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의흐름을바꾼유목제국1000년역사를복원하다
흉노,돌궐,위구르로이어지는‘고대유목제국사3부작’완성
국내의대표적중앙아시아사연구자인정재훈교수와1998년이래로중앙아시아사분야학술서와교양서를꾸준히출간하고있는사계절출판사가함께한‘고대유목제국사3부작’이마침내완간되었다.정재훈교수는2016년『돌궐유목제국사』에이어2023년『흉노유목제국사』를출간했고,지난2005년박사학위논문을바탕으로출간했던『위구르유목제국사』를새로운형식과체제에맞게다시써서8년여에걸친긴여정에마침표를찍었다.신간『위구르유목제국사』는전세계중앙아시아사학계의최신연구성과를전면검토및반영하고,지도와도판,고대투르크비문의원문과번역문,국가구조및카간의계보를담은도표등을대거보강하여현시점에서가장충실하고균형잡힌위구르유목제국통사로완성되었다.
정재훈교수의‘고대유목제국사3부작’은기원전3세기중반부터9세기중반까지북아시아를중심으로전개된약1000년의역사를복원하려는시도였다.제국을형성했던흉노,돌궐,위구르가중심이지만,그밖에도북아시아초원에등장했던수없이많은유목세력의길거나짧았던역사를전반적으로아우른다.정교수는이3부작을통해유목제국의세계사적위상과의미를환기하고,유목민이활약했던무대인‘초원’을정주세계와동등한하나의역사단위로자리매김하고자했다.독자들은이3부작을통해중국사중심의동아시아사를다른관점에서바라보고,유목민이파괴와살육을일삼는‘야만적인’존재가아니라동서를연결하며세계사의흐름을바꾼역동적인주체였음을확인할수있을것이다.
“위구르는교역국가를지향한유목제국이었다”
문명사관과중국중심역사관에서벗어나위구르의세계사적위상재정립
5세기중반고차의일원으로역사에처음등장한위구르는당의기미지배를받으며군사적봉사를하거나,돌궐에귀순했다벗어나기를반복하며세력을유지하다가744년건국을선언했다.건국이후카를룩,바스밀등주변세력을차례로복속하는한편,기마궁사로서‘군사적특기’를발휘해당의변경방어에적극적으로협조했다.당에서온화번공주와카간이혼인하면서초원에정주시설을마련하고다수의정주민을받아들였으며,당과의견마무역에서얻은비단을소그드상인을통해서방으로유통시키면서막대한경제적이익을얻었다.787년당과토번의대립으로하서교통로가막히자,당에서막북초원을거쳐북정(베쉬발릭)에이르는‘회골로’를연결하고이를발판삼아790년대초에는서방오아시스지역까지영역을확장해동서교역의주역이되었다.
위구르는초기부터초원에성곽으로둘러싸인교역거점인이른바‘카라반사라이’,즉도시를건설했는데,교역로를따라이도시들이연결되면서초원에‘도시네트워크’가형성되었다.이도시들은계절이동을하는유목민과교역을위해드나드는상인,중국을비롯한정주세계에서넘어온사람들이교류하고공존하는공간이되었고,이를운영하며교역국가를지향하던위구르는9세기에이르러거대유목제국으로발전했다.자연재해와전염병,계승분쟁이복합적으로작용하여840년갑작스럽게붕괴하고말았지만,각지로흩어진그후예들은‘위구르’라는정체성을유지하며이후세계사의전개에큰영향과유산을남겼다.
이와같이위구르는동서를연결하는거대한제국을운영했지만,그동안그역사적위상을제대로평가받지못했다.초원에들어선정주민을위한거주시설,상업과행정에능한소그드인과의결합,고등종교인마니교수용,문자사용,당과의적극적인교류등위구르가보인포용적이고탄력적인모습은일본과서구학자들에의해‘정주화지향’으로해석되었다.즉유목민은생활여건을개선하기위해점차정주세계에‘동화同化’할수밖에없는데,위구르역시‘정주적요소’를적극수용하며점차‘문명화’의길을걸었다는것이다.붕괴이후이들이주변지역으로이주하여중앙아시아의‘투르크화’를야기했다는사실이그증거로제시되기도했다.다른한편으로10세기초민족이동기에농경지역과초원을동시에지배한이른바‘정복왕조’인거란의등장과연결하여위구르를‘고대유목국가의종말’이자‘정복왕조의배경’인과도기적유목국가로규정하는논의도있었다.
그러나정재훈교수는이와같은논리는모두‘열등한’유목국가가‘우월한’정주국가를향해발전해간다는일종의문명사관일뿐만아니라,유목제국의운영방식에대한몰이해에서비롯한것이라고지적한다.흉노,돌궐을거쳐위구르에이르기까지유목제국특유의생존방식을연구해온정교수는다양한외래요소와의공존자체가유목제국의본질적인속성이라고주장한다.특히흉노,돌궐에비해상대적으로좁은지역,즉막북초원에고립되어있던위구르의입장에서는정주적요소를적극수용해교역국가로발전해가는것이곧체제를강화하고유지하는길이었다.
교역거점이기도한도시의건설이제국의‘하드웨어’를확보한것이었다면,마니교와같은고등종교의수용은다양한능력을지닌외래집단의문화전반을받아들여국가발전의동력으로삼는‘소프트웨어’의완비였다고할수있다.……760년대위구르는당으로부터확보한막대한양의비단을바탕으로교역체제를정비하기위해마니교도상인의도움이절대적으로필요했다.뵈귀카간은이들이머물수있는도시를건설하고마니교를받아들였다.이는유목국가운영에필요한기본요소중하나였다.막북초원이라는공간적제약을극복하고유목제국을발전시키려면외부의다양한요소를받아들여야했다.기존연구들에서지적한바와달리,위구르가정주적성격을보이는외래요소를수용한것은붕괴이후오아시스등지로이주해정주하기위한것,즉‘문명화’의전제가아니었다.교역국가로발전하기위해체제를고도화하는데그것이절대적으로필요했을뿐이다.-204~212쪽
유목제국위구르의역사가온전히평가받지못한또하나의이유는현대중국영토의일부인신장위구르자치구가처한정치적상황이객관적인역사연구를어렵게하고있기때문이다.최근중국에서는소수민족위구르를하나의중국에통합하려는정치적고려에의해당과위구르의우호적관계만을강조하거나,위구르고유의‘민족사’를축소하는방향으로연구가진행되고있다.정재훈교수는제삼자의시각에서중국편향적인시각을교정하고,유목민의입장을더해한층객관적이고균형잡힌역사를서술하고자했다.따라서이책은문명사관은물론‘중화민족공동체’중심역사관에서도벗어나,유목적관점을중심으로위구르의세계사적위상을다시세우는작업이라고도평가할수있다.
고대투르크비문자료와한문자료의연결
지난100여년간의투르크비문및위구르역사연구집대성
정재훈교수가유목민의관점에가까운역사서술을하기위해택한방법은원사료,그중에서도위구르가남긴고대투르크비문을직접읽고해석하여한문자료와연결하는것이다.유목민들의역사는대개정주세계가남긴방대한사료를통해연구될수밖에없는데다행히돌궐,위구르등은고대투르크문자로새긴비문,즉자신의기록을남겼다.특히위구르는고대투르크문자만이아니라상인이나관료로활약한소그드인의문자와한자로도비문을남겨그들자신의관점과입장을짐작해볼수있다.또한다소편파적인한문자료의내용을비판적으로검토하고,기록의공백을보충하는것이가능하다.
이책은위구르의2대카간인카를륵카간이군사원정의승리를기념하고자신의업적을자랑하기위해세웠던기공비인《테스비문》과《타리아트비문》,그리고카를륵카간의묘비인《시네우수비문》및12대카간인소례카간시기에고대투르크문자,소그드문자,한자로새긴《구성회골가한비문》의기록을중국의『구당서』,『신당서』,『자치통감』,『책부원구』등의사료와비교해위구르유목제국의‘진상眞相’에다가간다.고대투르크어자료와한문자료를모두검토하여두기록사이의불일치나공백을유목권력의특수성,유목경제의운영방식등에비추어설득력있게해석하는것이이책의백미다.유목국가는군주의개인적능력이나권력집중도등이국가의존립에결정적인영향을미치기때문에정교수는특히‘카간권’에대한분석을중심으로위구르의역사전개를추적한다.
기존의연구에서는돌궐의국가구조에관한연구를바탕으로위구르의국가구조가그와크게다르지않다고보았다.한문자료를근거로통치체제에대한일반적인접근을하거나,위구르가중국식관직명을도입한것에주목해7세기후반당의지배하에서그영향을받았음을강조한견해가있었다.그러나이는비문자료를고려하지않고한문자료에만기초한초보적인검토에불과했다.국가구조에대한새로운접근은비문자료의복원을통해가능하다.특히2대카간인카를륵카간이남긴비문에는건국이전,부왕과함께한건국과정,이후의체제정비에관한내용이담겨있다.이중에서도카를륵카간이753년에세운기공비인《타리아트비문》에서건국의완성을천명한점에착안해이무렵전후를‘건국기’로설정하고,‘국가건설과성장과정’을정리해볼수있다.-44~45쪽
뿐만아니라정재훈교수는학계에서논쟁적으로다루는여러주제들,예를들어‘유목세계의중심지인외튀켄은어디인가’,‘한문자료에힐간가사干迦斯또는힐우가사于迦斯라고기록된인물은이후회신카간으로집권한쿠틀룩이맞는가’,‘위구르의마니교수용양상은어떠했는가’,‘위구르가붕괴이후막북초원을떠난이유와전염병(탄저병)의발생’과같은문제에대해명확한견해를밝힌다.원사료의충실한번역,중국이나서구학계에만연한편견에서벗어난해석,동물전염병에대한수의학적지식원용,영미권은물론유럽,일본,중국,러시아,몽골의연구성과까지모두검토한뒤에신중하게정리한저자의서술을통해독자는위구르유목제국의본모습에다가갈수있다.
아울러이책에는19세기말유럽탐험대의발견과조사이래로100여년간축적된발굴성과와저자의실제답사결과를종합한현장지식도담겨있다.저자는문헌을중심으로연구하는역사학자이지만,20년이상몽골초원지역을직접답사하며‘유목’이라는생산양식을낳은현지의지형과기후를살피고,정주세계와의교류속에서유목민들이남긴유적과유물을조사해왔다.이책에는저자가직접찍은사진자료뿐아니라,그것을바탕으로제작한지도와도표가빼곡하게담겨있다.따라서이책은지난100여년간축적된문헌연구와발굴성과를집대성한결과물이라고말해도손색이없다.
붕괴이후위구르의후예가남긴신화분석을통한
위구르의역사적유산과정체성확인
앞서등장했던흉노,돌궐과다르게위구르는현재‘위구르’라는이름을그대로잇는이들의땅이존재하고,그곳에사는주민들은자신들의역사인식의근거로위구르유목제국을소환한다.‘위구르’라는정체성이이렇게면면히이어질수있었던이유는무엇일까?정재훈교수는위구르의붕괴이후각지로흩어졌던세력가운데고창위구르의후예인고창왕이14세기에몽골초원에대한기억과유목세계의정통성을잇는다는자부심을담아제작한《역도호고창왕세훈비》의신화기록에주목한다.비문첫부분에기록된시조탄생신화의한문채록본과페르시아어기록(주베이니의『세계정복자의역사』,라시드앗딘의『집사』)을비교하여성스러운나무와햇빛,성스러운숫자‘5’등의신화모티브를추출하고,신화의지리적배경으로제시된강과고창위구르의지배집단인복고의원주지인톨강,그곳에남아있는무덤유적등을연결한다.이를통해위구르의후예이자5세기‘오부고차’에까지거슬러올라가는복고의후손으로서투르크유목민의정통성을계승하고자한고창왕의역사인식을드러낸다.
14세기몽골제국의지배를받던위구르의후예고창왕에게과거몽골초원을지배했던조상이남긴역사적경험은너무나중요했다.조상의원주지를새로운세력인몽골계이주민에게넘겨주고,대제국을건설한그들에게지배당하며하서에머물던그는과거의기억을되새기며다시영광스러운역사를꽃피우고자했다.몽골초원을무대로유목제국을건설했던선주민으로서의자의식을드러내고,당대의지배세력인몽골제국과는다른역사인식을보여주며새로운역사를쓰고자했다.……위구르멸망이후그유산을가지고각지로흩어진투르크유목민의역사는이후중앙아시아지역전반에,나아가세계사의흐름에막대한영향을남겼다는점에서주목을요한다.-345~3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