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이라는여름
우리가체험해야할새로운계절의온도
여름을닮은작가,김애란의첫산문집<잊기좋은이름>이뜨거운여름의문턱에서출간되었다.김애란은2002년등단이후지금까지복잡다단한현대사회속에서각양각색으로바뀌어가는가족의변화와그속에깃든‘나’의목소리를발굴해왔다.가족에의사랑이나청춘의성장및애환과같은보편적인주제를능수능란하게다루는것은물론소수자문제라든가존재의고독처럼무게감있는주제도서슴없이꺼내놓았다.그의소설에서는인간에대한따뜻하고웅숭깊은눈길이구성진입말의문장들로배어나고통찰력있는직시가무거운이야기들로풀어져나오기도한다.현실에대한살펴보는날카로운시선과새로운가족의형태를상상하는자아의마음을따뜻하게드러내는소설들을통해,김애란은한국문학의가장열렬한온도가되었다.
<달려라,아비>에서독자들에게명랑한상상력을보여줬던주인공,물결치는파란바다를연상케하는<비행운>의푸른겉표지는모두때로싱그럽고때로뜨거운생동감으로넘쳐난다.<바깥은여름>에서는아예제목부터여름을드러내놓고걸어두었다.<잊기좋은이름>에실린작가김애란의글들역시뜨겁고싱그러운기운으로넘쳐난다.이번산문집에서작가는사람들이쉽게볼수있었던소설가로서의얼굴너머소녀로서의얼굴,학생으로서의얼굴,딸로서의얼굴,아내로서의얼굴,시민으로서의얼굴,인간으로서의얼굴등다양한면모들을기록했다.김애란의소설세계를관통해온독자들은잘알것이다.그녀가그동안펼쳐온이야기들마다사람들을감싸안는따스함과그속에감추어진뚜렷한문제의식과당찬목소리를.그뜨거움으로한국문학은지금,여기서한창달아오를수있었다.이제,김애란이그동안꺼내본적없는이야기들을이곳에풀어놓는다.우리가한차례도겪어본적없는계절이,그온도가여기에스며들고있다.
사람에대한,사람에의한,사람의이야기……
김애란을이루는무수한사람들의사연들
김애란은소설을통해내면의모순을비추어보며슬퍼하는깊이있는시선을바탕으로사람에대한성찰을완성해내곤한다.어찌할수없는사람의필연과우연사이,그서글픈심정들을들여다보는눈길을가지고이야기의옷감을한땀한땀기워입는솜씨를보여주는것이다.
그랬던김애란이,이번에는자신의삶을고백한다.나지막한목소리도있는가하면,서러운음색도들리고,구성진입담도있다.유년시절또는대학시절의추억담을풀어놓기도하고,일상속에서겪은부모님과의이야기나가족들과의이야기를솔직담백하게꺼내놓기도한다.이제만17년경력의소설가답게시와소설을비롯한문학에대한사유를천착하거나우리말에서눈여겨볼만한어휘에대한단상을적기도한다.그런가하면주변의시인이나소설가들을깊이들여다본글들도있다.
나를둘러싼사람들에관한이야기이자,나라는사람과사랑하는사람들에의한이야기인동시에,잊은사람들의이야기,그속에서김애란은특유의섬세하고따스한목소리로읊조린다.그러니까이책은,김애란이라는사람에관한책이면서김애란의사람들에관한책이다.
수많은이름중유독잊을수밖에없었던단하나의이름
‘나’를이야기하려먼나라,먼타인,먼기억들을에둘러간다
김애란이꺼내는사람들은독특한개성을가지고있다.아니,김애란에의해개성을부여받는다.그러나김애란은자신의은총때문이라고말하지않는다.사람들은누구나저마다원래타고난개성이있다고,그사연을끄집어내는역할을해줄뿐이라고나직이말한다.오죽하면전혀알지못하는사람들까지도특별히바라볼줄아는법을보여줄까싶을정도다.
고대황진구씨는그해무사히졸업했을까?그리고두사람은그뒤로도계속만났을까?헤어졌을까?생각이여기까지미치자조금감상적인충동이일었다.그리고그충동은이내이들의안부를확인하고싶다는철없는만용으로변했다.수강신청서하단에두사람의집전화번호가적혀있었기때문이다.나는좀고민했다.자칫무례하고이상한사람으로보일수있어서였다.지금생각해보면그건무례하고이상한짓이맞았다.그런데그땐혼자드라마틱한상상에취해서인지치기탓인지그들중누군가에게‘내가우연히10년전당신들수강신청서를발견했는데원한다면우편으로돌려드리겠다’라는얘기를전하고싶었다.과거로돌아간다면말리고싶은심정이지만,아무튼나는먼저황진구에게전화를걸어보기로했다.신호음이가자가슴이뛰었다.
―여름의풍속,p69~70
그러나역시김애란의통찰력은가장가까운이들(가족)에서빛난다.가슴을뜨겁게하는이름인어머니그리고아버지와나누는수십수백마디의대화들이등장한다.그순간순간은자그맣고사소하지만,김애란의깨달음은친숙한사람들을거치고난것이라서더더욱달고농밀하다.아무렇지도않게일상의깨달음을나누는가족들과의소통을김애란은그냥지나치지않는다.
광화문교보빌딩에서시상식을마친날,어머니는살짝취기어린얼굴로기분좋게말씀하셨다.
애란아,내가서울가서뭘느낀줄아냐?
나는어머니가대처에서무엇을느끼셨는지참으로궁금하였다.
우리친목회에선배운사람일수록목소리를크게하고발언을많이하는데거기선모두가목소리삼분지일만내고서도대단한말들을하더라.확실히지식인들이라다른모양이다.벼는익을수록고개를숙인다는데맞는말인가보다.그래서앞으로
나도목소리를작게내야겠다고결심했다.
―현수막휘날리며,p82~83
김애란은자신이태어난근원에서부터가족사적인내력까지훑어보는진득한눈길을우리에게돌린다.어머니와아버지의로맨스는물론이고,형제자매간의우애와혼자독립하며끈끈한가족의정을깨우치던시간까지,빠짐없이그녀의기록에고스란히담긴다.
오래전한처녀가한총각과헤어진뒤혼자들어간길을,그날다섯식구가함께걸어나왔다.언제나비슷한문제로싸우고비슷한문제로연민하며비슷한문제로헤어지지못한채살아가는부부와많이울고많이먹고자란세아이가.비도오지않고천둥도치지않는맑은가을밤을그렇게걸어나왔다.달이어지간히기울어진밤이었는지아니었는지는기억나지않는다.추석이었으니가장커다란달이뜬밤이었다는것만은분명했다.흰꽃처럼흐드러졌을달빛들.길,그리고이야기의번식.들어가는길과나오는길이같다는이상함.
―안아볼무렵,p120~121
이기록은여기서한발더나아가,자신과전혀무관한사람들의아픔과슬픔을함께누릴때의가치를이야기하곤한다.세월호참사를다루는그녀의목소리에는진심어린공감과잔잔한위로가깔려있고,쌍용자동차해고노동자들을떠올리는그녀의기억에는참혹한현실에대한용기있는저항이담겨있다.강원도인제의만해문학관에머물며동료문인들과어우러져지내다가합창단의노래를현장에서전해듣던일화를읊어주는가하면,대학에서가르칠때어느학생으로부터받았던연필한자루를통해타인과의‘이해’를좀더곱씹어본다.결국,나를떠나와멀리가더라도,끝내는나의가장가까운사람들을톺아보아야깨달을수있는세상살이의간단한이치가있는것이다.
연필쥔손에힘을주면책에흐릿한홈이파인다.그홈에는내가어느문장에줄그은순간느낀시간과감정이고인다.그래서가끔그홈이물고랑밭고랑할때‘고랑’처럼느껴진다.나와나자신을,현재와과거를,우리와타자를잇는먹고랑처럼.천천히그리고꾸준히그선을따라가다보면우리이야기도언젠가두보의시구처럼누군가의삶과만나게될까?그럴수있다면좋겠다.그스침이혹꽃잎한장의무게밖에갖지못한다해도.이야기의이어달리기,이야기의배턴터치가계속되길빈다.대부분연필이길고둥근이유도실은그때문이지않을까상상하면서.
―점,선,면,겹,p254
그러니까김애란은,어디먼데가지말고우리삶에서부터살펴보자고,우리가잊어버린것들은어디엉뚱한데있는게아니라고말하는것이다.당연하다는듯이잊어버리고만김애란작가자신의이름을되찾고,우리들의이름을일일이불러주고서야김애란은낮고단단한목소리로힘주어말한다.모두기억되어야할이름으로문학을쓰고삶을살아간다고,잊기좋은이름은없다고.
▶책속으로
고3여름방학때나는사범대학에가라는어머니의뜻을거스르고몰래예술학교시험을봤다.그건내가부모에게한최초의거짓말은아니었을지라도결정적거짓말이었다.나를키운팔할의기대를배반한작은이할,나는그게내인생을바꿨다고생각한다.동시에내가그런결정을내릴때까지내몸과마음을길러준팔할,갈수록뼈가닳고눈과귀가어두워져가는그팔할에대해서도자주생각한다.
―나를키운팔할은,p14~15
나는뮤직비디오속인물들처럼근사한비애도,처참한아픔도한번빠짐없이느껴보고싶었다.그런데마침내게‘사귀자’라는사람이
있었다.이름도모르고얼굴도처음보는어느상급생오빠였다.나는운동장멀리서그오빠의얼굴을한번확인한뒤소식을전하러온‘방자’에게무턱대고‘알았다’고했다.그러곤무척내성적인데다수줍음이많았으리라짐작되는그오빠와소극적인교제를시작했다……보름만에끝냈다.‘그만하자’얘기한건내쪽이었는데(뭘시작했다고),그즈음교내체육대회에서그오빠가줄다리기를하는동안거친숨을몰아쉬는또래들틈에서너무매가리없이휘청대고끌려가는걸보고실망했기때문이었다.
―언제나꿈꿔온순간이지금여기,p17~18
비록고향을떠나긴했지만나는내몫의그작은어둠과고요가마음에들었다.나는내몸에꼭맞는육면六面의어둠속에서,내가슴팍을향해하늘에서닻처럼내려온형광등줄의흔들거림을바라보며가만히누워있는걸좋아했다.딸각이는스위치소리한번에세계는일순조용해졌고,나는반듯이누워두눈을깜빡였다.그리고그럴때면언제나지나간빛을한껏빨아통통해진야광별이천장에서총총빛났다.‘중국의붉은별’도루카치의별도아닌,납작엎드려가까스로빛나던형광스티커들.
(……중략……)
모처럼찾아온고요속에서아늑한어둠을방해하는발광물질을보며나는심란해했다.
(……중략……)
오랜시간이지난뒤나는거기별이있단사실을묵묵히받아들여야했다.약하고조금은천박하지만그것들이항상빛가까이에있으려한다는사실과함께.그곳을떠난지몇해가지났고그방은이미헐려사라졌지만이따금나는내성정의경박하고아름다운어떤부분,내가껴안는상스러움의많은부분은그별들의영향에서나온게아닐까생각한다
―야간비행,p28~30
30여년전,그러니까1970년대말충청남도서산시대산읍독곶면독곶리에한송방에서,보다정확하게말하자면송방한쪽에딸린온돌에서,어머니와아버지는소개팅을했다.
“뭐?”
‘온돌’과‘소개팅’이라는단어를나란히접한내가말꼬리를올렸다.주선자둘,당사자둘,청춘남녀네명이좁은온돌방에옹기종기앉아어색하게인사나눴을상상을하니내가다쑥스러워진까닭이었다.그건뭐랄까.마치각나라작가들이일본전통난로인‘코타츠’주위에모여앉아담요를덮고귤을까먹으며진지하게문학을논하는풍경과비슷할것같았다.
―카드놀이,p102
누군가의문장을읽는다는건그문장안에살다오는거라생각한적이있다.문장안에시선이머물때그‘머묾’은‘잠시산다’라는말과같을테니까.살아있는사람이사는동안읽는글이니그렇고,글에담긴시간을함께‘살아낸’거니그럴거다.
―여름의속셈,p141
오래전나는‘좋아하는소설속인물’로신애를택한이유를다음과같이밝혔다.
‘그녀를어떤인물이라표현할수있을까?신애는‘쪼그려앉은’여자다.……(중략)……그러니누군가신애를왜좋아하느냐고묻는다면이렇게답하리라.그녀가지금,거기,쪼그려앉아있기때문이라고.
요며칠방에혼자있을때면,신애의웅크린뒷모습이계속아른댔다.
사실난신애가좀두려웠다.
하지만이제그녀곁에다가가나란히쪼그려앉아보려한다.
그러곤무언가에집중하고있는그녀의옆얼굴을보며,작은목소리로물어볼생각이다.
당신,대체,거기서
무얼그리열심히보는거냐고.
세상에‘잊지좋은’이름은없다.
-잊기좋은이름,p299~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