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에 관하여 : 먼 곳의 자유

체호프에 관하여 : 먼 곳의 자유

$14.00
Description
정서의 혁명!

체호프의 인물들은
삶을 감각하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킨다

거대한 질문으로 이루어진 책
작가는 뉘앙스를 인식하는 사람
2021년 『픽션의 가장자리』에서 스탕달, 발자크, 포크너 등을 다룬 랑시에르가 2024년 체호프로 돌아왔다. 오직 체호프만으로 책 한권을 썼다. 이 작은 책은 체호프의 단편처럼 힘 있고 크다. 특히 상상력과 작품 해석의 여백이 광활하다. 정치와 미학의 관계를 파고들며 급진적 사상을 구축해온 랑시에르는 이 책에서 체호프의 소설을 통해 ‘자유’를 고찰한다. 다만 문학을 도구화하지는 않는다. 랑시에르는 작품을 자기 관점에 끼워 맞추지 않고, 자신이 작품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작가의 임무는 먼 곳에 있는 자유의 파열을 예속의 시대 속에 새겨넣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랑시에르는 이를 실현한 작가로 체호프를 꼽는다. 체호프는 러시아 혁명의 전조가 사회를 둘러쌀 때 직접 정치적 견해를 밝히지 않고, 사회가 얼마나 예속 상태인가를 인식·진단하는 데에만 힘을 쏟았다. 창조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채.
총 아홉 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앞 장의 결론이 뒤 장의 서두로 이어지면서 책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질문이 된다. 저자는 특히 시간에 주목한다. 시간의 무심함, 시간의 비밀, 시간의 사용…… 시간을 관습적으로 반복하고 진지한 일에만 쏟는 것은 복종이다. 벼락같은 변화는 ‘순간’을 통해 도래한다. 이러한 시간관념은 하이데거가 논한 ‘카이로스의 시간’(일종의 결단, 균열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랑시에르는 「꿈」에서 경찰들이 본인 임무를 잊은 채 유랑자와 함께 시베리아의 광활한 공간을 바라보는 데서 시간의 균열을 포착한다. 「어느 이름 없는 사람의 이야기」에서는 하인이 자기 직업을 포기할 때 혁명적 시간이 도래한다고 해석한다. 랑시에르는 동일하지 않고 반복적이지 않은 시간에서 미래를 향한 돌파구를 찾는 것이다.
체호프의 소설에서 경찰이나 관료들은 협박과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꿈을 포기하라고 요구할 뿐이다. 랑시에르가 체호프의 「꿈」을 중점적으로 분석하는 이유다. 예속은 공권력에 굴복하는 상황을 일컫는 게 아니다. 마치 ‘아무 일 없었던 듯 모든 것이 지속되고, 반복되는 동일한 상황에 대중이 순응하는 것’이다. 라프체프라는 인물이 이렇게 산다. “모든 것을 시간의 흐름에 맡기”는 라프체프는 랑시에르가 볼 때 전형적으로 예속 상태에 놓여 있다.
체호프는 영리하게도 등장인물을 앞서가는 법이 없고 자신과 등장인물을 동일시하지도 않는다. ‘시간’이 흐르는 향방을 쫓으면서 시간이 멈출 때 그 순간을 포착한다. 작가는 관조하는 사람이다. 단편소설이 고골에게 감각적 세계를 펼치는 순간이었다면, 체호프에게는 어떤 장소에서 멈춰 서는 순간이라는 게 랑시에르의 분석이다.
러시아는 자유라는 주제를 다루기에 알맞은 나라다. 게다가 19세기에 러시아 문학은 하나의 세계적 현상이었다. 당대에 체호프가 직면한 비판은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 않고 현실에 ‘무관심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학과 정치의 밀접한 관계를 탐구하는 랑시에르는 “작가란 낱말의 다의성과 표현의 미묘한 뉘앙스를 인식하는 존재”라고 규정한다. 예컨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레닌과 체호프에게 갖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레닌은 여러 모순적 대안 가운데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반면, 작가에게는 모순 자체가 질문의 핵심이 된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몸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추상적 미래를 보여주는 것을 해내는 데 그 역할이 있다.

저자

자크랑시에르

저자:자크랑시에르
파리8대학명예교수.1940년알제리에서태어났다.프랑스의철학자로정치철학,미학,교육철학을중심으로독창적인이론을전개했다.루이알튀세르의제자로출발했으나,지적엘리트주의를비판하며평등을근본원리로삼는독자적철학을구축했다.그는민주주의를단순한정치체제가아니라,기존질서를교란하고평등을실현하는‘불화’의과정으로정의했다.
또한문학과예술을단순히미적영역이아닌정치적실천으로이해했다.그의‘감각적인것의나눔’이란개념은예술이감각적질서를재편하고새로운주체성을구성하는힘을보여준다.문학에대해서도전통적인장르구분을거부하고,모든글쓰기가동등한표현가능성을가진다고여겼다.특히19세기리얼리즘문학에서새로운정치적감각의열쇠를발견한다.
그의사상적여정에서첫번째중요한분기점은루이알튀세르와의만남이었지만68혁명이후그와불화를겪기시작했다.랑시에르는과학적마르크스주의가지식인과대중사이의지적인불평등을전제로한다고비판하는내용을담은『알튀세르의교훈』(1974)을발표함으로써알튀세르와결별했다.같은해잡지『논리적반역』을창간하며약8년간19세기노동자와공상적사회주의자들이남긴기록물에서지적평등을입증하는사례들을조사했다.이는국가박사학위논문인『프롤레타리아들의밤』(1981)으로결실을맺는다.그반향속에서『철학자와그의빈자들』(1983)을발표해철학과사회과학의역사에서지적분할과위계의전통을재검토하고,자칭‘철학자’혹은‘스승들’에대한도전을이어나갔다.이과정에서나온저작이『평민철학자』(1985)와『무지한스승』(1987)이다.
1990년대에들어서면서는구소련의붕괴와더불어선포된정치의몰락/회귀에맞서정치,평등,민주주의에대해고민하며『정치적인것의가장자리에서』(1990)와『불화』(1995)를발표해세계적인명성을얻었다.1990년대중반부터는미학과정치의관계를사유하는데집중하면서『무언의말』(1998),『말의살』(1998),『감각적인것의나눔』(2000)등을발표했다.이후에도『미학적무의식』(2001),『영화우화』(2001),『이미지의운명』(2003),『미학안의불편함』(2004),『문학의정치』(2007),『해방된관객』(2008),『아이스테시스』(2011),『평등의방법』(2012)등을펴내기존예술사를재구성했다.이뿐아니라『우리는어느시간에살고있는가?』(2017)와같은정치적저작도지속적으로발표하고있다.최신작인『픽션의가장자리』(2021)는문학작품분석을통해문학혁명이어떻게민주주의의가장자리를따라나있는지살피며,아무것도아닌사람들이‘픽션의정치’를통해어떻게주체로등장하는지를탐구한다.

역자:유재홍
프로방스대학에서프랑스문학석·박사학위를취득했으며,지오노,들뢰즈,블랑쇼,랑시에르,스티글레르등에대한논문을발표했다.현재전남대에서강의하고있다.옮긴책으로『문학의정치』『스펙타클의사회』『영화우화』『마르크스의용어들』『스펙타클의사회에대한논평』이있다.

목차

1.유랑자의꿈
2.예속의속삭임
3.전신電信의노래
4.새로운여명
5.순간의힘
6.서사속의음악
7.스텝의노래에서해오라기의울음소리로
8.병사의눈
9.시작도끝도없이


옮긴이의말

출판사 서평

정서의혁명!

체호프의인물들은
삶을감각하는방식자체를변화시킨다

거대한질문으로이루어진책
작가는뉘앙스를인식하는사람

2021년『픽션의가장자리』에서스탕달,발자크,포크너등을다룬랑시에르가2024년체호프로돌아왔다.오직체호프만으로책한권을썼다.이작은책은체호프의단편처럼힘있고크다.특히상상력과작품해석의여백이광활하다.정치와미학의관계를파고들며급진적사상을구축해온랑시에르는이책에서체호프의소설을통해‘자유’를고찰한다.다만문학을도구화하지는않는다.랑시에르는작품을자기관점에끼워맞추지않고,자신이작품속으로걸어들어간다.“작가의임무는먼곳에있는자유의파열을예속의시대속에새겨넣는것이다”라고말하는랑시에르는이를실현한작가로체호프를꼽는다.체호프는러시아혁명의전조가사회를둘러쌀때직접정치적견해를밝히지않고,사회가얼마나예속상태인가를인식·진단하는데에만힘을쏟았다.창조는독자의몫으로남겨둔채.
총아홉장으로이루어진이책은앞장의결론이뒤장의서두로이어지면서책전체가하나의거대한질문이된다.저자는특히시간에주목한다.시간의무심함,시간의비밀,시간의사용……시간을관습적으로반복하고진지한일에만쏟는것은복종이다.벼락같은변화는‘순간’을통해도래한다.이러한시간관념은하이데거가논한‘카이로스의시간’(일종의결단,균열의순간)을떠올리게한다.랑시에르는「꿈」에서경찰들이본인임무를잊은채유랑자와함께시베리아의광활한공간을바라보는데서시간의균열을포착한다.「어느이름없는사람의이야기」에서는하인이자기직업을포기할때혁명적시간이도래한다고해석한다.랑시에르는동일하지않고반복적이지않은시간에서미래를향한돌파구를찾는것이다.
체호프의소설에서경찰이나관료들은협박과폭력을행사하지않는다.그들은그저꿈을포기하라고요구할뿐이다.랑시에르가체호프의「꿈」을중점적으로분석하는이유다.예속은공권력에굴복하는상황을일컫는게아니다.마치‘아무일없었던듯모든것이지속되고,반복되는동일한상황에대중이순응하는것’이다.라프체프라는인물이이렇게산다.“모든것을시간의흐름에맡기”는라프체프는랑시에르가볼때전형적으로예속상태에놓여있다.
체호프는영리하게도등장인물을앞서가는법이없고자신과등장인물을동일시하지도않는다.‘시간’이흐르는향방을쫓으면서시간이멈출때그순간을포착한다.작가는관조하는사람이다.단편소설이고골에게감각적세계를펼치는순간이었다면,체호프에게는어떤장소에서멈춰서는순간이라는게랑시에르의분석이다.
러시아는자유라는주제를다루기에알맞은나라다.게다가19세기에러시아문학은하나의세계적현상이었다.당대에체호프가직면한비판은정치적목소리를내지않고현실에‘무관심하다’는것이었다.하지만문학과정치의밀접한관계를탐구하는랑시에르는“작가란낱말의다의성과표현의미묘한뉘앙스를인식하는존재”라고규정한다.예컨대‘무엇을할것인가’라는질문이레닌과체호프에게갖는의미는전혀다르다.레닌은여러모순적대안가운데하나만선택해야하는반면,작가에게는모순자체가질문의핵심이된다.작가는등장인물의몸에활력을불어넣으면서추상적미래를보여주는것을해내는데그역할이있다.

오이절임을만드는삶과의작별
감각과사고가반복되는인물에게안겨주는새로운어조

작가는변증법론자가아니다!이것이문학과정치혹은문학과철학의차이다.뚜렷한인과관계와결말을설정하지않고,창문은늘열어두는것이중요하다.오히려인과관계로꽉짜인소설들이‘거짓말’을하고있는셈이다.시간과역사,삶은그렇게흘러가지않기때문이다.작가라면미래에대해냉소하는법없이체호프처럼물어야한다.이를테면「산다는것은」의클레오파트라는개인적유혹이나쾌락을뛰어넘어냉소적논리를부수고삶에대한반란을일으킨다.그녀가실현하는사랑은오이절임을만드는데구속받고자유를두려워하는삶전체와작별하는것이다.랑시에르는독자가동일한중심축을향하여형성되는사랑의에피소드에서자기운명을직시하는한순간을포착해낸다.특히선택에직면한두주인공을묘사할때‘그러나’라는접속사대신‘그리고’를쓴다는것에주목한다.‘그러나’는대립인반면,‘그리고’는앞엣것이뒤로연장되며희망과불확실성속에서시간이자유를향해열려있음을암시한다.랑시에르는“확실한삶이아직멀리있다는사실을분명히인식”할때우리는끈기있게새로운시작을추구할수있다고강조한다.
체호프소설속에서는‘민요의시간’이두드러진다.그는이선율속에감각,감정,권태,기대,향수,꿈을응축시켜감정을자아내면서직선의시간속에서틈입을만들어낸다.가령「나의인생」의주인공루치나는불행의원인을설명하거나독자들에게정의로운사회를위해행동하도록촉구하지않는다.체호프는그녀에게“슬픔이중대하다”는문장을안겨줌으로써글이음악이되도록만들었다.
이책이쫓는것은체호프소설속주인공들이먼곳에있는자유를추구하는과정이다.그들이불행한근본원인은예속때문인데,예속은감각과사고를계속재생산한다.랑시에르가생각하는작가의임무란사람들이감각하고느끼는“정서의혁명”을이루는것이다.「학생」에서눈물과기쁨이교차하는서사가바로이런변화를이뤄낸다.그것은감정의직접적드러냄보다묘사로나타나는데,즉부서지는빛,사각대는낙엽,환상의구름,갈대숲에서울려퍼지는소리가새로운감각을일깨운다.랑시에르는자연에대한체호프의깊은애착이민중을외면하다기보다오히려그고통을직시하는단초가될수있다고말한다.『스텝』이한가지예시다.이소설에대해일부비평가가‘멈춰있다’‘무심하다’라는비판을가하자랑시에르는‘사람들이감각적사건을경험하는여정이어조를확립시키고,이것이문학이할수있는역할’이라며맞선다.
혁명가들은민중의삶을변화시키겠다고외치지만,이것은추상적이다.체호프는문을쾅쾅두드리듯큰소리로외치지않은채이순간을살아가는사람들에게말을건넨다.어디서나울리지만어디에도속하지않는『스텝』속해오라기의소리로무심함을드러내면서매순간삶이더아름다워지도록만든다.
체호프는새로운삶의부름에응답할지에대해윤리적선택을강요하지않으면서도등장인물이한발내딛기만하면삶이변할수있음을보여준다.이를테면「약혼녀」의나자가새로운선택을하는순간을포착하면서‘무언가’와‘아무것도아님’사이에서경계를따라나가는여정에함께해준다.작가는등장인물들의감각을분위기로드러내고,주변의자연풍광들로표현한다.그안에시대와삶의방식을응축한하나의총체적현실이담겨있다.랑시에르는“자유에측정할수없는시간을부여하는것”이체호프작품의탁월성이라고평가하며,이것이바로“문학의정치”라고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