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기원 1 : 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 1945~1947 - 현대의 고전 16 (양장)
초판 발행 43년 만에 완역!
국내외를 통틀어 한국전쟁에 관하여 이 연구를 넘어선 책은 단연코 없다!
“상당히 자랑스럽게도 『한국전쟁의 기원』 두 책은 세 가지 상을 받았다.
1권은 미국 역사학회에서 19세기 이후 시대를 다룬 가장 우수한 저서에 수여하는
존 킹 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 저작상을 받았다.
2권은 국제연구협회International Studies Association의 퀸시 라이트Quincy Wright
저작상을 받았다. 그리고 1984년 전두환 독재정권은 1권을 금지도서 목록에 올렸는데,
두 권뿐인 외국인 저서 가운데 하나였다.” _ 브루스 커밍스, 한국어판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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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커밍스
1943년미국뉴욕주로체스터출생.1965년데니슨대학심리학과를졸업한뒤1967년인디애나대학에서석사,1975년컬럼비아대학에서정치학박사학위를취득했다.1967~1968년서울에서평화봉사단USPeaceCorps으로일하면서한국과처음인연을맺었다.
1975~1977년스워츠모어대학조교수를시작으로1977~1987년워싱턴대학,1987~1994년시카고대학,1994~1997년노스웨스턴대학교수를지낸뒤1997년부터시카고대학에서석좌교수등으로재직하고있다.1999년미국예술·과학학술원회원으로선출됐으며,앞으로나올『케임브리지한국사』의현대사부분편집장을맡고있다.
주저인『한국전쟁의기원』1권으로미국역사학회의존킹페어뱅크저작상JohnKingFairbankBookAward,2권으로국제연구협회의퀸시라이트저작상QuincyWrightBookAward을수상했으며김대중학술상(2007),제주4·3평화상(2017)을받았다.주요저서로『한국전쟁의기원』1·2(1981,1990)외에Korea’sPlaceintheSun:AModernHistory(1997.김동노외옮김,??브루스커밍스의한국현대사』,2001),NorthKorea:AnotherCountry(2004.남성욱옮김,『김정일코드』,2005),TheKoreanWar:AHistory(2010.조행복옮김,『브루스커밍스의한국전쟁』,2017)등이있다.
한국어판서문
머리말
1부배경
1장식민지한국의계급과지배기구
식민지통치기구|철도망의발달|상업|노동력의동원|저항운동
2장식민지한국의지주와소작농
일제강점기의농업|한국농민과시장의출현|한국의인구유출|동원과반란|결론
3장혁명과반발:1945년8~9월
일본식민통치의종식|조선건국준비위원회|조선인민공화국|인민공화국에대한반대|결론
4장도가니속의한국정책―1943~1945년미국의한국정책에서나타난대립
신탁통치안의대두―1943년3월|카이로회담:“적절한시기에”독립시킨다|얄타와포츠담:불확실한신탁통치|전후최초의봉쇄작전:1945년8월한국의분단|오키나와에서서울로“긴급히이동하다”|출발전의정책과계획|결론
2부1945~1947년중앙의정치상황
5장새질서의구축:미군의진주와정부·경찰·국방정책
인천과서울:새로운우방과적|식민지관료기구의재건|사법과경찰기구|국방경비대의출범
6장남한단독정부를향해
임시정부의귀국과“정무위원회”|좌익에대한탄압|토지·미곡정책|결론
7장국제협력주의적정책과일국독점주의적논리:경직되는중앙의태도,1946년
후견과독립,민족반역자와애국자:신탁통치를둘러싼혼란|궁지에몰린하지|미소공동위원회에서남한과도정부로|미소공위의협상|미소공위를전후한좌익탄압|좌우합작위원회와과도입법의원|결론:“불만의소리”
3부1945~1947년지방에서발생한한국인과미군의충돌
8장지방인민위원회의개관
인구변화|교통과통신의상황|토지소유관계|지리적위치|공백기의길이|정치적전사와지표|미군의각도점령
9장지방인민위원회의운명
전라남도인민위원회|전라북도인민위원회|경상남도인민위원회|경상북도인민위원회|충청남·북도인민위원회|강원도와경기도인민위원회|제주도인민위원회|결론
10장9월총파업과10월봉기
9월총파업|10월봉기|진압의방법|파업과봉기의원인|결론
11장북쪽에서불어오는바람
소련의점령|하의상달下意上達의정치|상명하달上命下達의정치|김일성의집권|북한의중앙집권화|사회혁명|통일전선정책|남쪽으로부는북풍|결론
12장결론:부정된해방
부록/주/참고문헌/옮긴이의글/찾아보기
전설의문제작43년만에완역
브루스커밍스의『한국전쟁의기원』이드디어한국어로완역출간되었다.미국에서1권이출간된1981년으로부터는43년만이고,2권이나온1990년으로부터는34년만에야이뤄진일이다.한국전쟁이70주년을맞고서도몇년이나더지나서야,무성한소문과이런저런설의진원지로오해되고일방적으로규정되어온커밍스의주저가한국땅에안착해독자들에게자신의모습을온전하게드러낼수있게되었다.
독자들은의아할것이다.다른것도아닌한국현대사의가장큰비극을최초로방대하게다루고세계적으로화제가된책이이제야완역됐다는게믿을수없을것이다.하지만정말그런믿을수없는일들이세상엔벌어진다.해외한국학성과들을국내에꾸준히번역소개해온김범국사편찬위원회편사연구관은누구와의상의도없이단독으로이책의번역에착수해순수번역에만5년이라는시간을바쳐서완성해냈다.그후그는출판사에접촉해브루스커밍스와정식으로한국어판계약을맺은후출간이이뤄질수있었다.브루스커밍스는번역원고를읽어본후보내온한국어판서문에서“고단한작업을끝낸김범박사가이제충분히쉬기를바란다.나는한국어를읽을수있는모든독자에게그의번역을강력히추천한다”라고격려했다.또한그는“40년전1권이출판된책이이제야공식적으로번역된것”에대해“전두환정권의금지도서목록에올라간것”과“한국에서분단이여전히”현재진행형이라는점을들어이해될만한일이라고덧붙이기도했다.
우리의역량과열의의부족을탓하지않을수는없다.한국전쟁에대한연구는그내재적동학과전쟁으로의발전과정에대한탐구보다는“범인을찾는식”으로전쟁발발의책임소재를밝히기에집착해왔던점,미국·소련의기밀문서와북한측노획문건들이공개되면서대략적으로큰그림이나오자커밍스책의오류를강조하는분위기가커져버리기도했을것이다.그러나커밍스는자신이미처보지못한소련문서들을통해전쟁전김일성의계획에대한스탈린의동의가있었다는점을인지한후에도자신의주장을철회하지않고있다.김일성은정권초기단계의모순을해결하기위해서라도전쟁이필요했다는게학계의넓은공감대를얻고있기때문이다.
한국어판출간의의의
지금이시점에서『한국전쟁의기원』을펴낸다는건어떤의미일까.신복룡교수가말한것처럼한국전쟁은매우난해하고도미묘한성격을안고있다.선전포고가없는전쟁,승패가없는전쟁,미국이승리하지못한최초의전쟁,악을제거하지못하고오히려분단을고착화시켜민족사적비극을극대화시킨전쟁,이데올로기적결전(냉전)을가속화시킨전쟁,무엇보다도개전의책임에대해가장논란이많은전쟁이었다.여전히진행중인전쟁이고,전쟁의상대방인북한은이제핵무장을완성했고,변함없이한반도는강대국사이에끼어있고,38선인근의작은도발도톱뉴스가되는사회에서이전쟁은결코역사가될수없다.여전히우리현실을강하게규정하고있는현안이다.아직까지도유일하게분단체제라는말이유효한땅에서한국전쟁은겉으로드러난전투양상과개전의책임론에가려진긴시간동안의사회동학문제가다시전면에올라올필요가있다.브루스커밍스의『한국전쟁의기원』은바로이측면에서의탁월한성과라고할수있다.
커밍스의책에대해서는수많은이들이찬사를아끼지않았고비판도많이이뤄져왔다.그중소련의지령을받은북한의대대적인남침으로전쟁이시작됐다는전통주의학설에최초로이의를제기한‘수정주의’라는점은이제는그다지강조하지않아도될것이다.전통주의,수정주의,신수정주의등의담론의틀에서커밍스의잭을재조명하는일은입체적인이책을지극히평면적으로단순화시키기때문에극도로피해야할일이다.사실이잘못돼수정해야한다는의미의‘수정’이란말에‘주의’를붙인자체가애초에무리한어법인데다,워낙오류로밝혀져폐기된입장도많아논의지형자체가그유효성을상실했다고보는게옳다.
『한국전쟁』을쓴정병준교수는자신의책에서“1950년6월에전쟁이시작된것은어느누구의잘못이라고말할수없다”는커밍스의주장을비판했지만정작커밍스의책을통독해보면커밍스가이전쟁에대해미국책임론에크게기울어져있다는점을느낄수있다.또한한국전쟁에서지나치게내부적요소를강조해한국전쟁을“내전”으로규정한것에대해서도많은비판이있었지만,이번완역판을찬찬히읽어보면커밍스가‘내전’을강조한이유는미·소양국의대립으로만이문제를바라보는것에문제제기를하기위함이었지,그가한국전쟁이“내전적성격을띤국제전”이라는점을부정한것은아니며오히려미국의세계전략에따라전쟁으로귀결되는과정을상세하게복원하고있음을알수있다.커밍스에대한강력한비판자인박명림교수는“남침설을가장강력하게회의하며이에대한반명제를구명하려시도해온브루스커밍스”라고지적했지만,커밍스는북침설은말도안되는주장이라고애초에지적했으며,1950년이전부터중소규모의유격전과국지전이1년넘게반복되며10만여명의사상자가발생하고있는상황에서북한의전면전으로의전환이과연남침이라는말로정리될수있는것이냐는회의감이자더정확한실상에대한요구였을뿐이다.1952년에『한국전쟁의비사』를펴내전쟁이일어날걸알면서도이승만,맥아더,덜레스,장제스등이침묵의음모로그것을방조했다는I.F.스톤의‘남침유도설’에더해커밍스의책에서도그부분이재검토되고있다.이에대해커밍스를‘음모론자’로보는입장도생겼지만전쟁당시미국무부의딘애치슨이나중에사석에서“한국이우리를구했다”라고말했던건사실이며,제2차세계대전종전후미국의세계패권추구에필요한국방비증액과,분열된국론의통일에있어한국전쟁이큰역할을했다는점은주지의일이다.한국내부의동학을분석하는과정에서‘농민’섹션을너무중시했고,‘노동’과‘노동자’섹션이갖는중요성은거의다루지않았다는손호철교수등의지적도있었다.
아무튼이제『한국전쟁의기원』은그육중한몸체를그대로내보이게됐다.특히번역되지않아소문만무성했던제2권은분량도1권의두배에달하는데다1945~1947년을다룬1권에비해1947년부터전쟁발발까지를다루고있으며,1권과는달리한반도의상황보다먼저미국의외교정책,세계정책,한반도정책,소련정책,일본정책등을매우밀도깊게구체적으로짚어이전쟁의국제전적측면을정말공을들여서그려내고있다.이제커밍스의책은한국사회에서다시읽히고rereading,그럼으로써이책이식민지시대부터한국전쟁때까지이사회가겪은여러가지격동적변화와그로인해배태된사회적갈등과그분출을촘촘하게그려낸시대의세밀화라는점을충분히인식해야할것이다.그리고분단체제의출발점이었던미군정의진주와미국이공산주의세력의확산을막고,정치경제적으로패권을추구하기위한외곽한계선을설정하기위해이땅에서벌인구체적인일이어떤것이었는지등에대해서도,식민지에서우후죽순처럼막독립한나라와민족들을통제하고이것을유리하게가져가기위해그들이짰던전략과실수들,그에기반해서이뤄졌던사회통제와회유,탄압등은무엇이었는지에대해서도,조선후기와일제강점기를거치며혁명이아니면해결하기힘들정도로계급갈등이심각해식민권력이물러난무주공산에사회주의혁명의분위기가우리가상상했던것이상으로강력했다는점,그렇기에북한의남한적화야욕이그당시문맥에서는그다지끔찍한상상력이아니었다는점등에대해서도진영과이념과매너리즘에서벗어난현실주의의시각에서많은논의가있었으면한다.여전히민족적현실에대해서는지나치게감정적이되고,피해의식에휩싸여있는대중적분위기에서는철도부설과산업화시설같은식민지근대화의측면을여타서방의식민지였던동남아의나라들과다른한국의특수성으로인정한커밍스의입장은불편할수있지만,반대로그가이책에서미군정이친일세력을그대로용인하고행정권력으로연착륙시킨지점을반복하여강력하게비판하고,그것이내전적요소의핵심으로강조한다는점은우리에게분명히시사하는바가있을것이다.
1권,해방과분단체제의출현1945~1947
커밍스는1권의머리말에서말한다.
“이연구는다른전제에서출발할것이다.한국전쟁의기원은1차적으로1945년부터1950년까지일어난사건에서찾아야하며,2차적으로는일제강점기에형성돼태평양전쟁이끝난뒤부터한국전쟁이일어나기전까지한국에특별한흔적을남겨놓은세력에게서찾아야한다고생각한다.이막간―식민지배로부터의해방에서시작해분단국가수립을거쳐1950년대포의포성으로끝난―의특징은혁명적성격이짙은시기였다는것이다.
1945년8월한반도전역에서는정치·경제·사회의전면적변화를요구하는주장이터져나왔다.정치변화의요구는정당,인민위원회,노동조합,농민·청년·여성의대중조직같은여러단체를스스로결성하는것으로나타났다.일제강점기이후대부분의농민이지주에게지배된소작제아래놓여있던토지상황에초점을맞춘사회·경제적변화의요구는이런폭발적정치참여를불러왔다.다시말해1945년이라는격변기에전개된한국정치를연구하려면해결되지않은채남아있는근본문제인지주와농민의관계를다뤄야한다.이것은일본지배에서벗어났을때한국사회가지닌본질적특징이었다.
1950년에일어난전쟁의기본쟁점은해방3개월만에명백해졌고,10만명이상이희생된농민반란·노동운동·유격전과38도선일대의전투를유발했다―이것은모두한국전쟁이일어나기전에발생했다.달리말하면1945년부터시작돼혁명과반동의변증법을거치며전개된충돌은국내적이고혁명적이었다.1950년6월에시작된재래적방식의전쟁은그저다른수단으로이전쟁을지속한것이었다.
그전쟁은본질적으로내전성격을지니고있었지만,한국은진공상태가아니었으며서로주도권을다투는강대국과한국의힘으로는어떻게하기어려운외부힘의소용돌이안에있었다.남한과북한모두상처입지않은채해방을맞지는않았다.양쪽다일제강점기를겪었다.그식민지외피는오랜기간지속되다가너무갑작스럽게산산이부서져버렸다.아울러1945년한국은사회내에잠재하는모순이뚜렷이나타나자그것을홀로해결하지않고전후戰後시기를지배한새로운두강대국,소련·미국과두고대국가,국내혁명에휩쓸려있던중국과몰락한제국일본과함께풀려고했다.이처럼40년가까이일제에속박되었던한국은태평양전쟁이끝난뒤분단되는비운을맞았다.일본부터만주까지길고복잡하게이어진구조는즉시해체됐고,그뒤5년동안한반도에제기된질문은어느쪽―모스크바·워싱턴·베이징―에새롭게충성할것인가였다.또는한국은자신과세계의관계를선택할수있는독립적이고자립적인통일국가의이상을실현할것인가?한국전쟁은이런문제와도연결돼있었다.(27~28쪽)
제1권에서는해방이후첫해를주로다뤘다.그시기에남한과북한모두기본구조가형성되고전쟁의씨앗이뿌려졌기때문이다.1950년과전쟁의본질을파악하는데연구가집중되면서그해는,그리고때로는1948년에이르는기간까지도대체로무시돼왔다―마치1948년이나1949년이전은중요하지않다거나남한에서3년동안시행된미군정만간단히언급하면된다는태도다.그러나1948년남한과북한에서분단정권이수립된것은1945년과1946년에만들어진사태의최종적표현일뿐이며,한국전쟁은그이전5년넘게계속된갈등의대단원이었다.요컨대1945년8월및1950년6월과관련된주요사건들은끊기지않는사슬로얽혀있다.
1945년부터1950년에이르는기간에는자체적인배경도있었다.한국의옛질서를무너뜨린36년의식민지배와거기서동원된여러방법은일제가무너지면서나타난새로운체제를준비하고형성하는기반이됐다.일본의통치는변화를촉진하거나억제하면서한국사회의계급구조에깊은영향을미쳤다.이를테면한국노동계급의출현을촉진하고기업가적요소의발전을저해했다.일제는중심부인자국의이익을위해한반도를근대화시켰고,1931년이후한국과만주를통합하려고시도하면서도로·철도·항만·통신시설을건설했다.그들은북부지방에주요산업시설을세웠다.이런근대적시설은모두당시한국으로서는지나치게나아간것이어서한국사회구조의실제적강점(또는약점)과는거의부합하지않았다.한국사회에서농민은소작제도에저항했고,양반은뒤로물러나인내를요구하는교육활동을하거나개인적명상에빠졌으며,민족주의자와공산주의유격대는제국의주변부나빈틈을공격해일본이시도한변화에저항했다.그에맞서일제는긴밀하고도속속들이침투시킨국가기구를이용해식민지를개발하고저항을진압했다.그것은한국에서국가의전통적역할을극도로왜곡하고전간기에전개된정치에큰영향을주었으며비대하고둔중한관료제도의유산을전후한국에남겨놓았다.농업과산업의변화는농민에게가장뚜렷한흔적을남겼다.그들은한국계급에서가장인구가많고해방정국에서대규모참여와폭넓은저항이라는두가지특징을보여주었다.이와관련해특히중요한것은토지소유의변화와국제무역증가,광범한사회적이동,일본이패망하기직전에집중된전쟁수행노력에한국인이적극적·직접적으로동원되면서나타난대대적인인구이동이었다.그결과한국의수많은농민은뿌리뽑혀해외로이주하거나공업에종사하게됐다.이런사건들은갑자기광범하게그리고처음일어날때가장큰피해를준다.한국에서대대로정주한사람들은오랜일상을잃어버렸고식민체제가종말을맞자사회로풀려나왔기때문에그영향은일본인이자기섬으로되돌아간후에훨씬더커졌다.해방기간에폭발적으로나타난대중참여의원천적동력을제공한것은이런농민―또는노동자의성격을강하게지닌농민과귀향한군인등―이었다.일제강점기에나타난변화들은일본이힘을잃었지만연합군이완전히점령하기전인해방직후에가장분명하게느껴졌다.그시간은한국인이주도한격렬한변화의무대였다.그시간은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인민위원회·노동조합·청년단체와지방의농민조합같은새롭게결성된좌익정치단체들이지배했다.이기간에모든한국인에게새로운‘인민공화국’이라는개념과수많은자치조직의실체가나타났다.그동안주목받지못했지만,이런해방체제와그것의운명은1950년까지한국정치의중심쟁점이됐다.외국세력이본격적으로개입하지않은이기간의충돌은이후특히한국적이고내전적인전쟁의기원을따질때핵심적요소였다.당시상황은한국이미국과소련의대립구도에서어느한쪽을선택했다기보다는미국과소련이당시한국에이미존재하는균열들을둘러싸고서로침해하면서대립했다는것이좀더사실에가깝다.미국과소련이한반도의운명에중요한책임을지게된상황은분명치않으며,소련과관련해서는더욱그렇다.자료가없어이책에서는소련의동기를추측할수있을뿐이다.그러나최근미국에서풍부한자료가공개되면서전후미국이아시아에개입한상황과관련된가장이른시점의견해를살펴볼수있게됐다.그런자료를소화한뒤미국과관련해어떤결론을내리든,극비문서에관심있는모든사람에게그것을공개하는것이민주정신에부합한다는것을독자들은명심해야한다.이는개인이알권리를지닐뿐아니라사람은자기과거로부터배울수있다는의미다.이두가지는우리가살고있는세계의진보적신념이다.이자료들은미국이진주만기습을당한뒤2년도되지않은시점에서한국문제에개입하지않는다는오랜정책을뒤집었고,자국의안보와관련해한반도를중요하게인식하기시작했으며,전쟁이끝난뒤한국문제를다룰전형적인국제적방식을만들었음을보여준다.그것은전후세계를지배할것이라고미국이생각한4대열강의다국적신탁통치다.여러세력을관련시키고다양한이해를수용해야한다고강조한것은그뒤미국의한국정책에서하나의흐름이되었고,그런생각은한국전쟁에대한미국의개입을의미한유엔군사령부의형태로나타났다.이런흐름에는처음부터끝까지직접대립하기보다는방해하거나반란충동을관리할수있는다양한교차적방법으로상대를제한하고억누르려는반공적의도도있었다.상대는물론스탈린이었고,그정책은소련을강대국의하나로만들려는그의욕망을면밀히고려했다.그러나한국의혁명적민족주의를염두에두지않아실패했다.소련인이아니라한국인혁명가와맞닥뜨리면서미국에서는국제협력주의자가물러나고자국중심주의에입각한정책이나타났으며,공산주의에맞서는방벽을한국에세우려는일방적인조치가추진됐다.이런흐름은봉쇄와대결전선을형성하고반공사회를만들수있는남한단독정부수립이라는자국중심적해결책을추구했다.물론이것은세계규모의냉전이진행됐다는것과동일한의미다.한국과관련해흥미로운사실은그것이매우일찍―일본이패망한지석달도지나기전에―나타났다는것이다.1945년9~12월미군정은일본이만든총독부와경찰제도그리고거기소속된한국인을그대로유지하고남한에서만국방경비대를출범시켜남한단독정부를수립하는방향으로나아간다는중요한결정을내렸다.북한에서도비슷한결정을내렸다는것을알지못한채일방적으로추진한통상적절차였고,미국의기존정책과곧잘상반된방향으로진행됐다.한국점령정책이일본점령정책과닮은부분이있다면바로이마지막측면이었다.이점을제외하면1948년“역진정책reversecourse”으로선회하기까지미국의일본정책과완전히대조적이었고때로는급진적양상을띠기도했다.역진정책은한국에서즉각적으로추진됐다.워싱턴의정책입안자들이지지했든소련과의협상에서타결됐든,점령초기몇달동안일어난사건은한국의분단을해소할미래의가능성을크게왜곡하고편향시켰다.그이유는다른방식이나더나은방법을추진하려면1945년마지막석달동안했던조치를번복해야했기때문이다.결정은번복되지않았고,그결과이시기에미국의한국정책수행에서가장중요한선택이이루어졌다.굳이독립하지않아도된다는소수의한국인을빼면,이런중요한선택은한국인의염원이미국의구상과거의언제나상충되는혼란속에서이뤄졌다.노동자·농민·학생과일제에동원됐다가고향으로돌아온이들에게해방체제는싸워지킬가치가있었다.사람들의참여는시간이갈수록확산됐다.일본의영향을크게받아인구변화와농업분쟁이함께일어난지역에서그리고지리적으로조직이뿌리내릴시간이충분했던지역에서소요가가장심했다.반면북한은고요한섬이었다.소련의정책은좌익한국인의전면적참여와지휘아래철저하지만지나치게폭력적이지않은사회혁명을지원했다.규율이잡히지않은광란의첫시기가지난뒤소련은한국인에게정권을이양하고배후로물러났다.단기적으로보면효율성있고비용이적게드는상당히성공한정책이었다.물론장기적으로보면소련은자신의의도대로유순한위성국을만드는데실패했는데,현재일부동유럽국가와는완전히다른양상이다.이것은소련이항일투쟁에몸담고소련의통제를거부한급진적민족주의세력을후원한결과였다.이와관련된사항은2권에서좀더자세히다룰것이다.최근이용할수있게된북한관계자료는1947~1950년의기간을살펴보는데매우유용하다고저자는말한다.그러나1권에서는수도와좀더많은인구가있는,세계최강국이점령한1945년직후의남한을주로다룬다.해방직후중요한사건은남한에서좀더많이일어났다.그러나북한의정치형태는첫해부터남한에널리퍼져있었으므로남한의좌익정치를파악하면북한의상황도이해할수있다.2권에서는1947~1950년을다룬다.이기간에한국정치와사회세력은근본적이지는않더라도중요한변화를겪었다.냉전이심화되면서미국은이번에는유엔과여러나라의도움으로한국정책을지원함으로써최악의결과를가져온앞선정책에서벗어나려고했다.1948년대한민국이수립되자미국은누가봐도취약한이정부와지도자이승만으로부터거리를두려고했다.군대는철수했고두나라의관계는서먹서먹해지기도했다.미국이남한을보호하겠다고한약속에의문이제기됐으며,그것은남한정부를길들이는데이용됐다.그러나대한민국을지키겠다는미국의약속은중단되지않았다고여겨진다.이정부가해방뒤미국이추진한정책의결과이자책임임이분명했기때문이다.그것은전후아시아에서수립된다른어떤정부보다훨씬더미국다운작품이었다.남한에는강력한우익대중정치가나타나북한에서쫓겨나고핍박받은사람들에게지지를얻으면서한반도에있는두나라의관계도바뀌었다.북한에서는좌익이권력을장악하면서평화통일의가능성은물거품이됐다.1947년소란스러운여름이지나간뒤남한에서좌익은거의소멸됐지만,앞서인민위원회가영향력을행사한지역을거점으로자생적인유격전이전개됐다.이런내부갈등은산악지역과제주도전체를휩쓸면서독특한전투국면으로접어들었다.남한반란세력은그에호응해세력을확장했다.권력을장악한이승만은일본군에서복무한북한출신장교들에게주요군사지휘권을넘겨주었다.반면북한에서는중국내전에서인민해방군의일원으로참가한수만명의병사를흡수해만주부대를중심으로군대를확대했다.유격전은1949년말까지계속되다가38도선을따라교전이벌어지면서중단됐다.그러나이런국면은남부빨치산의실질적패배와함께끝났다.앞으로살펴보겠지만그것은남북갈등이재래적인군사적방식으로치닫는전조였다.대규모재래전의효율적장점은1949년중국내전의최종단계에서또렷이나타났는데,한국의갈등도이국면으로접어들었다.그러나양쪽이재래적방식의공격을위해각자후견국의지원을받으려애쓰면서1950년초반기다림과시험의기간이이어졌다.또한1권에서는냉전의기원이한국문제안에잉태되어있었다는여러증거를검토한다.미·소의전형적인냉전관계는종전뒤아시아에서미국이소련과직접맞선유일한나라인한국에서처음으로나타났다.봉쇄containment정책은비록워싱턴의승인을얻지못했지만처음부터추진됐다.해방뒤첫해중대한몇몇시점에서울에있던봉쇄론자들은존J.매클로이,에이버럴해리먼,조지케넌등의지지를얻었다.1945년한국은미국에게중요하지않은변두리였지만,훗날다른나라와지역이가야할길을보여주었다.서울의미군정청이추진한모험적이고선제적인정책은워싱턴의동요와비난을불러일으켰지만,끝내호의와지지를얻었다.지휘권을쥔쪽은워싱턴이아니라서울인것같았다.달리말해1945년이나1946년무렵워싱턴에서잘못된정책이라고판단한것은1947년이나1948년이되자선견지명이있는통찰로평가됐다.물론1950년에감지된소련의한국침략에맞서워싱턴의대응이전세계적규모로전환되면서한국은전면과중심으로이동했고긴박감이뚜렷해졌다.그러나무력충돌및그결정과관련된영향력은처음부터미군정이가진것으로보인다.또한아시아혁명과관련해서도한국은많은관심을받지못했다.1945년한반도의혁명적분위기는무르익었다.소련과미국이진주하지않았더라도혁명은몇달안에한국을엄습했을것이다.풍부한경험을지닌지도자가많이포진한한국공산주의운동은아시아에서가장오래된전통을가졌다.특히남한의토지문제는혁명의조짐을보였다.그러나북한에서는베트남유형의공산주의가형성되지않았고남한에서는끈질긴반란이벌어지지않았다.그원인을밝히는것은1권의또다른주요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