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진 나의 집

불 꺼진 나의 집

$15.00
Description
“좋은 단편은 그 안에 담긴 인생 단면을 통해
일종의 ‘내포적 전체성’에 이르는 각별한 경험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그 점에서 한동일의 여섯 편의 단편은 무의미한 관성의 집적으로 보이는 우리 삶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게끔 해주는 시선의 만화경萬華鏡으로 훤칠하게 다가온다.
그만큼 그의 소설은 어느 제도적 형식보다도 한 시대를 징후적으로 알 수 있게 하는
살아 있는 보고寶庫로 거듭나고 있다.
이번 소설집은 그러한 도정의 첨예한 증좌가 되어주면서
그로 하여금 우리 시대의 미학적 총아로 나아가게끔 해줄 것이다.”
_문학평론가 유성호


1. 인간 모독
학생이었던 시절, 나는 폭력의 피해자였다. 단 한 번도 그 상처를 달랠 길도 치유할 방법도 찾지 못했던 나는, 선생이 된 이후로 또다시 얻어맞았다. 선생이라는 이유로 구타했고, 선생이라는 이유로 얻어맞았다. 학교는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 조금의 그림자도 남겨주지 않고 나를 운동장 한가운데 덩그러니 던져두었다. 나는 우두커니 뙤약볕 아래 서 있었다. 내가 학생이었을 때도, 선생일 때도 달라진 건 없었다.

2. 죽음을 맞이한 방
M은 자신의 죽음이 타살로 보일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에게는 죽음의 값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는 죽음의 방식을 결정하지 못했다. 그저 빈집에 고립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그를 찾아오는 사려 깊은 이방인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무관심했다. 어느 날 미지의 존재가 그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재촉했다. 그럴수록 죽음에 대한 반감, 살고자 하는 욕구가 커져갔다. 불필요한 배려가 그에게 닿기 직전까지 그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3. 소송
은행장이 남자를 찾았다. 그는 은행의 파산을 막아야 했다. 행장의 지시에 따라 그는 출장을 떠났다. 하지만 소송에 잠식된 남자는 많은 것을 놓치고 말았다. 종일 그를 추적하고 있던 까만 세단, 스스로 남기고 다니던 증거. 그 흔적들로 인해 그는 소송에서 불리한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그는 그것이 모두 꿈이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차 타워에 숨겨 놓은 하얀색 렌터카를 확인해야만 했다.

4. 냄새
새벽에 온 전화, 박훈이 죽었다. 그는 내게 빚을 남기고 죽었다. 그가 살던 집에서 단 한번도 맡아볼 수 없었던 역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냄새가 내 몸 구석구석 깊게 스며들었다. 나는 그의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5. 불 꺼진 집
아내는 마지막까지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떠나기 전 아내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도대체 당신은 어떤 사람이야. 그 질문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내는 다른 사람을 사랑했다. 나는 그런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둘의 관계를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내가 가진 것은 오직 둘의 훔쳐낸 대화뿐이었다.

6. 팽팽하게 감긴 태엽
광막한 호수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제목도, 작가의 이름도 보이지 않는 책을 호수에 던졌다. 알을 끌고 가는 남자, 커다란 호박을 베고 자는 남자, 달리는 꿈을 꾸는 하얀 말, 빨간 사막과 까만 산을 거쳐 도착한 모든 달이 떠있는 대지. 마침내 만난 그 남자는 창조자이자 죄악의 원인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누군가의 심연이다.
저자

한동일

저자:한동일
충남공주출생.대학에서심리학과국문학을공부했다.2018년부터소설을쓰기시작했다.현재나태주풀꽃문학관에서근무중이다.

목차


작가의말
1.인간모독
2.죽음을맞이한방
3.소송
4.냄새
5.불꺼진나의집
6.팽팽하게감긴태엽175
해설_문학평론가유성호

출판사 서평

인간존재의축도(縮圖)를담은가열한서사들
한동일소설집「불꺼진나의집」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학교국문과교수)

1.보편적진실을중시하는소설적증언

한동일의첫소설집「불꺼진나의집」(열림원,2024)에실린단편들은인물들이처한난경(難境)과그로인한내면적비극성을한결같이담고있다.그의소설에서는다양한인물들이부조리한인생의국면들을여실하게보여준다.우리시대에대한해석과판단을자연스럽게수반하면서개인과공동체,실존과역사,말과침묵에대한작가의사유와전망을우회적으로들려준다.그과정에서그의소설은낱낱의사실(fact)보다는보편적진실(truth)을중시하면서우리에게한시대의지도(地圖)로다가오게된다.아닌게아니라이번소설집에담긴한편한편의이야기는삶의불가피한비극성을총체적으로은유하면서,존재론적영도(零度)에처한인물들을통해매우중요한소설적증언을수행하고있다.그인물들은가혹하고신산한곳에서힘겹게살아가면서유령처럼,낭인처럼,피해자처럼,주변인처럼,육신과영혼밑바닥까지내려가는경험을들려주는시대의증인으로등장한다.개성적이고감각적인한동일의문장과호흡은이러한세상모습을전하는데맞춤한유일성과적합성을가지고있다.이제그세계안으로한걸음씩들어가보도록하자.

2.구체성을담은우리시대의묵시록

삶은우연한순간의연속으로이루어진다.물론예상가능한절차에대해서는얼마든지대처할수있겠지만,그러한해석과판단을무색하게하는예외적사건들은우리로하여금합리성의덧없음과한계를절감하게끔해주기도한다.이처럼삶에서이성과탈(脫)이성의힘은늘어긋나고비껴가면서어둑한양면성을형성한다.그래서우리는합리성으로현실을논하기도하지만비합리적욕망에대해서도관심의끈을놓지않는다.어디그뿐인가?아폴론적질서와디오니소스적혼돈의상호얽힘도삶을신비롭게만드는중요한측면이다.한동일의소설은삶에대한합리적이고점진적인개선가능성보다는비극적침잠과정을통해한시대의정체성을사유해가는모습을선명하게보여준다.그럼으로써작가는‘한동일스타일’의리얼리즘을통해한시대의묵시록을우리에게처연하고강렬하게들려주고있는것이다.

먼저「인간모독」을읽어보자.이단편은초등학교시절교사들로부터가볍지않은폭력을경험한여주인공이이제교사가되어폭력의피해자가되어가는과정을그리고있다.물론그두가지폭력사이에는학생의교사로의변화도있지만,너무도달라진학교풍경도개입해들어온다.초등학교시절‘나’는공부잘하고병약한아이였는데,교사들의이해하기어려운폭력성은학년을달리하면서반복된다.그런데‘나’는초등학교교사가되어서도또다른의미의피해자가된다.시간이많이흘렀고위치도달라졌는데말이다.

학생이었던시절의나는폭력의피해자였다.단한번도그상처를달랠길도치유할방법도찾지못했던나는,선생이된이후로또다시얻어맞았다.선생이라는이유로구타했고,선생이라는이유로얻어맞았다.

한학생이다른아이를때리는광경을목격한후가해아이에게소리를친순간을계기로‘나’는학부모로부터거센항의를받는다.폭력을휘두른아이에대한징계는없었고‘나’는그일에대해사과하게된다.이런일도있었다.공개수업때한아이의짓궂음때문에‘나’는하혈을하고정신을잃었다.아이엄마가보내온문자메시지에칼날같은답신을보낸후결국아이엄마에게고소를당한다.‘나’는사과와함께그쪽이제시한민사소송청구액보다더큰돈을건네면서사건은종결된다.아이들의등대가되고싶었고,선생보다는스승이되기를간절하게원했던,자신과결별하는마지막장면이다.

나는천천히자리에서일어나책상으로향했다.책상위의작은액자를들었다.환하게웃고있는대학졸업식에서의내가보였다.가슴이두근거렸고두어깨와양손이떨리고있음을느꼈다.나는한참동안나를바라보다책상위에던지듯떨어뜨렸다.한손으로액자를쥔채뺨위에흐르는눈물을닦았다.내등을토닥였던누군가의손길처럼눈물이액자를두드리기도했다.나는손가락으로액자위의눈물을닦아내려했지만,유리는손을댈수록더러워졌다.소매를잡아당겨유리를닦았다.그사이감정은차츰잦아들었다.고개를돌려창에비친나를바라봤다.빨간두눈,코끝과볼그리고굳게깨문아랫입술과턱은여전히떨리고있었다.슬픔을머금은긴숨을내쉬었다.그러고는쥐고있던액자를힘껏안은뒤사치스러운옷이담겨있던서랍속으로밀어넣었다.나는나와작별했다.

책상위에놓인졸업사진은아마도‘나’를‘나’이게하고교사이게했던존재론적기원(origin)을품고있었을것이다.‘나’는액자의사진을서랍속으로밀어넣으면서‘나’와그렇게작별한다.이서사에는초등학교담임들,교장,학부모,무임승차승객까지폭력성과이기심을몸안에깊이내장한군상들이출현한다.모두‘나’와적대적대립을이루는‘선악구도’의한축이다.표층적으로보면이소설은이들을고발하는속성을띤다.‘교편(敎鞭)’이라는회초리의은유를지난시절로돌려버리는작금의교권침해에관한소설로도읽힌다.하지만이작품은전체적으로‘인간’자체에대한모독으로흘러가는우리시대에대한증언을지향하고있다.거듭되는악몽의구조로세상을은유하고있는과정이한동일소설의이러한속성을잘보여준다.그점에서「인간모독」은폭력이편재(遍在)하는학교상황에대한사회적고발이자,한시대의가장우울한구체적묵시록으로다가오고있다.

표제작「불꺼진나의집」은어떠한가.이소설은아내가다른남자를사랑하여떠나가고빈집에홀로남은‘나’의기억과상념으로구성된작품이다.‘나’는언젠가카페창가에앉아있는그녀에게다가가“남들도그렇듯”청혼하고결혼하여아이를낳게된다.어렵게가진아이가다운증후군으로밝혀지자‘나’는인공유산을원했지만아내는반대하여아이를출산한다.두돌지나아이가죽자아내는아이를기억에서지우려고온라인상점에아이용품을판매하기로했고,그곳에서그남자를만났고,그가아내를위로하면서둘은가까워진다.임신과출산중간에승진을한‘나’는꽃과케이크를사서자축의의미로아내에게가져온다.아이를위해사온것으로믿었던아내는나중에그사실을알고는“당신은한번도우리…내아이를원한적이없었어.”하고방으로들어가서문을닫는다.아내는‘나’에게마지막남은“자신의물건”을가져가겠다고하였고,언제나그랬듯‘나’는불이어둡게꺼진집으로혼자돌아간다.그리고한번도열어보지않았던아이의방으로들어가본다.

닫혀있던문을열었다.스툴하나가방바닥에나뒹굴고있었다.그리고아내는목을맨채바람에흔들렸다.빈방으로주황색가로등불빛이깊이배어들다,내게다가왔다.모두가빠져나간집은깨끗해보였다.나는문을닫았다.거실로돌아가들고있던서류가방을소파위에올려놓았다.나는종일내목을조이고있던넥타이를느슨하게풀고주방으로향했다.냉장고문을열어마시다만물병을꺼냈다.물방울맺힌병을열어숨이막히도록들이켰다.뱃속에차가운자갈이가득찼다.마시지못한물이바닥으로시끄럽게떨어졌다.얼마남지않은물은싱크대에버렸다.나는거실로돌아와소파에앉아켜지않은TV를봤다.까만화면위로내실루엣이가득찼다.그리고내그림자안에아이의죽음이중첩됐다.양팔의털이곤두섰다.나는빈화면을보며웃고있었다.

떠나간아내와아이의환영(幻影)이보인다.가로등불빛만가득한빈방과서류가방이나넥타이가있는거실은죽음과삶,평온함과분주함의대비를통해이소설의주인공이얼마나본원적의미의사랑으로부터먼존재인가를암시한다.“내그림자안에아이의죽음이중첩”되는순간이그러한쓸쓸한메시지를전한다.이소설은언뜻불륜과사랑을둘러싼가정소설로읽힐것같지만,‘나’와아내의내면으로흔들리는인간욕망의투시도(透視圖)로더분명하게다가온다고할수있다.소설전체에서굵은글자로처리된두표현“남들도그렇듯”과“자신의물건”은‘모두’의것과‘나’만의것을구별해주는기표로보이지만,어차피그것들은아이의죽음이‘나’의그림자에중첩되듯우리삶에서혼재한다는사실을암시하기도한다.그점에서이작품은또하나의폭력적구도로짜인현대인의내면을들여다보게해주고있다.현대사회에서인간은끊임없이부품화하고원자화하여,한사회의능동적참여자보다는항상혼자일수밖에없는고독한조난자가되어간다.한동일의소설은이렇게분주하면서도뒤안길로밀려나버린주변적존재자들의삶을통해고독한조난자의서사를만들어간다.때로허무주의적이고비극적인내용을품으면서,그럼에도인간의존엄성을반어적으로강조하는지적모색을계속하고있는것이다.

그런가하면「냄새」또한우리시대의축소판으로읽어도좋을소설이다.주인공‘나’와함께살던친구박훈이죽자그의장례를둘러싸고가난의서사가펼쳐진다.‘나’는박훈의제의로함께살다가박훈이떠나고서로만나지못했다.그러다가그가자살로추정되는죽음을맞았다는연락을받는다.박훈의죽음을확인하기위해들른건물에서맡게된시큼하고역한‘냄새’,건물전체에서진동하는‘악취’는그대로이소설의서사를감각적으로환기하고있다.경찰관으로부터박훈의유품을건네받은‘나’는박훈이남긴노트에서다음과같은글을발견한다.

시인이되고싶었다.바다위에쏟아진6시햇살을,내미문을통해황금의빛으로조형하고,내가난을그안에실려보내고싶었다.하지만꿈은배를타고달아났고,나에겐나태함만이얼굴위에두눈과귀에쏟아져내렸다.모래안으로발목은깊게박힌채떠나가는그하얀배를손만뻗어그리워했다.꿈을담으라는철학가는사라졌다.나태함의죄악을이마에새긴비천한사내만이덩그러니서있었다.나의반항은내꿈이아닌낙인없는자들에게향했지만,그들은내발끝에못박고영혼이되살아나는것마저거부했다.그들에게나의탄식은들리지않았다.그들은먼발치에서서황금빛태양은바라보지도않고나를보며웃고있었다.

시인과철학가가모두사라져버린세상,미문(美文)의욕망과탄식이교차하는가난의세월,그리움과비천함을숨가쁘게육화할수밖에없는한사내의자조적고백이담긴노트였다.어쨌든가족을떠나새롭게재기하려던박훈의꿈은속절없이무너졌다.어렵게연락이닿은그의아내는경제사정을들어‘나’에게남편의장례를부탁한다.비용문제로고민하던‘나’는박훈이세들어살던건물주인으로부터박훈의보증금을받는다.경제적으로손실만끼치던박훈이죽어서비로소‘나’에게마지막경제적지원을한셈이다.

나는장례식장입구에혼자서있었다.뜨거운바람이몰려왔다.눈을감았다.남자가건네준돈봉투를세게움켜쥐자쉽게찌그러졌다.그순간내얼굴은일그러졌고빨갛게달아올랐다.흐르던땀은쏟아지기시작했다.세차게고함을내질렀다.건물이흔들렸다.언제부턴가내안에서시큼한냄새가났다.

‘나’가시종일관맡았던역한냄새는이제건물과방안에만있지않다.‘나’의내면으로도들어온것이다.이작품은우리시대저변을이루는이들의가난한생활소설이기도하지만,폭력의한변형태인가난과소외가외적조건이아니라내적상수(常數)로존재함을암시해준다.출구가전혀보이지않는우리시대의한초상이저렇게침착하고구체적으로담겨있는것이다.

이세편의소설은,프랑스시인랭보(A.Rimbaud)가노래한“상처없는영혼이어디있으랴”라는유명한전언을소설적으로증언하면서,우리삶이근원적으로고통속에있는과정임을알려준다.그리고그고통을만들어낸폭력들과힘겹게대결하면서여전히불모의삶을이어가는이들을담아낸다.작가는이호환불가능한고통들에자신의예술적가능성을부여하고있다.우울하지만매우구체적인인간욕망의바닥이한동일로하여금그어떤작가보다도더구체적이고비타협적으로이러한세계를구축하게끔해준것이다.지난시절우리소설이대개역사적,경험적진실의세계를공동체적선(善)이라는방향과함께써나감으로써계몽적열정을강하게보여주었다면,한동일의소설미학은현저하게개별적체험을구체화하는방향을취하면서독자로하여금한시대에참여하게끔하는과정을요구하고있다.그의소설은이러한양편향의독해를모두적용할수있는경험,감각,감수성을모두담고있다는점에서단연주목할만하다.그렇게한동일의소설미학은경험적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