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윤여정이 있다면,
미국에는 제니퍼 루이스가 있다”
진흙 파이를 먹던 소녀가 할리우드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를 오가며 수많은 작품에서 활약했고, 나이가 들어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새로운 전성기를 만들어낸 배우 제니퍼 루이스는 미국에서 단순한 배우 그 이상의 존재다. 오바마 부부가 초청한 백악관 행사에서 기절해 놓고는 “그래, 나 기절했다. 대단하신 백악관의 유서 깊은 바닥에 풀썩 자빠져 버렸다”고 천연덕스럽게 너스레를 떠는 사람. 특유의 거침없는 입담과 당당한 태도, 무슨 일이 닥쳐도 웃음을 잃지 않는 유쾌함까지, 그야말로 퀸 중의 퀸이다. 그 캐릭터는 이 책의 첫 장부터 유감없이 드러난다. 새벽 촬영장에서 거물 제작자가 급히 찾는다는 말에 해고 가능성을 직감한 순간에도, 그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불안이 아니었다.
‘무슨 짓을 하나 보자, 애송아. 날 해고라도 하시게? 전 세계가 제니퍼 루이스를 사랑해. 내 팬들이라면 여기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걸. 할 말 있으면 해 보라고!’ (12p)
하지만 이런 퀸의 시작은 화려하지 않았다. 미주리주 킨록의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난 그는 바닥의 흙을 모아 진흙 파이를 만들어 먹을 정도로 굶주리는 날이 많았다. 어린 소녀 제니의 유일한 숨통은 영화였다. 열두 살 무렵, 백인 동네의 극장 발코니석에 홀로 앉아 스크린 속 주인공이 된 자신을 상상했고, 그 꿈 하나를 품고 뉴욕으로 향했다. 브로드웨이에서 이름을 알리고, 베트 미들러와 투어를 돌고, 메릴 스트립과 나란히 무대에 설 정도로 성장했지만, 오디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작품도 있었다. 원하는 배역이 늘 그의 몫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간 끝에 마침내, 쉰여덟의 나이에 〈블랙키시〉의 루비 존슨 역을 만나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진흙 파이를 먹던 맨발의 작은 흑인 소녀는 어느새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올린 ‘할리우드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인생은 어차피 ‘똥’이다
알았으면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야지?”
지랄맞은 인생을 찬란한 무대로 바꿔 버린 지독하게 유쾌한 생존기
제니퍼는 일찍이 깨달았다. 인생은 한쪽 손에 행복을 쥐여 주면서, 다른 손으로는 무언가를 빼앗아 간다는 것을. 행복을 마음껏 누릴 새도 없이 슬픔이 찾아오는 날들의 반복이었다. 반평생 우울과 씨름하고, 마지막 사랑이라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지나온 여름보다 남은 여름이 더 짧다는 사실과 함께 늙어가는 자신을 마주해야 했다.
무엇보다 뼈아픈 상실은 영원히 자신의 편이던 영혼의 단짝, 사촌 로니의 죽음이었다. 게이로서 누구보다 당당했던 로니는 에이즈를 앓는다는 세상의 낙인이 두려워 제니퍼에게조차 병을 털어놓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오랫동안 로니를 애도했다. 하지만 그 슬픔이 자신의 삶까지 빼앗아 가게 두지는 않았다. 세월이 흘러 극장 앞에서 작품 속 자신의 20년 전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는 게이 소년 DJ 피어스를 만났을 때, 그는 이 소년에게 집 지하실 방을 내주고 할리우드의 생리를 하나하나 전수했다. 화려한 분장과 퍼포먼스로 여성성을 재해석하는 공연 예술가, 드래그 퀸을 꿈꾸던 무명의 지망생이었던 DJ는 훗날 에미상을 수상한 대표 드래그 퀸 서바이벌 쇼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 무대에 올라 스타 ‘샹젤라’로 거듭났다. 세상의 낙인에 로니를 잃은 제니퍼가, 또 다른 로니는 세상 한복판에 당당히 세운 것이다.
반평생 우울과 싸워 온 사람이기에, 그는 무너지는 사람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본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어느 날 새벽, 동료에게서 위태로운 전화가 걸려 왔을 때, 그는 마스크를 세 장이나 겹쳐 쓰고 9개월 만에 처음으로 문턱을 넘었다. 밤새 한숨도 자지 않고 침대 곁에서 친구의 숨소리를 지켜본 다음 날 아침,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누구나 예상하는 다정한 위로와는 거리가 멀었다.
“넌 여기서 끝낼 자격 없어, 이 미친년아. 피 터지게 싸우면서도 끝까지 버틴 여자들이 어디 한둘이야? (…) 내 눈앞에서 죽는 꼴은 절대 못 봐. (…) 너는 똑똑하고 친절하고 소중한 사람이야. 아, 친절한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다신 이런 일로 전화하지 마.” (122~123p)
이것이 바로 제니퍼 루이스식 위로다. 자신이 그 어둠을 통과해 봤기에, 그는 섣부른 공감 대신 악을 쓰며 상대방을 삶 쪽으로 끌어당긴다. 그 목소리는 주변을 넘어 세상을 향해서도 거침없이 뻗어 나갔다. 트럼프가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곧바로 투표 독려 노래를 만들어 SNS에서 수백만 조회 수를 기록했다. 그들의 기대와 결말이 달랐던 트럼프 당선 날, 국민 절반이 충격에 허우적대는 동안 그는 “이 빌어먹을 개자식이 이겼다”고 말하면서 한층 더 독하게 나아갈 채비를 했다. “다들 알다시피 한 번 쓰러졌다고 해서 그 자리에 언제까지고 주저앉아 있을 위인이 아니지 않느냐”면서. 학교 체육관에서 의문사한 흑인 소년 켄드릭 존슨의 진실을 알리는 다큐멘터리에도 힘을 보탰다. 자신의 상처를 혼자 품고 끝내는 대신, 다른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데 사용한 것이다.
“슬픔이 사라져서 기쁜 게 아니다.
슬픔을 안고도 기쁨을 향해 가는 것이다”
가시밭길을 레드카펫처럼
제니퍼가 말하는 ‘기쁨’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사람의 행복이 아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무력함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두려움도 그대로 안은 채 다시 삶 쪽으로 걸어가는 사람만이 발견하는 가치다. 그래서 그는 우울과 상실, 나이 듦을 지워 버리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까지 자신의 무대 위에 올려놓는다. 웃음은 세상이 침몰할 때 자신을 지켜 주는 구명조끼가 되고, 노래와 춤은 다시 삶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된다. 때로는 울고, 욕하고, 화를 내면서도 결국 사람들과 함께 웃는다. 자신의 잔을 채운 온기로 다른 사람의 잔까지 채운다.
이 책은 완벽한 사람의 성공담이 아니다. 수없이 무너지고도 다시 일어나는 한 사람의 생생한 생존기이자, 상처를 안고도 기쁨을 선택하는 법을 보여 주는 삶의 기록이다. 인생은 언제나 레드카펫을 깔아주지 않는다. 때로는 가시밭길을 맨발로 걸어야 한다. 그래도 괜찮다. 그 길을 나답게 걸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지나온 가시밭길마저 나만의 레드카펫이 되어 있을 테니까. 조금 시끄럽고, 조금 엉망이고,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제니퍼 루이스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알게 된다. 기쁨은 감정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이 기세를 몰아 기쁨을 향해 한 발짝 나아가 보자.
아무리 모진 시련과 고통이 밀려와도 나에게 능히 견뎌낼 단단한 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의 아픈 기억을 흘려보내고 상처를 치유할 채비를 마쳤다. 나를 무너뜨린 시련이 오히려 내 안에 빛을 들여놓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295~29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