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킹덤 (15세기 후반에서 현재까지 러시아의 민족 만들기와 제국을 향한 탐색)

로스트 킹덤 (15세기 후반에서 현재까지 러시아의 민족 만들기와 제국을 향한 탐색)

$30.00
Description
존재한 적 없지만 전쟁까지 불러온 상상의 단일체, 범러시아 민족

잃어버린 왕국을 좇다 근대 국가의 길을 잃어버린 러시아의 역사
15세기 후반부터 우크라이나ㆍ벨라루스와의 관계 속에서 자라난
러시아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뿌리를 추적하다
제국이 정체성이 되어버린 민족
러시아 민족 만들기 프로젝트가 직면한 독특한 과제

전후 탈식민주의 시대를 거치며 제국주의는 민족주의와의 결합에서 빠지고 점차 과거의 유물이 되어가는 듯했다. 대영제국이 해체되며 인도를 비롯한 영연방의 식민지들이 하나둘 독립했고, 독일 역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독일 민족 국가로 통합하려는 구상을 포기했다. 최근 러시아, 중국의 제국적 행보는 이러한 세계 흐름에서 벗어난 예외 사례로 치부되곤 했다. 그러나 2026년 새해 벽두부터 전해진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 소식은 민족주의의 고양이 제국주의와 얼마나 빠르게 결합할 수 있는지 단번에 드러내며, 여전히 역사를 뒤적여 두 개념의 조합 공식과 경로를 파악할 필요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동유럽사 연구자인 세르히 플로히 하버드대학 교수는 2016년 모스크바 한복판, 크렘린궁 인근 광장에서 러시아 제국과 민족이 얽히고설킨 매듭을 상징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웃 나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대공이자 키이우 루시의 군주였던 볼로디미르를 기리는 동상이 러시아 수도 한복판 가장 중요한 장소에 세워진 것이다. 1147년 모스크바를 창건한 유리 돌고루키 동상보다 더 높이, 더 중심에 자리한 이 동상의 위치는 러시아의 역사적 정체성에서 키이우 루시, 더 나아가 우크라이나가 지니는 함의에 골몰하게 한다. 그 함의는 동상 제막식 연설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이 볼로디미르 대공을 러시아 영토를 넓히고 중앙집권 국가의 토대를 마련한 정치인으로 호명할 때 분명해진다. 푸틴은 그가 “여러 민족, 언어, 문화, 종교로 이루어진 연합”을 이룩했다는 언급을 빠트리지 않는다.
저자는 볼로디미르 대공 동상과 푸틴의 연설에서 키이우 루시라는 ‘잃어버린 왕국’ 신화를 되찾으려다가 근대 국가로 거듭나는 길을 상실하고 또 하나의 ‘로스트 킹덤’이 된 러시아의 모습을 본다. 미궁에서 빠져나가는 실타래의 매듭을 푸는 직조공처럼, 이 책은 민족주의와 제국주의가 교차하는 약 600년의 러시아 역사를 정교하게 풀어내며 근대 민족 만들기에 있어서 러시아가 직면한 과제의 보편성과 독특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오늘날 러시아는 인종·문화·정체성의 ‘정신적 지도’와 러시아연방의 정치적 지도 사이를 조화시키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회학자 어니스트 겔너가 말한 근대 민족주의의 핵심 요구, “정치적 단위와 민족적 단위가 일치해야 한다”는 원칙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20세기에 제국 해체를 경험한 열강들도 겪었던 보편적 문제다. 하지만 러시아의 문제는 한층 더 깊다.
러시아 문제의 핵심은 러시아 민족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있다. 러시아 민족은 오로지 러시아 연방 안팎의 러시아 인종으로만 구성되어 있는가 아니면 동슬라브인인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도 포괄하는가? 다른 제국들이 피지배민과 국가 기원 신화 및 역사적 뿌리를 공유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하필 러시아는 이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와 공유해왔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근대 민족의 발명을 다룬 기존 연구들과 이 책이 차별화되는 지점도 러시아 민족의 이러한 조건을 조명하는 데에 있다. 저자는 제도적으로 실재하지 않았던 범러시아 민족이 발명되어온 역사를 추적한다.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러시아인으로 구성된 범러시아 민족은 지도에서 찾을 수도 정치적 실체로 구현된 적도 없지만, 러시아 정치·문화 엘리트와 대중의 의식 속에는 강력한 현실로 기능해왔다. 이러한 상상의 단일체가 실제 지도 위의 국가들보다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정도다.
범러시아 민족에 기반한 러시아 제국은 영국 사학자 제프리 호스킹의 표현대로 영국처럼 “제국을 소유한” 형태가 아니라 “제국 그 자체”다.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영국의 식민지들처럼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서 수익을 가져다주는 영토가 아니라 이미 러시아 제국 본토의 일부처럼 여겨진다. 러시아는 중국과 더불어 제국의 행보를 보이는 예외 사례가 아니라 제국의 또 다른 유형에 해당하며, 이러한 제국의 탈식민화 또한 다른 종류의 과제를 요구한다. 이 책의 서평을 쓴 소련 역사학자 마크 에델이 인용한 중국사학자 피터 C. 퍼듀의 탈식민화의 두 유형을 참조해보자. “제국을 소유한 경우 식민지를 버리고 본토 핵심을 보존할 수 있다…. 제국 그 자체라면 주변부의 상실은 국가와 사회의 완전한 변형을 의미한다.”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는 제국의 매듭을 풀기보다는 ‘잃어버린 왕국’이라는 과거 체제의 복원을 추구했다. 그 결과는 2014년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동남부 침공, 그리고 2022년 우크라이나와의 전면전 돌입으로 이어졌다. 저자는 책 말미에서 러시아가 포스트-제국 세계의 요구에 맞춰 영국과 독일 등 제국처럼 러시아연방의 국경 안에서 근대적 시민 국가를 형성하기를 촉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냉전 혹은 이보다 더 끔찍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출간 후 9년이 지난 오늘날의 현실은 새로운 냉전 체제일까, 아니면 이미 더 끔찍한 국면에 접어든 걸까. 확실한 건 제국을 뺀 민족 개념을 새롭게 상상해야 한다는 점, 여기에는 국가와 사회의 완전한 변혁이 수반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매듭을 풀려면 이 책의 시선을 빌려 키이우 루시라는 ‘잃어버린 왕국’의 기억이 어떻게 러시아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형성해왔는지 거꾸로 되짚는 작업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저자

세르히플로히

1957년옛소련고리키(현러시아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태어났다.드니프로페트롭스크대학을졸업한뒤동대학원에서박사학위를받고,1990년타라스셰우첸코키이우국립대학에서국가박사학위를받았다.1983년부터드니프로페트롭스크대학에서강의하다가1991년캐나다로이주해앨버타대학역사학과교수로재직했다.2007년부터는하버드대학역사학과에서우크라이나역사학교수로재직중이며,현재하버드대학우크라이나연구소소장을맡고있다.
참사생존자이자역사학자로서체르노빌원전사고의포괄적역사를다룬『체르노빌히스토리』로베일리기퍼드상과푸시킨하우스도서상을수상했고,2015년우크라이나어로쓰인뛰어난문학작품과연구에수여하는안토노비치상을수상했다.『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역시푸시킨하우스도서상최종후보에올랐다.
그외에지은책으로『슬라브민족의기원』『유럽의문우크라이나』『마지막제국』『얄타』『핵전쟁위기』등이있으며,『유럽의문우크라이나』는『뉴욕타임스』베스트셀러에올랐다.

목차

머리말
지도

1부러시아발명
1장차르정의탄생
2장제3의로마
3장제국주의국가

2부루시의재통합
4장계몽군주
5장폴란드의도전
6장국경지역을차지하기위한전투

3부삼분화된민족
7장우크라이나의부상
8장대러시아,소러시아,백러시아
9장언어사멸시키기

4부민족혁명
10장민중의노래
11장전제정의붕괴
12장러시아혁명

5부해체될수없는연방
13장레닌의승리
14장민족공산주의
15장러시아의귀환
16장대조국전쟁
17장소비에트국민

6부새로운러시아
18장하강하는소련적기
19장러시아세계
20장러시아의전쟁

에필로그
감사의말
옮긴이의말

출판사 서평

★『BBC역사매거진』올해의책선정★
★『키이우인디펜던트』추천★

러시아민족의이론적,정치적곡예의역사

러시아민족을어떻게정의할것인가라는질문은러시아역사전반을관통하는핵심쟁점이었다.다른제국국가들처럼러시아에서도제국이먼저고민족이그다음이었기에정치적국면과제국의이해관계가재편될때마다민족을정의하는논리또한새롭게설정되었다.저자는15세기후반이반3세의모스크바공국이몽골칸으로부터독립하던시점으로거슬러올라가약600년간러시아가우크라이나,벨라루스,폴란드등동유럽이웃국가와의관계속에서키이우루시의영토적·상징적통합을회복하고자모색했던이론적,정치적곡예의역사를재구성한다.
이책은특히러시아민족과제국의형성역사에서큰역할을했던우크라이나에집중한다.러시아민족정체성은우크라이나와키이우루시라는신화를공유했을뿐만아니라,우크라이나영토로의확장과우크라이나지식인들과의사상적교류에따라재구성되어왔다.17세기키이우수도사들이집필한러시아최초의역사교과서『개요서』는키이우루시영토에살았던사람들을포괄하는‘슬라브-로시아’민족개념을제시했고,이책은러시아에서150년이상기본교재로자리매김하며이후민족개념논의에지속적으로영향을미쳤다.18세기모스크바제국이러시아제국으로탈바꿈하는과정에서도키이우지식인들이서양에서모스크바로들여온근대민족개념이전통적왕조와종교개념과결합되어새로운형태의제국주의국가구축에기여했다.19세기에러시아제국이서부의우크라이나와벨라루스영토를두고폴란드반군과다툴때도키이우는교육기관,고고학연구등새로운제국정체성을건설하는현장이었다.
19세기후반에이르러우크라이나를비롯한동슬라브인의민족주의가부상하며러시아민족정체성모델과의긴장이고조된다.러시아제국은이들을수용하기위해대러시아인(러시아인),소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백러시아인(벨라루스인)으로삼분된러시아민족개념을제시했다.하지만이는세민족을문화적외투아래통합하려는목표로제시된언어적개념일뿐,각민족에자치권을부여하려는의도가있었던것은아니었다.1905년과1917년의러시아혁명을거치며이제국적민족모델은붕괴되고,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은각자의영토를주장하는별개의민족으로자리잡는다.
제정러시아가무너지고볼셰비키가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을수립하면서세민족은각각공식적으로독립된공화국을갖추게된다.소련은러시아민족주의와국수주의를배척하고민족간의평등한공존을표방했지만,이해관계의변화에따라토착화정책을펼치다가이를번복하고억압하는등일관되지않은민족정책을펼쳤다.결국소련정권은러시아민족을동등한여러민족중으뜸이되는부류로규정하고,모스크바에권력을집중시켰으며러시아어를소련전역에서사용하게하는등러시아문화에동화시켜제국주의가발전할토대를마련했다.
1991년소련의붕괴이후러시아는제국의유산을되살려새로운민족정체성을구축하려했고,결국2014년크림반도합병과돈바스전쟁으로이어졌다.역설적이게도이는러시아제국이지배하던역사적‧문화적공간의해체를앞당겼다.2005년에서2015년사이,두민족이한민족이라고생각하는러시아국민의비율은81퍼센트에서52퍼센트로줄어들었으며,우크라이나의러시아에대한이미지또한부정적으로바뀌었다.더불어러시아인이주민다수를이루던크림반도와돈바스일부지역에대한러시아의점령은전선양쪽에서인종적민족성을강화했다.
이모든논쟁의역사를통해드러나는것은범러시아민족이라는개념이하나의안정된정체성이아니라,제국의정치적필요에따라끊임없이재정의되어야했던불안정한구성물이라는점이다.범러시아민족을지탱하기위해러시아의사상가와지도자들이감행한이론적·정치적곡예는민족과제국의관계를푸는데끝내실패했다.그허망함을저자는절제되고균형잡힌논조로생생하게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