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D) 안용복과 원록 각서 (큰글자도서)

(POD) 안용복과 원록 각서 (큰글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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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안용복과 원록각서』는 〈죽도기사〉의 해독작업 중, 안용복과 같이 납치되었던 박어둔과, 안용복과 함께 톳토리번을 방문한 일행인 뇌헌 등이 흥미를 느껴 〈죽도기사〉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저자는 조선의 기록이 전하는 안용복으로 일본 기록을 근거로, 다각적으로 접근하여, 안용복의 실체를 밝히고 있다.
저자

오오니시토시테루

저자오오니시토시테루는1946년島根縣隱岐郡西鄕町(現隱岐의島町)生.島根縣立隱岐高等學校,大阪大學醫學部,腦神經外科專門醫,醫學博士,大阪國學院通信敎育部卒業,神職資格(權正階),大阪市立大學大學院大學都市情報部卒業.현)(醫)厚生醫學會理事長(社福)厚生博愛會理事長隱岐國原田向山大山神社宮司.「레이져醫學의臨床」,「IllustratedLaserSurgery」,「山陰沖의古代史」,「山陰沖의幕末維新動亂」,「人肉食의精神史」,「隱岐는繪島,歌島」,「日本海와竹島」,「心의誕生」,「水若祚神社」,「續日本海와竹島」,「隱州視聽合紀」,「元祿覺書」,「竹島文談」,「竹島渡海由來記拔書控」

목차

일러두기
安龍福과元祿覺書서문

제1절두조선인의연행

【원록의죽도와송도】
【사건의시작(5년2월)】
【사건후】
【조선인의연행(원록6년2월∼4월)】
【오키의취조】
【울릉도에도해한조선인일단】
【요나고(米子)에서의구술서】
【두조선인의소지품검사】
【안헨치우의목찰】
【선운과항만의발달】
【토라헤의목찰】
【조선측의해역사정】
【죽도에서오키로가는길】
【죽도에대한정보】
【막부순견사에대한답변】
【톳토리번의섬에대한인식】
【막부의섬인식】

제2절두조선인의나가사키송부

【요나고의두조선인】
【월번노중에게보고(원록6년4월∼5월)】
【섬의관리】
【조선인의톳토리이송】
【톳토리성하의두조선인】
【육로여행】
【나가사키로가는길】
【장군과의접촉】
【쓰시마번에연락】
【쓰시마의사자】
【나가사키에서의조선인양도】
【두조선인의진술】
【쓰시마의정보탐색】
【쓰시마번의영호사자】

제3절대차사의외교교섭

【쓰시마의취조】
【소우요시자네의위구】
【정사의파견】
【교섭의시작】
【정관과접위관의교섭】
【조선의복서】
【조선의정권교대】
【제2차교섭의개시】
【제2차의복서】
【쓰시마번주의교대】
【의문4개조의정시】
【의문4개조에대한회답】
【반답서에대한반론】
【외교교섭의파탄】
【에도로가는신노선】
【예비탐사선의파견】
【섬을중개로하는도항로】
【새로운전개】

제4절원록각서자료(元書資料)

【서】
【本文1】~【本文31】

제5절원록각서(元書)해설

【도해의선단】
【도해일행의승원들】
【금오승장뇌헌】
【승려의항해】
【울릉도해역의지식】
【바다활동의진전】
【울릉도의출발】
【안용복의송도지식】
【송도에서오키로】
【두개의우산도】
【안용복의소송】
【안용복의귀국후의답변】
【항해의지령】
【부산첨사의힘】

제6절원록9년의톳토리

【오키에서호우키그리고이나바】
【소송하는사신】
【연회석에서의회담】
【회담의내용】
【톳토리번의대응】
【장군의대응】
【쓰시마번의곤혹】
【쓰시마번의대응】
【톳토리번주의귀국】
【조선측의이해】
【안용복의증언】
【조선선의귀환】
【쓰시마에서온통사일행】
【장생죽도기의기재】

제7절안용복의그후

【안용복의포박】
【안용복의구출】
【안용복파견의배후】
【도해역관의정보】
【안용복의평가】

【考文】
【부록】역자논문
색인

출판사 서평

2005년2월,일본시마네(島根)현무라카미(村上)가문의고택창고에서고문서하나가발견되었다.『원록구병자년조선주착안일주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舟之覺書)』(이하원록각서)라는제목의15페이지남짓한이고문서는,1696년(숙종22년)5월일본어선의독도출어에항의하기위해두번째로일본을방문한안용복을일본지방관리가취조해막부직할령인이와미(石見)주에보고한기록이다.

31단으로나눌수있는『원록각서』는11인일행의구성,울릉도에도해한13척의선단,울릉도와자산도의지리적설명,동행한승려에대한설명,일행과대관소의교류와신뢰관계등으로구성되어있다.『원록각서』에의하면안용복은「조선팔도지도」를보이며“‘다케시마(竹島)’는울릉도,마쓰시마는자산(당시독도의조선명)으로모두강원도에속한섬”이라고설명한것으로나타나있다.이전까지발견된일본자료에서는‘자산(또는우산도于山島)’이어느섬인지분명치않은점을들어안용복을난폭한문맹자로단정하고,『숙종실록』등안용복과관련된모든기록을허위라주장해왔다.그러나『원록각서』에따르면안용복은기록을중시하며상대를배려하는인격자로기록되어있으며대관은안용복일행과나눈이야기를대담문답으로표기할정도로예우하고있다.안용복은또,“다케시마와조선은30리,다케시마와마쓰시마는50리”라고위치를설명하여울릉도와죽도를가리키는말임을분명히하였다.또이기록의끝에조선8도가적혀있고,강원도에는주석으로“이도에는다케시마와마쓰시마가속한다”라고기록되어있어당시일본이독도를조선영토로인식했음을보여준다.

독도문제의첫걸음은조선의독도인식이나조선기록의허실을점검하는일로독도문제의본질을규명하는일이다.『원록각서』는17세기의독도문제를논하는데있어서소홀히할수없는중요한내용이다.그럼에도그것을근거로하는연구는미미한실정이었다.오오니시토시테루와권정이함께작업한『안용복과원록각서』는안용복에관련된의문점을풀어주는것은물론『숙종실록』이전하는내용의사실성을입증해줄수있을것으로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