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역사로오랫동안독자와만나온신병주건국대교수가오랜만에신간『서울의자서전』을출간했다.서울은조선의수도로출발한만큼조선시대와관련한다양한역사와문화공간들이남아있다.저자는이책에서51가지테마를잡고서울곳곳에숨어있는조선시대이야기를풀어냈는데,‘자서전’이라는제목을붙인이유는“서울이조선의수도가된이후지금까지역사의현장을중심으로자신의이력을계속써가고있다고생각했기때문”이다.책은조선건국이후한양천도가이뤄지던시점부터식민침탈의한이서리기까지서울의600년역사를한사람의생애를그려내듯했다.저자는독자들이이책에소개되어있는장소들을탐방하면서,역사의향기를체험했으면하는바람에부제를‘조선의눈으로걷다’라고붙였다.
이책은시기별로서울에남아있는조선의역사와문화공간들을소개하고,그곳에얽힌사연들을담고있다.『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연려실기술』을비롯하여,조선시대학자개인문집등검증된사료에바탕을두고이야기를전개함으로써역사적객관성을최대한견지하려고노력했다.그리고저자가직접탐방하면서얻은감상들도서술하여,제목그대로조선의눈으로서울이간직해온이력들을독자들에게가능하면생생하게전달할수있도록노력했다.
조선을상징하는공간인경복궁,창덕궁,창경궁등의궁궐과왕릉,조선이수도가되는데결정적인역할을한한강,정조의숨결이남아있는배다리,조선후기중인문화의산실인서촌등비교적알려진공간에숨겨진이야기들과함께,효종이홍덕이라는궁녀에게김치를공급할수있도록하사한홍덕이밭,단종의왕비정순왕후가옷감을물들였던자지동천,서울에서느끼는이순신장군의발자취,천민출신유희경이만든문화사랑방침류대,흥선대원군의별장석파정과이소정에숨은이야기등상대적으로잘알려지지않았던내용들도포함하여책을구성했다.최근영화「파묘」가크게흥행했는데,서울에도파묘후에옮겨진왕릉이있다는흥미로운사실도소개했다.
궁궐의도시,서울
서울은궁궐의도시라고해도과언이아니다.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등사대문안에모여있다.이책또한상당분량을궁궐과관련된이야기를다루고있다.첫번째글인‘경복궁과근정전,이름에담긴뜻’에서저자는500년간고려의수도였던개성을한양천도를단행함으로써대체한행위에담긴뜻을여러모로추적한다.천도1년후부터열달에걸친궁궐공사끝에완성된경복궁은755칸정도의소박한규모였다.1868년흥선대원군이중건했을때규모가7200여칸임을생각해보면1/10수준이다.성리학이념을담아건국한왕조였던만큼검소와절약을반영한것이라하겠다.‘대비들을위해세운궁궐,창경궁’에서는창덕궁과담장하나를두고붙어있어서창덕궁이수용할수없는공간을설치하는데의미가있었다고말한다.창경궁에는장희빈이인현왕후를저주하기위해흉물을묻은통명전,사도세자가뒤주에갇혀생을마감한문정전,혜경궁홍씨가『한중록』을집필하고정조가태어난경춘전등이있다.13번째글에선정릉동행궁을다룬다.전란을겪으며경복궁,창덕궁,창경궁까지폐허가되었을때당시황화방에위치한월산대군후손의집과인근의민가여러채를합해임시행궁으로삼았다.이곳은정릉동행궁이라고도불렸는데,태조의계비인신덕왕후의무덤인정릉이원래이곳에있엇기때문이다.선조는1593년부터1608년까지이곳에머물다이곳에서승하했다.이곳은광해군대에경운궁으로이름이바뀌었고,1897년고종은경운궁에서대한제국을선포하면서경운궁은근대를대표하는궁궐로자리잡게되었다.15번째글에서는광해군폐출의원인이된‘경희궁건설’을다룬다.광해군은새문동에왕기王氣가서려있다는술사김일용의말을핑계삼아경희궁창건에착수했지만,이는자신의이복동생인정원군을제거하기위한술수로서처음부터정치적인의도가컸다.반대상소도엄청났지만,왕의뜻에부합하려는자들도있었다.김극효는옛집터의섬돌과주춧돌을바쳤으며,유대일과이중기는집터를경희궁의대내에편입되게했다.광해군은이들에게관직을제수했다.1623년인조반정으로광해군을몰아낸서인세력은폐출의명분으로대규모토목공사를꼽았다.24번째글에서는북한산성안에있었던행궁의존재를제기한다.숙종이북한산성을수축한후그안에행성을만든것인데,영조때도이곳으로거둥이이뤄지곤했다.그러나행궁은일제강점기이후쇠락의길을걷다방치되어지금은내전지역에기단석과계단,주춧돌등만남아있는것이확인되었다.정조시대로넘어오면창덕궁이역사의중심에온다.창덕궁은조선의궁궐중원형이가장잘보존된곳이다.특히북원北苑,금원禁苑,상림上林등으로불린창덕궁후원은인공미와자연미가조화되어조선오아실의풍류와멋을상징하는공간으로인식되고있다.후원의넓이는9만여평으로조선궁궐후원중가장넓고아름답다.이곳에는조선초기부터100개이상의누각과정자가세워졌지만,현재에는40여채가남아있다.정조는특히창덕궁후원을사랑해경치가뛰어난10곳을선정해‘상림십경’이라했고,특히왕실도서관규장각을지었으며나중에는거처를이곳으로옮겼다.창덕궁후원에서정조의의지가가장잘나타나있는정자는존덕정尊德亭이다.후원의정자중에서도화려하고독특한모습을갖추고있다.
전쟁,내란과관련된공간들
서울의서쪽을대표하는인왕산옆에는안산鞍山이있다.산모양이말의안장같다고해서붙여진이름이다.안산은조선시대역사에획을그은공간이기도하다.18번째글에서이를다룬다.1624년(인조2)이괄의반군이한때한양을점령하고인조정권을거의무너뜨리려할때관군이반격의물꼬를튼곳이안산이었다.이괄의한양진격을저지하지못했을때안주목사정충신이나서서반군보다먼저안산을점거한다음진을치고한양도성을내려다보며적을공격할것을주장했다.안산전투의서막을그렇게올랐다.결국이괄의난은진압됐지만후유증이컸다.궁궐에대한방화와약탈,『승정원일기』의분실등이었다.이괄과함께반군의중심으로활약했던한명련의아들한윤은후금진영으로투항해정묘호란때후금군의선봉장이되어조선침략에앞장서기도했다.
서울시송파구삼전동.잠심롯데백화점에서성남방면으로고풍스러운비석이하나서있다.그유명한삼전도비다.정식명칭은‘대청황제공덕비’이지만과거이곳에삼전나루가있었기때문에삼전도비로불린다.삼전도비의건립은청의일방적인요구였지만당시정세상거절할수없었다.누구쓰느냐를두고도많은논란이뒤따랐다.아무도나서지않자다급해진인조는이경석,장유,이희일에게비문의찬술을명했다.인조의간곡한요청을받은이경석은국가의안위를생각하여청의비위에맞춰쓰긴썼지만,그치욕감을이기지못해자신의손을후벼팠다는이야기도전한다.삼전도비는청일전쟁후인1895년고종의명으로강물속에쓰러뜨렸으나일제강점기인1917년조선총독부에서주관해다시그자리에세워졌다.우리민족이역사적으로이민족에게지배받았다는사실을강조해식민지배를정당화하려한것이다.1945년광복후다시삼전도비를없애자는논의끝에땅에묻었으나1963년홍수로비석의모습이드러나자정부에서는역사의반성으로삼자는의미에서원래위치했던곳에서조금동남쪽인석촌동으로옮겼고,다시송파대로의확장으로삼전동의어린이놀이터안으로옮겨놓았다가,이후원래위치와가까워야한다는의견이대두해2010년현재의위치로옮겼다.
한강과서울
35번째글‘화가의붓끝에서다시태어난한강’은진경산수화의대가겸재정선의『경교명승첩』을다룬다.당시한강중에서도서울주변의한강을일컬어경강京江이라불렀는데,경강은도성안의시장에미곡,목재,어물,소금등을공급하면서유통망의중심역할을했다.‘경교’에는경강의교외라는뜻이담겨있다.정선이『경교명승첩』을그린배경에는정선의벗인사천이병연이있다.정선은65세때인1740년양천현령으로부임하면서,이병연이시를지어보내면자신은그림을그려화첩을만들자는제안을한다.이들의우정은결국1741년에두권의화첩으로완성되었다.화첩에대한애정이얼마나컸던지정선은“천금을준다고해도남에게전하지마라”는인장까지남겨두었다.정선은현재의미사리부근을그린「미호美湖」는특별히두점을남겼다.미호에위치한석실서원은안동김씨김상용을배향한서원인데,정선은그의후손인김창협·김창흡등의후원을받은만큼석실서원에대한감회가매우컸을것이다.「광진」과「송파진」「동작진」「양화환도」등의그림은18세기에이지역이포구로서중요한역할을했음을보여주고,해당위치에현재도광진교,동작대교,양화대교등주요다리가있는것도흥미롭다.인적,물적교류가활발했던공간의기능이지금도그대로이어지는것이다.
용산과노량진은조선시대화성으로자주행차했던정조의행렬이강을걸어서건너기위해배다리를놓았던장소다.당시정조가배를가로로이어붙여강을건너기위해주교청을설치하고적절한장소를물색하기위해과학적으로후보지를선정하는과정을실감나게묘사하고있다.
그외에한강의얼음채취와동빙고·서빙고의존재,얼음이잘얼지않을때난지도에서갈대를베어와창고주변을덮었던이야기들한강에대한이야기들이몇편더소개되고있어서울의자서전에서한강의존재감을여실히느껴볼수있다.
이책은청계천공사,단종이옥새를내준경회루,용산에독서당을세운성종,욕망과흥에절었던연산군의공간,단경왕후가왕을그리워하며머문인왕산치미바위,중종의정릉이파묘되어옮겨진사연,이항복과꽃구경의명소필운대,송시열과대명의리론의공간으로서의혜화동,성균관과그주변에얽힌이야기들등서울이겪어낸역사속장소들을다방면으로불러내며이야기를이어가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