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토크 VOSTOK 매거진 43호 : 사랑과 미움의 종말기

보스토크 VOSTOK 매거진 43호 : 사랑과 미움의 종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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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사랑과 미움, 그 끝에서
마주한 장면과 이야기들
보스토크 매거진의 이번호 특집 ‘사랑과 미움의 종말기’에서는 몹시도 뜨겁고 차갑던 계절을 지나온 사랑과 미움의 형상과 흔적들을 따라간다. 연인부터 가족까지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다채로운 감정의 빛깔들을 섬세하게 기록한 사진과 글을 만날 수 있다. 고명재, 박준, 박서련, 이서수, 김화진 다섯 명의 필자는 이미 지나간 사랑 또는 미움의 궤적을 더듬는 이야기를 발화한다. 그리고 양경준, 이우선, 김시율 등 열다섯 명의 사진가는 마음에 각인된 애틋하고 시린 장면들을 우리의 눈앞으로 가져온다. 이를 통해 소중했던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사랑도 미움도 모두 저물고 난 후에 우리가 간직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 본다.

저자

보스토크프레스편집부

저자:보스토크편집부,

고명재,김화진,박서련,박준,이서수,서동진,유운성

목차

2024년12월호|VOL.43
특집|사랑과미움의종말기

001Diary_SaraLorusso
010SoCloseWhenYouLookAway_RuizheHong
024Julian&Jonathan_SarahMeiHerman
036나의살던고향은_이우선
048맨돈크라이_양경준
060어플라워이즈낫어플라워_김시율
072I’mloveyou,I’mleaving_MattEich
084MaptotheStar_MirkoViglino
098한손엔네손을,다른손엔강아지풀을_고명재
104믿음과침묵_박준
110왓엘스,왓엘스?_박서련
116어디서도하지못한말_이서수
122환멸에지지않기_김화진
130Solace_SarahMeiHerman
144Intimacy_EikiMori
154Together_AnneSophieGuillet
166LoveWeLeaveBehind_CodyBratt
178[연재:일시정지]제인폰다그리고미야자와리에_서동진
184[연재:영화의장소]폐허의프롤레타리아_유운성
198Soliloquy_WilliamZou
212Bleed_FaysalZaman

출판사 서평

함께한계절을지난후에
내게남은잔상과흔적들

그사진책에는어느페이지에도온전한사진이없다.찢기고,뜯어지고,잘려지고,구겨지고,뚫어지고,오려내고,도려내고,새까맣게또는새빨갛게칠해지고…그렇게사진속에누군가의얼굴은지워지고,또누군가의얼굴은남겨졌다.모두생전처음보는얼굴들과알수없는장소들이담긴사진들이지만,한편으론왠지익숙하게다가온다.누구나한번쯤이처럼사진속에서누군가의얼굴을오려내거나지운적이있지않을까.지갑속에소중히간직하며바라보기위해,또는이제바라보는것조차역겨워모든흔적을모조리지우기위해서.

그사진책의제목은‘Love&Hate&OtherMysteries’.이름도모르는이들의사랑과미움이듬뿍담긴사진들의애잔한흔적을바라보면제게는특별한이름이었던어떤사랑과어떤미움을떠올리게된다.마지막페이지에있는사진한장,칼로조각조각냈다가다시테이프로이어붙인이미지에는짙은눈화장을한금발의여인이보인다.쓰디쓴이별을통보하고매몰차게돌아선연인일까?아니면어린나를버리고떠나버린젊은시절의엄마일까?끝내알수는없을것이다.다만,?그징글징글한사랑도,또지긋지긋한미움도어느새계절의끝에이르렀다는사실을그사진은알려준다.스스로사진속의어떤얼굴과몸을향해칼을휘둘렀다가또스스로그얼굴과몸을이어붙여다시간직하려고했던,그마음은이미사랑의한여름도미움의한겨울도지나왔기에가능하지않을까.

사랑이든미움이든나를강렬하게흔들던감정이왜생겨났는지,또언제쯤사라졌는지바로바로가늠하는건어려운일같다.때로는자신을잃어버리게할정도의감정이라면오히려시간이한참지나서나중에야희미하게깨닫게되기도한다.물론사랑과미움이백미터달리기처럼‘요이준비땅’해서출발하는것도아니고,피니시라인이있는것도아니니그시작과끝을가늠하는일이부질없게느껴지기도한다.하지만,간혹‘아,이사랑이그때끝났구나’,‘아,이미움이어느새사라졌구나’선명하게각인되는순간이찾아오기도한다.무언가크게잃어버린것같기도하고,또무언가새로시작할수있을만큼극복한것같기도하고묘한감정에빠지게된다.끝났다고느낀그순간,그제야이전과무엇이달라졌는지,어떤변화가깃들었는지제마음의주변들을천천히살피게된다.

책속에서

가끔혼자서펑펑울었다.그렇게주저앉아서울고있으면동생이강아지풀을꺾어서왔다.스스로마음을감당하지못했던날들.가장약한아이를미워한날들.동생은강아지풀을꺾어서왔다.그걸로내볼을간지럽혔다.(…)그미움과사랑은모두어디로갔는가.그숱한시기심과아픈,기쁜나날들.어디로녹았나.언제사랑만남았나.정확한때는도무지기억나지않는다.다만내게도한가지빛나는기억이있다.이날이후로나는사랑을믿기로했고이날이후로동생을안고잠이들었다.
-고명재,<한손엔네손을,다른손엔강아지풀을>,102쪽.

음식보다더부지런히나눈것은대화였다.살아오면서가까이해온것을각자번갈아늘어놓았다.생경한게많아좋았다.미워하고싫어하는대상에대해서도이야기했는데꽤나겹치는것이많아서흥이났다.무엇보다좋았던것은숱한사이를흐르던침묵이었다.이때의침묵은막상대가맺은말의길을천천히따라가보는일이었고내가새로펼칠마음중지나치게무성한것을먼저쳐내는일이되기도했으며또한그저침묵으로서의침묵이기도했다.누군가와함께하는침묵이낯설거나불편하지않을때좋은관계가시작될수있다고믿는다.이둘은서로같은언어를사용하기때문이다.
-박준,<믿음과침묵>,108쪽.

그렇죠,이게맞죠.적어도내가준만큼은돌려받아야돼요.기왕이면더받고싶은게당연하고요.내가더사랑해?이거거짓말이에요.말이야실컷할수있어요.그말이틀렸다는증거도없고돈도안드는데뭐.그렇지만속으로는항상상대방이더나를사랑하길바라요.왜?그래야나를버리지않을테니까.결국당신을사랑한다는말의진짜의미는,당신한테서사랑받고싶다는말이에요.다른랜덤아무개의사랑이아니라내가콕집어고른당신,(공연자가관객한명을손가락질한다.공격적이고집요한몸짓이다.)당신의수제사랑을받고싶다.당신이나를사랑해줘야한다.당신이아니면안된다.(관객들조용하다.)피곤하죠?(네.)에너지조지게들죠?(네.)
-박서련,<왓엘스,왓엘스?>,112쪽.

사랑이지나간자리엔새로운사랑이온다고들말한다.먼저웃으면언젠가웃을일이생기는것처럼,먼저사랑하겠다는자세를갖추면언젠가새로운사랑이찾아올지도모른다.지금의나는그사랑의깊이가앞선사랑에비해결코깊진않으리라고예언하듯말하지만그저자만일뿐이라는걸안다.사랑에빠질것을미리예측할수있다면재앙에가까운사랑을피할수있을까.그때나는그것이재앙에가까운사랑이라고단정지었지만,이제와서돌아보니그토록푸릇한사랑도없는것같다.내가다시그런사랑을할수있을까?신기한일이다.그늘이내마음속에그대로남아있음에도어둠속을더듬어가장반짝이는빛을찾아낼수있다는게.그것이사랑이지나갔다는명백한증거가될수있을까.
-이서수,<어디서도하지못한말>,120쪽.

쓰는사람이혼자라는말은아마도이런뜻에더가까울것이다.‘글쓰기이전에네가혼자가아니라고여겼더라도글쓰기이후에너는시시각각혼자라는걸실감하게될것이다.’누구나글쓰기로뛰어들면좀외로워진다.외로움의이유는모두같지않지만,모두스스로가무척외롭다고느낀다.각자의외로움의이유를설명할수없어애먼것을주고받는다.위로하거나응원하거나반목하거나경멸한다.그리하여나는글을쓰면외로워진다는,말로만듣던말을마음에새기는상태에이르게되었다.그러니까글쓰기는미처몰랐지만내안에있기는있던,외로움의부분을선명하게보이도록해주는조영제같다.물론그상태가항상싫은것은아니다.처음혼자소설을쓸때,나는마음껏외로워져서좋았다.꽁꽁뭉쳤던외로움을술술풀어낼수있어서.
-김화진,<환멸에지지않기>,124쪽.

“스펙터클의사회”란현실이모두이미지가되어버린사회를가리킨다.사진과영화를비롯한시각매체들이현실을오직이미지로서만접하게하고현실의사회적관계와사물들을소외된시각적대상으로서소비하도록만든세계가스펙터클의사회이다.그러나그러한소외된세계의극한은바로오늘날의이미지세계일것이다.제2의자아란이름으로SNS에자기의이미지를진열할때,우리는인격적실존마저이미지로대신한다.자신이사진이미지로대신될수있다면,그리고사진을통해자신의삶을이야기할수있다면,우리는기꺼이사진에게영혼을팔수있게된다.
-서동진,<제인폰다그리고미야자와리에>,182쪽.

주지하다시피,공장과철로는영화의기원과맞닿아있는소재다.뤼미에르형제가만든초기영화들가운데〈공장을떠나는노동자들〉(1895)은대중적으로상영된최초의영화로알려져있고〈열차의도착〉(1896)은진정현대의신화라고해도좋을위치에있는작품이다.왕빙의영화도입부는톄시구의공장들사이로지나가는열차의맨앞에서찍은쇼트들로이루어져있다.뤼미에르의영화와는달리,열차에서내리는사람들도,공장에서나오는사람들도보이지않는다.인민의형상을대신해우리앞에나타나는것은길게이어진철로,그리고그양옆에늘어선휑한건물들과벽들의거무튀튀한형상뿐이다.(…)이처럼그는영화의기원을불러들이면서그것을지우고,제국주의와사회주의와자본주의의꿈이어지러이교착된중국의구체적장소를관통하면서인민을지우고대지를지우고국가를지운다.하지만거기남는것은공백이아니라폐허다.공백과는달리폐허에는여전히흔적과잔향이있다.
-유운성,<폐허의프롤레타리아>,1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