전부일때가많다.절에세워져있는유물앞안내판에는늘“불에타서소실되고중건했다”는문구가빠지지않는다.잦은외침으로인해늘공격의대상이됐던사찰은잿더미에잿더미를거듭하는오욕의세월속에서본연의기록을잃어버렸고,수많은사실이깜깜한과거속에묻혀버렸다.후대에조각보를기우듯만들어낸역사는애초의진실과멀어져서사찰의기원을올려잡는다든지,유명스님과의연계점을만든다든지하는세속적욕망에침윤되기일쑤였다.
최근이런분위기에정문일침을꽂는듯한학문적시도가나왔다.화엄사와오랜인연을맺은무진스님이박사논문으로화엄사의역사를고증해보겠다고나선것이다.단일사찰의통사적시원을밝히고자한시도또한낯설고새롭지만,거의모든기록물이사라진상황에서선사들의비문이나유물에대한과학적접근을통해충분히과거의진실에접근할수있다는것을알려준다는점에서,사찰사서술의하나의인상적인사례는충분히될만하다고판단된다.

연기처럼사라진창건주연기緣起법사의행방

이책이다루는것은화엄사의역사다.화엄사의역사또한전쟁의불길을피하지못했기에저자는이책에서사라진화엄사의역사를복원하기위해기존사료를분석하고새로운사료를보태어다른각도에서고찰을시도했다.755년조성된『백지묵서화엄경』을통해연기緣起법사(?~?)가호남의무주(현재광주)지역에서불사를일으킨황룡사의승려라는사실을알게되었다.그러나화엄사의유일한사료인중관해안中觀海眼(1567~?)의『화엄사사적』(1636)에기록된연기와는일치점을찾을수없었다.『백지묵서화엄경』의연기법사가화엄사의창건주라면화엄사의창건시기는755년무렵이겠으나『화엄사사적』에서는544년에화엄사가창건되었다고전하기때문이다.또한『화엄사사적』은연기를9세기후반활동한선각도선과같은인물로서술하여더욱혼란을낳았다.결국『화엄사사적』은역사사료로써신뢰하기어렵다는결론에이르렀다.저자는먼저화엄사와연기법사의관계를밝히기위해다양한사료를비교검토했다.그리고9세기에활동한선사의일대기를적어놓은선사의비문을통해통일신라불교계의상황을분석했다.마지막으로동시대다양한유물을비교분석하고가람배치를분석한결과화엄사의역사를복원할실마리를얻을수있었다.

화엄사창건은755년,자장계화엄전통

제2장‘중관해안의『화엄사사적』과창건주연기’에서는화엄사의격을높이고자하는목적으로중관해안이『화엄사사적』을편찬했다는사실을파악할수있었다.중관해안은임진왜란으로인해화엄사가크나큰인적·물적손실을당한시기에집필했기때문에온전한역사를확인하기어려웠고,그러한이유로화엄사를신라최초의사찰인흥륜사와동격으로만들기위해창건시기를544년으로기록했다.그리고대표적인신라승려들이화엄사에인연을두고있는것처럼서술했다.그결과역사적진실을무시한허구와왜곡의기록만남게되었고화엄사의역사에서창건주의존재를지워버리고말았다.
기존문헌자료와선임연구를검토한결과연기는자장계화엄종승려라는점을확인했으며,8세기중반창건된화엄사는자장계화엄의전통을이어받았다는사실에접근할수있었다.즉화엄사는통일신라시대지리산권역에창건된황룡사자장계화엄종승려인연기가창건한사찰이라는결론에도달했다.
화엄사는나말여초연기계화엄종사찰인남악화엄사를대표하는관혜에의해후백제견훤을지지하다가고려의건국과함께쇠퇴기로에접어들었다.소용돌이치는나말여초의변환기에권력의향방을잘못짚은것이다.화엄사는쇠퇴하는흐름속에서도1092년대각국사의천이화엄사를방문하는무렵까지연기의화엄종법맥이유지되고있었다.그후일연이『삼국유사』를편찬하는1281년에이르면연기의화엄종법맥은사라지고화엄사는의상계화엄종사찰로묘사되고있다.이러한분석결과나말여초의시기를기점으로화엄사에서는연기의화엄종색채가옅어지기시작하여13세기말에사라진것으로추정된다.

17명선사의비문이알려준나말여초불교계의진실

제3장‘통일신라선사의비문을중심으로한화엄사관련사료’에서는9세기~나말여초의시기에활동한17명의선사의일대기를고찰했다.그목표는8세기중반창건된화엄사의성격을비교분석하여확보하는것이다.선사의비문은선사가활동한시기의불교계상황을사실그대로전달해주는일차사료다.대표적역사사료인『삼국유사』나『삼국사기』도13세기후반에편찬된것이기에통일신라에서나말여초까지불교계의상황은13세기불교계의시야로정리됐을가능성이크다.그렇기에선사의비문은통일신라에서나말여초불교계의상황을사실대로검토할일차적사료가되는것이다.선사의비문은당시화엄사의입지와위상을추정할만한중요한불교계정황들을담고있다.먼저선사의선문은화엄종을바탕으로활동하면서화엄을중시하고있으며,9세기에선문은화엄종사찰에서선문사찰로발전하고있다.이것은통일신라시대에조성된화엄사석축의조형성이다른선문사찰들에보이는동일한조형물을비교분석하는기준점을제공한다.즉화엄사에조성된석축양식이다른선문사찰에서도나타나고있다면화엄사조형물이원형일가능성이높다는사실을의미한다.
또한선사의비문을통해나말여초시기에는사찰의대단위불사가불가능하다는사실을확인했다.그리고화엄사의석축은통일신라시대조성되었으며,시기는8세기중반~나말여초이전으로범위를확정할수있다.즉화엄사의대단위불사는약750년부터890년사이에이루어졌다는시대성을확보한것이다.
선사의비문은화엄사의사사자삼층석탑의정체를확인하는과정에도기여했다.금당의뒤쪽언덕에세워져있는사사자삼층석탑은승려의부도탑으로의심되었으나,선사의비문을검토한결과선사의부도탑은9세기사찰밖산등성에조성된다는사실이확인되었다.또한9세기선사들은부도탑밑에매장하는장례전통을따랐다는사실도확인할수있었으며,부도탑이사찰안으로들어와금당뒤쪽위에건립된것은고려건국이후에나타난현상임을추정할수있었다.결론적으로화엄사의금당뒤높은곳에세워진부처의사리탑인사사자삼층석탑의조성방식이고려건국이후에는선사의부도탑으로바뀐것으로추정할수있다.이와같이선사의비문에서선사의부도탑건립의성격을분석함으로써화엄사의사사자삼층석탑은부처의사리탑이라는사실을확인했으며,이를통해본격적으로통일신라화엄종사찰과화엄사의성격을고찰할수있었다.

차문화의거점으로불교전국확산에기여

제4장‘통일신라불교확산의거점화엄사’에서는자장계연기의화엄종이라는사실을토대로화엄사의위상을밝히는데주안점을두었다.또한화엄사에조성되어있는독창적인조형물을분석하여지리산권역에화엄사가창건된이유를밝히고자했다.
대렴이중국에서가져온차씨를828년지리산화엄사에서심어재배했으며,화엄사에서재배된차가여러지역으로전달되면서신라에차문화가성행했다는사실을통해9세기화엄사가호남불교계의중심사찰이었음을입증했다.또한882년선각형미와886년동진경보가화엄사관단에서비구계를수계한사실을통해화엄사가호남불교계를담당하는관단사찰이었다는사실에접근할수있었다.
여러문헌을통해고려시대에는화엄사의자장계화엄전통이의상계화엄으로통합되고,이후조선시대에는화엄사의연기가화엄종승려가아닌선사로변모해가는것을확인할수있다.‘연기’라는한자표기가달라진사실이이를증명한다.이렇듯15세기말부터화엄사에서연기로대표되는전통은사라지고있으며,화엄사의쇠락으로이어지고있다.
화엄사는8세기중반지리산권역화엄종사찰의맏이격으로창건되었다고말할수있으며,당시화엄종의자부심을말해주는독창적형태의조형물들이조성되었다.대표적으로현재까지창작의조형성이밝혀지지않은사사자삼층석탑을비롯하여한국에서유일하게화엄경으로
벽을두른‘화엄석경’,고복형석등의조형성을선도한화엄사석등등단일사찰로서는독창적인조형물을가장많이탄생시켰다.
마지막으로이책은화엄사가가장융성했던통일신라8세기중반~나말여초의가람배치를추정했다.우선통일신라다듬돌초석을활용한전각들을검토하여처음건립된자리를확인했다.이어서건립이후자리가변경되지않은서오층석탑을기준으로통일신라시대화엄사의가람배치를추정했다.
이상의연구는화엄사의역사성을회복하는데주안점을둔탐구방안이다.특히의천이말한‘적멸당’과남효온이말한‘탑전’이현재사사자삼층석탑옆탑전이라는사실확인은통일신라화엄사의위상을확인하는결정적인단서로작용하고있다.1092년문헌에나타난‘적멸당’이오늘날적멸보궁을뜻한다는타당한근거를제시하고,화엄사의적멸당이한국불교계에서가장빠른시기에적멸보궁의의미와명칭을사용한것으로해석했다.또한‘적멸당’이라는표현속에서화엄사가지리산권역을중심의호남지역을아우르는연기의화엄종사찰이라는역사성을확보할수있었다.또한신라에차문화를성행하게한화엄사의역할을통해당시화엄사가신라의관단사찰이자호남의중심사찰이었다는사실을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