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대량학살자의 밝혀지지 않은 삶 | 양장본 Hardcover)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대량학살자의 밝혀지지 않은 삶 | 양장본 Hardcover)

$48.62
Description
잊힌 논문, 잃어버린 인터뷰, 묻힌 증거로 가득한 연구
1300페이지 분량의 녹취록 분석

“아렌트는 지나치게 성급하고 위험했다”
왜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이 중요한가

1906년 10월 14일, 한나 아렌트가 태어났다. 그보다 7개월 앞선 3월 19일, 아돌프 아이히만이 세상의 빛을 봤다. 동갑내기 두 사람은 유대인 학살을 둘러싼 피해자-가해자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주인공 삼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썼다. 아이히만 역시 자신을 주인공 삼아 『다른 이들이 말했고, 이제 내가 말할 차례다!』를 썼다.
아렌트는 1961년 예루살렘 재판을 참관한 뒤 이 책을 썼지만 후대의 학자들은 문서고에서 굽은 등을 하고 아이히만이 남긴 자료를 추적하며 읽고 해석하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을 쓴 슈탕네트가 그중 한 명이다. 아이히만이 악필로 쓴 원고를 잇는다면 길이가 총 240킬로미터에 달하는데, 그녀는 이 자료들을 손에 넣는 대로 읽었다. 그러고는 “아렌트가 너무 성급하고 무엇보다 위험”했다고 평가한다. 아렌트 책 출간 이후 50년 만의 반박이다. 이런 평가는 아렌트의 저술 이후 수십 년간 연구가 누적됐고, 자료가 계속 수집됐으며, 통계 데이터가 산출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제 고쳐 말하자면 아이히만은 “악의 평범성”의 상징이 아니라, 매우 노련하고 체계적으로 유대인을 학살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은 예루살렘 법원에 서기 전 아이히만의 생을 쫓는다. 아렌트의 책은 현재적 가치를 여전히 갖는다. 다만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광적인 칸트 애호가로서 쓴 상세한 기록물은 물론이고, 급진적 신학자 윌리엄 헐과 종교철학을 두고 논쟁한 사실도 알지 못했다. 또한 법정에서 아이히만이 자신의 최후 진술을 대부분 칸트의 말로 채웠다가 변호사에게 제지당했다는 사실도 몰랐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철학도처럼 보이려 한다는 점은 간파했지만, 이것이 어리석은 허영심과 철학 지식의 부족에서 비롯됐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아이히만이 망명지 아르헨티나에서 가졌던 대담의 녹음테이프와 녹취록의 존재는 오랫동안 알려져왔지만, 그 품질이 좋지 않아 체계적인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다.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슈탕네트는 이 테이프들을 해독하고,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자료들과 함께 정리해 아이히만에 대한 완전한 분석을 제공하려 한다.
850쪽이 넘는 이 책의 전반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이히만의 모습과 전후의 도주생활을 조명한다. 그는 신분증 위조, 여러 개의 가명, 도주 경로에 대한 거짓말 흘리기 작전 등으로 도피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에 정착해서는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이름과 존재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강했기 때문이고, 유대인 1030만 명이 아니라 600만 명밖에 죽이지 못한 것이 통탄스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족을 아낀 그는 도주 기간에 아내와의 사이에서 넷째를 출산하기까지 했다.

아이히만은 아렌트가 언급했듯이 “참으로 적당한 정신적 재능”과 “판단 능력의 부재” 및 “자기표현에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에서 아이히만을 300시간 동안 심문했던 아브너 레스는 그를 “충분한 지식을 갖추었고, 매우 지적이며 노련하다”고 묘사했다. 아이히만은 모든 텍스트를 자신의 쓸모에 따라 왜곡하는 지적 체계를 가졌지만, 어쨌든 그는 칸트 외에도 니체, 플라톤, 쇼펜하우어를 인용하고 심지어 유대인인 스피노자의 텍스트까지 끌어들여 자기 변론을 하던 사람이었다.
저자

베티나슈탕네트

저자:베티나슈탕네트
철학자이자역사학자.
함부르크에서철학을전공해「이마누엘칸트와근본적사악함」이라는논문으로박사학위를취득했다.이논문은『솔직함의문화』라는단행본으로출간되었다.18세기의반유대주의를다룬글을쓰고,‘거짓말’에대한연구를지속적으로하고있다.
『예루살렘이전의아이히만』(2011)으로독일NDR도서상(논픽션부문)을수상하고,2015년컨딜역사문학상최종후보에올랐다.『뉴욕타임스』는이책을2011년최고의책가운데한권으로꼽았다.
이외에도『사악한생각』『거짓말읽는법』『추악한안목』『섹스문화』『딜레탕트클럽』등을펴냈다.

역자:이동기
강원대일반대학원평화학과교수.현재한국냉전학회회장을맡고있다.주요저서로OptionoderIllusion?:DieIdeeeinernationalenKonfoerationimgeteiltenDeutschland1949-1990,『비밀과역설:10개의키워드로읽는독일통일과평화』『현대사몽타주:발견과전복의역사』등이있다.옮긴책으로는『하버드C.H.베크세계사:1945이후-서로의존하는세계』『역사에서도피한거인들』『일상사란무엇인가』(공역),『근대세계체제3』등이있다.

역자:이재규
서울대서양사학과에서학사와석사과정을마쳤다.현재베를린자유대학역사문화학부에서박사과정을밟고있으며,‘독일제국통일무렵바덴가톨릭교도들의정당활동’등의주제를연구하고있다.

목차

한국어판서문
주요등장인물
서론

1장“제이름은상징이됐죠”
1.공적삶으로의길
2.전후의이력
3.익명성혐오

2장막간극
근동으로의가짜흔적

3장아르헨티나의아이히만
1.“약속의땅”에서의삶
2.고향전선
3.우정의작업

4장이른바사선인터뷰
1.작가아이히만
2.대화하는아이히만

5장안전하다는착각

6장역할변경
예루살렘의아이히만

7장막후극

감사의말
옮긴이의말

출판사 서평

잊힌논문,잃어버린인터뷰,묻힌증거로가득한연구
1300페이지분량의녹취록분석

“아렌트는지나치게성급하고위험했다”

★독일NDR도서상★
★『뉴욕타임스』2011최고의책★
★유대인전국도서상최종후보★
★컨딜역사문학상최종후보★

왜예루살렘‘이전’의아이히만이중요한가

1906년10월14일,한나아렌트가태어났다.그보다7개월앞선3월19일,아돌프아이히만이세상의빛을봤다.동갑내기두사람은유대인학살을둘러싼피해자-가해자다.아렌트는아이히만을주인공삼아『예루살렘의아이히만』을썼다.아이히만역시자신을주인공삼아『다른이들이말했고,이제내가말할차례다!』를썼다.
아렌트는1961년예루살렘재판을참관한뒤이책을썼지만후대의학자들은문서고에서굽은등을하고아이히만이남긴자료를추적하며읽고해석하는데훨씬더많은시간을쏟고있다.『예루살렘이전의아이히만』을쓴슈탕네트가그중한명이다.아이히만이악필로쓴원고를잇는다면길이가총240킬로미터에달하는데,그녀는이자료들을손에넣는대로읽었다.그러고는“아렌트가너무성급하고무엇보다위험”했다고평가한다.아렌트책출간이후50년만의반박이다.이런평가는아렌트의저술이후수십년간연구가누적됐고,자료가계속수집됐으며,통계데이터가산출되었기때문에가능했다.그리고이제고쳐말하자면아이히만은“악의평범성”의상징이아니라,매우노련하고체계적으로유대인을학살했던사람이라고할수있다.
『예루살렘이전의아이히만』은예루살렘법원에서기전아이히만의생을쫓는다.아렌트의책은현재적가치를여전히갖는다.다만아렌트는아이히만이광적인칸트애호가로서쓴상세한기록물은물론이고,급진적신학자윌리엄헐과종교철학을두고논쟁한사실도알지못했다.또한법정에서아이히만이자신의최후진술을대부분칸트의말로채웠다가변호사에게제지당했다는사실도몰랐다.아렌트는아이히만이철학도처럼보이려한다는점은간파했지만,이것이어리석은허영심과철학지식의부족에서비롯됐다는잘못된결론을내렸다.
아이히만이망명지아르헨티나에서가졌던대담의녹음테이프와녹취록의존재는오랫동안알려져왔지만,그품질이좋지않아체계적인조사가이뤄지지못했다.철학자이자역사학자인슈탕네트는이테이프들을해독하고,그동안알려지지않은자료들과함께정리해아이히만에대한완전한분석을제공하려한다.
850쪽이넘는이책의전반부는제2차세계대전때아이히만의모습과전후의도주생활을조명한다.그는신분증위조,여러개의가명,도주경로에대한거짓말흘리기작전등으로도피계획을치밀하게세웠다.하지만아르헨티나에정착해서는자신을숨기지않았다.이름과존재를드러내고싶은욕구가강했기때문이고,유대인1030만명이아니라600만명밖에죽이지못한것이통탄스러웠기때문이다.게다가가족을아낀그는도주기간에아내와의사이에서넷째를출산하기까지했다.
아이히만은아렌트가언급했듯이“참으로적당한정신적재능”과“판단능력의부재”및“자기표현에무능한”사람이아니었다.이스라엘에서아이히만을300시간동안심문했던아브너레스는그를“충분한지식을갖추었고,매우지적이며노련하다”고묘사했다.아이히만은모든텍스트를자신의쓸모에따라왜곡하는지적체계를가졌지만,어쨌든그는칸트외에도니체,플라톤,쇼펜하우어를인용하고심지어유대인인스피노자의텍스트까지끌어들여자기변론을하던사람이었다.

삼림감시원,양계장주인,토끼사육자,벤츠노동자로서의아이히만

아이히만은유대인문제담당관으로서보안국을운영했고,1942년반제회의이후독일의유대인말살정책을계획·실행했으며,특히헝가리유대인4분의3이사망한데대한책임이있다.하지만전쟁이끝난후그는15년간자유로운삶을누렸다.어떻게이런일이가능했을까?
오늘날우리가아는것과달리전후에는홀로코스트에대한정보가아직불충분했다.이런무지덕분에나치인사들은큰처벌은받지않았고,게다가정보기관과경찰의무능,무관심,공모까지더해졌다.공모는여러수준에서이뤄졌다.이들은정치적전복계획을세웠고뜻을같이하는이들과연결망을구축했으며,나치의찬란한세계관을옹호하기위해문서들을위조했다.그리고그한가운데에바로아이히만이있었다.
아이히만은전직나치조직의도움을받아오스트리아로이주하면서오토헤닝거라는새이름과집토끼사육사라는직업을얻었다.취미로바이올린을켰던아이히만은이시기악기연주로현지여성들을유혹하기도했다.또한자신이히틀러아래에서경력을쌓은것은우연일뿐,사악한것은나치정권하의다른사람들이었다고주장했다.1950년오토헤닝거는돌연유럽에서종적을감췄다.대신아르헨티나에리카르도클레멘트라는인물이출현했다.브로커들이새로운이름과신분을만들어준것이다.클레멘트는수력발전소프로젝트에들어가측량팀을이끌었다.또그는말을타고팜파스지역을유랑하며,아콩카과산등정을할만큼여유로운삶을살았다.아이히만의사망신고를했던아내는아이들과함께이쪽으로건너와남편과재회했다.헤어져산지7년만이었다.부부는금슬이좋아곧넷째아들을얻었다.그렇게평생클레멘트라는이름으로살면아이히만은꼬리가밟히지않았을지도모른다.
하지만나치치하에서유대인문제담당관으로존재감을발휘했던그는전원생활에만족못하고활동반경을점점넓혔다.그리고타국에서나치인사나극우언론인과만나자신의신분을드러냈다.이책에서주요자료가되는사선과의대담은1957년에시작되는데,두사람이언제처음만났는지는정확히밝혀지지않고있다.아르헨티나가나치전력을가진독일이주민사회와깊이연루된사실을숨기려하기때문이다.어쨌든아이히만은언론인사선에게끌렸는데,이유는사선이저술가이기때문이었다.카리스마넘치는사선은모던한문체를썼고,독자를사로잡는비법을갖고있었다.그는극우잡지『길』을통해아르헨티나에서뿐만아니라전후독일에서도영향력을확대해나가고있었다.
저자가되려하고독자를포섭하려는욕망,그리고극우사상에대한집념은아이히만과사선의공통점이었다.특히사선은홀로코스트에대한유대인들의주장이사실이아님을증명하는책을쓰는데필요한자료와증언을아이히만에게서얻어내려했다.
하지만1950년대후반홀로코스트범죄의윤곽이점점드러나면서전나치들의은신처로숨통이조여오기시작한다.1959년2월먼저요제프멩겔레에대한체포영장이발부됐다.그는곧바로파라과이로숨었다.대중이대량학살에대해더많이알게되자이제신문에아이히만의이름이오르기시작했다.하지만이해3월20일에도아이히만은옛나치동료의도움으로벤츠에서창고노동자자리를얻었다.아이히만은사교적이어서벤츠에서도친구들을금세사귀었다.매일왕복네시간걸려통근하던그는주말이면아들들과함께본인소유의작은땅에집을짓기시작했다.이시기아이히만은많이읽고,종종바이올린도켰다.

가해자,기록자,저술가로서의아이히만

전후아이히만의주무대는아르헨티나다.이곳은전후나치인사들이공동체를이루며살았던나라중하나다.이들이향수에젖을수있게이곳에는최신신문과책들이갖춰져있었고,정치적입장과직위가비슷한사람들끼리회합을가졌다.아이히만도부에노스아이레스에집을구했는데,나치의핵심인물들을도피시키고,직업을알선하고,부동산중개까지해주는나치즘신봉자들이있었기때문이다.이들에게전직나치정책의실행자는역사의현장을증언해줄매우소중한존재였다.
아르헨티나에서아이히만과쌍벽을이룬사람은빌럼사선이다.네덜란드출신의친위대종군기자인그는고유의문체를가진필자로활약했다.그는이른바‘사선서클’을이끌면서매주아이히만을초대해이야기를듣고논쟁을벌이며,이모든내용을녹음했다.이책의후반부는아이히만이아르헨티나에머문지7년째인1957년4월경부터시작해10월중순까지이어진레코딩작업이주를이룬다.거기서아이히만은유대인학살이독일의이익을위해역사적으로필요한정책이었다면서자신의활약상을자랑스레떠벌인다.
사선은아이히만과의대화를녹음함과동시에보조원들에게타이핑하도록했다.오늘날아이히만에관한주요자료는녹음원본파일,타자화된녹취록,녹취록사본,아이히만의저술,그리고아이히만의방대한메모들이다.녹취록은1300쪽분량이고,녹음테이프는29시간분량에달해신뢰할만한1차사료가되며,이로써우리는사선의집거실을들여다볼수있다.
여기참석한멤버들은친위대대원,나치당지구당위원장,나치외무부‘유대인과’직원,작가,독일군공군조종사,괴벨스언론담당부관,독일외무부장관아들등이었다.집단총살,죽음으로이끄는강제노역,굶주림과가스실을통한살인모두를조망할수있는인물로아이히만만있는것은아니었으나,아이히만은명성을스스로만들어내이들의시선을끌면서그에소속되는입장권을얻어냈다.
모임의분위기는마치세미나같았다.잡담은일절없고종이바스락대는소리와배려로가득찬존중만있었다.참석자들은매번여러시간역사이론을논하며,문서와전문서적을지칠때까지읽고토론했다.사선은다음모임때까지읽을과제를나눠주면서준비를잘해오라고당부하기도했다.
그로부터4년후예루살렘법정에선아이히만은사선서클에서드러낸본모습을은폐하는데힘을쏟았다.그는자신이더이상민족사회주의자가아니고지난15년간품행을가다듬으며정치와는거리가먼조용한시민으로지내왔고,또반유대주의같은일체의적개심을버린지오래라는방어전략을폈다.
그는이스라엘첩보요원에게납치돼예루살렘감옥에수감되자자기변론을준비하며사선서클에서연습했던토론과대화기술을모두활용하게된다.즉그대담은결과적으로아이히만에게재판예행연습이되어준다.
아이히만은감옥에서도끊임없이읽고기록하면서저자가되려는욕망을버리지않았다.“책의장정과표지는진주색이나비둘기색한가지로유지되어야하며,명확하고직선적이고매력적인서체가사용되어야한다.”재판후평결을기다리면서그는표지색깔,글꼴뿐아니라잠재적편집자나기증본에대한의견까지덧붙였다.
아이히만의심문내용은총3564쪽에달했다.이자료가공개되리라는것은자명했기에아이히만은이때부터최종텍스트를수정하는데몰두했다.맞춤한변명들이보태졌기에,이때의진술을1957년에기록된『아르헨티나문서』와비교해보면미묘하게모순되는점들이드러난다.결국예루살렘에서아이히만이남긴기록은원고,진술기록,편지,개인서류,이념적인글,개인적메모,여백에적은수천개의메모등총8000쪽에달한다.

***
아이히만은자기연출에능했다.따라서슈탕네트는아이히만의진정한광기가1945년부터시작됐다고본다.나치의패배이후가면을쓴그는예루살렘법정에서기전15년간모두를속일만한삶을살았기때문이다.1957년에기록된『아이히만문서』의저자는아이히만이라고할수있다.하지만슈탕네트는이문헌들을읽으려는이들에게주의를준다.여기서는역사적사건에대한새로운인식을직접얻길기대해서는안되는데,아이히만처럼오로지이해관계만생각했던사람이신뢰할만한목격자인적은한번도없었기때문이다.이문서에서얻어낼수있는유일한것은‘아이히만의사고방식’이다.왜냐하면거짓말은그자신이진실이라여기는심연위에서만들어지기때문이다.그리고『예루살렘이전의아이히만』은바로그심연을들여다보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