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그림자 : 삼전도 항복과 조선의 국가정체성 문제

아버지의 그림자 : 삼전도 항복과 조선의 국가정체성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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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1637년 병자호란 패배와 1644년 명제국의 멸망
하늘이 무너지고 인간의 도리마저 잃어버린 세상에서 조선은 어떻게 살아남았나
1636년 12월, 한겨울 위태로운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은 무엇이 두려웠기에 그토록 척화를 외쳤을까? 청군이 포탄을 퍼부으면 성벽은 곧 무너질 것이고, 포탄을 퍼붓지 않으면 성안 사람들은 모두 굶어 죽을 것이었다. 어느 한 곳에서도 근왕병의 봉화가 피어오르지 않는 상황에서도, 인조는 1637년 정월 초하루에 백관을 거느리고 북경에 있는 명 황제에게 절을 올렸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대체 무엇이 그들이 군신의 예를 다하도록 이끌었을까? 그리고 그해 1월 30일, 마침내 임금은 삼전도로 나아가 오랑캐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하였고, 그로부터 얼마 후 중원의 황제는 오랑캐에게 쫓기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적이 천하를 유린하여 인과 의가 끊어지고 충과 효가 무너진 세상에서 이제 조선은 어떤 나라이며, 앞으로 어떤 나라가 되어야 했나?
『아버지의 그림자』는 조선왕조의 국가정체성이라는 시각에서 이 문제에 접근한다. 조선의 국가정체성은, 곧 조선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던 양반 엘리트 지배층의 정체성과 불가분의 관계였음을 분석하고, 그런 정체성이 당대의 양반 지배 구조와 직결되어 있었음을 여러 측면에서 밝힌다. 또한 오랑캐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삼전도 항복의 후유증이 조선의 국가정체성을 뿌리째 흔들었다고 설명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한중 두 나라의 다양한 사료를 교차 검토했고, 그 속에서 누군가 의도적으로 기록을 조작한 흔적을 발견했다. 그 밖에도 1620년대에 임금과 신하가 목숨을 걸고 맞부딪친 주화 대 척화 이념 논쟁부터 1690년대에 온 나라가 국운을 걸고 뛰어든 의리 현창 사업까지, 책 속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살아남아야 했던 ‘새로운 세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저자

계승범

저자:계승범
서강대학교사학과를졸업하고워싱턴주립대UniversityofWashington에서박사학위를받았다.동아시아맥락에서보는조선시대정치·지성사와한중관계사를주로탐구한다.특히양반지식인들의중화인식과유교의한국적특성이결합하여조선을빚어낸양상및그역사적유산이현재한국사회에서여전히작동하는양태에관심이많다.
대표저서로는『유자광,조선의영원한이방인』(2인공저,2023),『모후의반역:광해군대대비폐위논쟁과효치국가의탄생』(2021),『중종의시대:조선의유교화와사림운동』(2014),『정지된시간:조선의대보단과근대의문턱』(2011),『우리가아는선비는없다』(2011),『조선시대해외파병과한중관계』(2009)등이있다.역주서로는『북학의』를영어로번역한AKoreanScholar’sRudeAwakeninginQingChina(2019)와『북정록』(2018)등이있다.

목차


책머리에―05

1장프롤로그:왜국가정체성문제인가?―13

2장광해군대말엽외교노선양상과정사논쟁,1618~1622―29
후금과의국서교환문제―32
요동난민과징병칙서―42
존호문제―55
정사논쟁의의미―59

3장정묘호란의동인과목적,1623~1627―63
정변후조선과후금의관계―68
맹약의내용으로본침공목적―73
누르하치와홍타이지의조선정책―82
침공의의미―90

4장척화론의양상과명분,1627~1642―93
정묘호란과척화의이유―96
병자호란과척화의논리―102
존주의모습들―114
척화론의의미―119

5장전쟁원인의기억바꾸기,1637~1653―131
국서의교체와‘이상한’축약―135
침공이유의변개―138
병란의귀책사유변경―147
기록조작의의미―156

6장북벌론의실상과기억바꾸기,1649~1690―161
효종대북벌논의의실상―164
나선정벌조선군사령관의심정―170
북벌의성공사례만들기―181
기억조작의의미―185

7장에필로그:조선의국가정체성과‘아버지의그림자’―191
척화론:조선은왜질줄알면서도전쟁을불사했을까?―195
자구책:역사기억의조작과‘조선중화’라는자기의식화―203
현재성:조선과대한민국의국가정체성문제―224

주―228
참고문헌―250
찾아보기―255

출판사 서평

병자호란,언제까지한국사의비극으로만둘것인가?

한국사회에서병자호란에대한이해는매우평면적이다.큰틀에서보면16세기말에대규모국제전인임진왜란을치르면서명이구축해놓은동아시아국제질서에균열이발생했고,그틈에서만주가성장하면서패권이교체되었다.병자호란은만주의후금/청이중원의명과전면전에나서기전에후방의위협을제거한부수적사건으로서,이상의전제안에서조선의상황과입장을분석하는시도가대부분이었다.그결과한국사관점에서이전쟁은‘광해군의중립외교가실패하고결국오랑캐의침략을받게된사건’으로,무엇보다임금이성밖으로끌려나와땅에아홉번머리를찧으며적에게무릎꿇은‘삼전도의굴욕’은1910년‘경술국치’에버금가는한국사최악의순간으로널리인식되었다.
그러나최근한국사학계에서는당대의국제질서변동이라는외부요인에주목하여조선과청의관계를재구성하는시도가이어지고있다.특히2019년출간된『병자호란,홍타이지의전쟁』(구범진,까치)은침공의당사자인홍타이지(청태종)를주인공으로삼아청의의도와전황을정밀하게재현해서큰주목을받았다.

계승범의새책『아버지의그림자』또한전쟁의가장주요한원인으로‘홍타이지’를지목한다.그러나거기에그치지않고,병자호란이라는사건의앞과뒤를더욱넓고치밀하게연결한다.그는광해군재위후반부에조정에서치열하게전개되었던국왕과신료사이의이념논쟁에서시작하여주화론과척화론이어떻게격돌했는지를밝히고,병자호란시기에청태종과인조가주고받은국서를놓고일어난기록변조사건과숙종시기에임금과사대부가함께벌인기억조작사건을순서대로추적한다.이를통해임금보다더중요하고오랑캐보다더두려웠던,그래서조선의종묘사직을무겁게짓눌렀던바로‘그것’의실체를역사의전면에꺼내놓는다.

효치국가의최종모델,군부·신자관계

먼저계승범은광해군재위후반부에외교노선을두고벌어진척화대주화논쟁의양상을주목한다.1619년광해군은도원수강홍립이하1만4000명의조선군을요동으로보내명을지원하였다.그러나사르후전투에서명군은후금군에게궤멸되었고,조선군도절반이전사하고나머지는포로가되었다.이런상황에서명은명대로,또후금은후금대로조선의선택을강요하기시작했다.후금의압박은갈수록거세졌고,회담중에조선의사신이구금되고역관이살해되기까지했다.광해군은후금과대화하는것만이문제를해결할유일한방책이라고여겼으나,조정신료들은임금의명을거부하고오히려“변방의일은장수에게일임하고국왕은간여하지말라”거나“명황제에게죄를짓느니차라리성상(광해군)께죄를짓겠다”라고능상하길서슴지않았다.양쪽의갈등은1623년인조반정,즉신하가무력을동원하여임금을쫓아내면서종결되었다.

지은이는여기에서광해군의주화론과신료들의척화론이정사(正邪)논쟁구도로진행되었다는점에주목한다.앞서그는『모후의반역』(역사비평사,2021)에서광해군대인목대비폐위논쟁이마찬가지로인조반정에이르는과정을설명한뒤“이제효가모든가치의우선순위가되었고조선은효치국가의길로들어섰다”라고의의를밝혔다.그리고이번책에서는효치국가의구조를조선과명의국가관계로까지확대한다.그주장의핵심은황제(君)는곧아버지(父)이고임금(臣)은그의자식(子)이되는군부·신자관계이다.

나는조명관계를중국적질서에서이루어진예외적이고특이한관계로보고자한다.왜냐하면번국(조선)이망하는한이있더라도황제국(명)에대한의리를지켜야한다는주장은말할것도없고,심지어황제국이완전히멸망해사라졌음에도기존의사대의리를영원히유지해야한다는논리는유교정치이론어디에도없기때문이다.더나아가책봉·조공관계를군신관계로만보지않고부자관계로이해하고실제로그렇게실천까지한예는동아시아역사상조명관계가유일하다.즉명을대국이아닌상국,더나아가군부로보는순간이미조명관계는춘추전국시대의사대자소관계에서이탈한셈이다.더나아가한당이래중국적책봉·조공관계의실제와도다른,몹시변형된관계일수밖에없다._62쪽

사대교린의이론을아득히초월하여명을천하에유일한상국(上國)으로보고,거기에서한발더나아가심지어‘군주와아버지가일체화된’군부의나라로섬기기시작한조선에서광해군의‘주화론’은현실외교정치의선택지가될수없었다.오히려양반사대부들은그것을사론(邪論)이고사의(邪議)로인식했다는것이이책의주장이다.정의(正義)이며정론(正論)인척화는단지조선이청에항복했다고해서그의미와방향이달라지는이념이아니었다고논의를이어간다.

죽을힘을다해살아남은조선의정체성정치,기록과기억바꾸기사례

1637년1월,조선은전쟁에서패배하였지만나라는망하지않았다.그런데청에게밀린명은1644년내부반란까지겹치며결국멸망하고말았다.홍타이지를‘황제’라고부르고청에세폐를보낼지언정복심에는명의권토중래를품고있던조선에게이것은하늘이무너지는대사건이었다.우리에게익숙한역사서술은이후의조선후기를‘북벌론’과‘북학론’으로설명한다.조선은청에복수를기약하며군사력을증진했고,청의학문과기술을배워내실을다졌다는것이다.거기에명청교체로인한국제질서의변동이조선에서는신분제변화와상업·문화의발달,국학의대두같은사회·문화적전환으로이어졌다는설명을더한다.

반면『아버지의그림자』는이국면에서‘기록전쟁’과‘기억바꾸기’사례를발견하고그내용과의미분석에천착한다.예를들어,청사료에따르면남한산성아래에진을친청태종은자신이천명을받아천하를평정한새로운황제이니조선은하늘의뜻에순종하라는권유와함께인조의무모함과실정을질책하고조롱하는서신을보냈다(『청태종실록』,1637년1월2일기사에실린국서).하지만조선사료는그런내용을거의다생략한채최선을다해명에대한사대의리를지키다가병란을당했다는내용이핵심을이룬다(『인조실록』,1637년1월2일기사에실린국서).똑같은서신이왜이렇게다르게기록된것일까?계승범은『인조실록』의사관들이‘의도’를가지고홍타이지가보낸서신을아예다른내용으로실록에기재한사실과서신을축약할때침공의원인을조선의기호에맞게의도적으로조작한정황을세밀하게밝힌다.그리고동일한의도를가진기록변조증거를『조선왕조실록』의여러곳에서추가로확인한다.외부변화에적응하지못한조선이,그변화속에서살아남기위해내부에서치열하게‘역사기록전쟁’을전개했던것이다.이대목에서이책의핵심주장인‘조선의국가정체성’의실체가선명해진다.

이어서‘북벌론’과‘나선정벌’과정을추적하며논지를뒷받침한다.효종의북벌의지야말로순수하고절실했다고보는통설과는달리,효종조차도북벌을내부단속용‘프로파간다’구호로활용했다고강조한다.1654년과1658년두차례에걸쳐참여한‘나선정벌’의의미가처음에는‘청질서에종속된조선의처지’를드러낸우울한사건이었으나,그세기가끝날무렵에는‘조선이육성한강군이북벌에성공’한영광의기억으로변화하는과정도정체성정치의연장으로제시한다.

요컨대,북벌론은삼전도항복으로발생한국가정체성위기를타개하기위한정치선전이었다.하지만세월이흐르고국제정세가변하면서북벌론은시의성을잃어버렸다.바로그럴즈음에,국왕을포함한조선의지배엘리트들은“북벌의시대”에치명적오점이었던나선정벌을오히려북벌의큰성과물로둔갑시킨것이다.국가권력이주도한집단적기억바꾸기요,국가정체성의회복이었다.이런일련의작업이있었기에,조선왕조는17세기중후반의국가위기에서벗어나,이후18세기에꽤안정을취하며어느정도부흥할수있었다._190쪽

계승범식사회과학적역사서술의백미,현재완료진행형역사

이렇게해서조선은살아남았다.병자호란에서무기력하게패배하고,삼전도에서치욕을당했지만인조와그의후예들은270년이나더용상을지켰다.중국황제에게죄를짓느니조선임금과함께죽겠다던척화파의후손들도죽지않고살며대대손손권세를누렸다.영화[남한산성]에서척화파의화신으로그려진김상헌은오랑캐에삶을구걸하느니사직을위해죽는것이영원히사는길이라말하고스스로목숨을끊었지만,현실의김상헌은청에무릎을꿇지않고도살아남아숨이끊어지는순간까지관직과녹봉을지켰다.

계승범은책의말미에이르러역사에대한학계의논의와대중의이해는모두본질에서벗어나있다고지적한다.그러면서제국주의일본에식민지배당한경험이한국인에게‘병자호란은얼마든지피할수있는전쟁’이었다는심리적방어막을만들게했다고설명한다.그결과근대의‘합리성’을교육받은학자와일반인들에게유교적문약과현실을도외시한명분론때문에조선이삼전도의굴욕을당했다는통설이널리퍼졌다는것이다.광해군을정변(쿠데타)으로쫓겨난,그래서구국의기회를잃어버리고만영웅이자개혁군주로추상한일들은당연히그반작용이었다.

정치한고찰없이그저척화론은헛된명분론이고,주화론은상황을고려한현실론이었다는이해에기초한질문인지라,분석보다는다분히감정이섞인질문이다.특히인간의선택을저런양단논리로재단하여설명할수있는가,라는비판을피할수없다.우리네개인의인생사를돌아보면수많은선택과결정의연속이었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그런데그런허다한선택이유를명분이나실리어느한가지로만설명할수있을까?대개그둘이화학적으로섞여서결정에이르지않았는가?세상사에명분없는실리는없고,실리없는명분도없는법이다.명분은실리가떠받쳐주어야제대로기능하며,실리는명분으로잘포장해야작동하기마련이다.명분과실리를분리해서보기어렵다는의미다._194~195쪽

이제현재로시점을옮길차례이다.계승범은우선역사를현재와과거의대화로정의하고,그것을여전히계속되고있는‘현재완료진행형’의사건으로한단계더가공한다.일찍이송시열은삼전도에서의항복을용인한다면자식이부모에게효도하지않고신하가군주에게충성하지않으며결국노비도주인에게복종하지않는금수의세상이올것이라고경고했다.그에따라조선의지배엘리트들은대외적/현실적으로는청질서를받아들이되국내적/심리적으로는계속명질서안에머물며“아버지의그림자”를조선의새국가정체성으로단단히뿌리박았던것이다.그림자안에서조선은계속해서정의(正義)와정론(正論)세계의일원일수있었다.그리고이구조를대한민국의국가정체성문제와비교하며논의를지금,여기로확장시킨다.2023년가을에있었던육군사관학교내‘홍범도흉상’이전논란이나정권교체때마다반복되는‘건국절’논쟁등은모두그끝이“대한민국의국가정체성은무엇인가?”라는질문에닿아있다고가리키며,이데올로기가현실정치를지배할때어떤일이생기는지우리는이미잘알고있다고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