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나오키상 역대 최고령 여성 수상 작가
아사쿠라 가스미 소설집
비관도 체념도 아닌 가장 낮고 질긴 긍정
행복한지는 모르겠지만 태어났으니 살아간다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까지도 어떻게든 해왔잖아.”
나오키상 역대 최고령 여성 수상 작가 아사쿠라 가스미의 소설집 『관도 꽃도 필요 없다』가 김석희의 번역으로 열림원에서 출간되었다. 제175회 나오키상 수상작 『겐과이』에 앞서 발표한 이 책에서 작가는 다섯 사람의 하루하루를 따라가며 그들이 저마다 삶을 붙드는 방식을 세밀히 기록한다.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은 우리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마주칠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누군가를 평범하다고 여기는 것은 “단순히 ‘있다’고 생각했을 뿐, 특별한 흥미를 느끼지는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거리에서 수도 없이 지나쳤을 이름 모를 사람들. 아사쿠라 가스미는 그들을 한 사람씩 자세히 들여다본다. 일용직 파견 사무소에서 일당을 현찰로 받는 예순한 살 여성, 오십 년 지기 동성 친구의 재혼 선언에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쉰여덟 살 남성, 낡은 맨션에서 함께 살기 시작하는 젊은 남녀 커플, 넉넉지 않은 형편 속에서 스스로 고교 진학을 접는 열다섯 살 소녀, 아들을 키우며 전남편을 ‘조 아저씨’라 부르기로 한 서른여섯 살 여성. 인물들은 이야기라는 매개를 통해 구체적인 얼굴로 다가온다.
다섯 편의 이야기에는 모두 팬데믹의 시간이 배어 있다. 일터가 문을 닫고, 만남이 미뤄지고, 계획이 한 주 단위로 줄어들던 시기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재난의 기록이라기보다 재난이 지나간 뒤에도 끝나지 않는 일상의 기록에 가깝다. 이야기는 극복이나 회복으로 나아가지 않고, 인물들은 더 나아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삶을 그저 계속 산다. 그렇다면 나아지지 않는 삶에도 의미가 있을까. 아사쿠라 가스미는 그 물음에 답을 내놓는 대신, 오늘을 건너온 사람의 얼굴을 보여준다.
평범함의 가장자리에서 단단하게
서로의 곁에 머물기로 하는 이야기
“저 사람들은 여기 살고 있구나,
그리고 나도 여기 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도토루에서」의 무네시게는 커피숍 테이블에 마주 앉아 오십 년 지기 겐의 재혼 선언을 듣는다. 죽은 아내에게 끝까지 떳떳한 남편으로 남고 싶어 하는 겐의 자기 서사를, 무네시게는 속으로 ‘겐짱 드라마’라 부르며 냉소한다. 그러면서도 개구쟁이처럼 웃는 겐의 얼굴 앞에서는 한 방 먹은 기분이 되고, 정말이지 녀석은 어쩔 수가 없다며 고개를 젓고 만다. 어린 날 풀씨름을 한 뒤 귓가에 비밀을 속삭이던 겐의 목소리를 무네시게는 오십 년째 혼자 간직해왔다. 우정인지 사랑인지, 얕잡아 보는 마음인지 아끼는 마음인지 끝내 이름 붙이지 못한 그 마음을 그는 고백하지도, 버리지도 않는다. 말해지지 않은 채 커피 두 잔 사이에 놓인 마음이 한 사람의 생을 이룬다.
「이미 충분해, 정말로」의 젊은 연인은 한때 번듯했으나 삼십 년이 지나 낡아버린 15층 맨션으로 흘러든다. “이렇게 서로 만질 수 있는 것. 그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 앞에서 두 사람은 손에 닿는 것부터 헤아린다. 굳이 ‘정말로’를 덧붙여야 성립하는 표제의 다짐에는 체념과 긍정이 한데 엉겨 있고, 그 모습은 팬데믹을 통과한 젊은 세대의 초상과 겹친다.
「모두 꿈속」의 리쓰카는 남편의 외도로 이혼하고 팔 년간 아들을 키워왔다. 지난 몇 년이 꿈같았다는 누군가의 말에 리쓰카는 속으로 답한다. 나는 줄곧 꿈속에 있다고. 그래도 꿈속에서 아이는 자란다. 어린이공원 철봉에서 아들이 연속 거꾸로 오르기 신기록을 세우자 동네 아이들이 환호하고, 리쓰카는 외친다. “대단해, 축하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시간 속에서도 사람은 곁의 누군가가 자라는 것을 지켜보며 오늘에 발을 딛는다.
세 편의 인물은 저마다 어긋난 자리에 서 있다. 무네시게의 마음은 이름을 얻지 못했고, 젊은 연인은 미래는 정체되었으며, 리쓰카의 시간은 현실감을 잃었다. 작가는 이 어긋남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서 지켜지는 관계가 있고, ‘충분하다’고 거듭 말해야 겨우 충분해지는 삶이 있다. 꿈속 같은 시간 안에서도 아이가 자라는 것만큼은 가장 확실한 현실로 남는다. 삶을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사람을 붙드는 것은 자신과 타인들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감각 그 자체일지 모른다. 이 소설집이 말하는 버팀이란 그런 것이다.
손쉬운 위로와 낙관 대신
오늘을 살아내기 위한 주문
‘관도 꽃도 필요 없다’
“어떻게든 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 똑같이 해서는 안 된다.”
「레이와의 마른 참억새」의 ‘나’는 첫 번째 금요일에는 집세를, 두 번째 금요일에는 공과금과 밥값을 헤아리며 안심한다. 잠들지 못하는 밤에는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까지도 어떻게든 해왔잖아”라고 되뇐다. 그런 그에게 사무소의 괴짜로 통하는 ‘그 사람’이 누구의 신세도 지지 않고 ‘자신의 타이밍’에 삶을 매듭지을 수 있다는 낡은 단층집 이야기를 꺼낸다. 그 집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너머의 질문, 어떻게 죽고 싶은가와 마주한다. 1974년 일본 가요 〈쇼와의 마른 참억새〉를 빗댄 표제는, 지난 시대의 쓸쓸함이 지금에 이르러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바람은 마지막까지 제 삶을 책임지려는 존엄일까, 아무에게도 기대지 못하게 된 고립일까. 소설은 어느 쪽으로도 쉽게 기울지 않는다.
「비상용 휴대 주머니」의 열다섯 살 후미는 다리 밑 풀밭에서 혼자 공중제비를 돈다. 한 바퀴 돌면 경치도 함께 돌고 세상이 조금 신선해진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아버지는 “아니 뭐, 어떻게든 되겠지”를 입버릇처럼 되뇐다. 그러나 후미는 그 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 나에게 고등학교가 필요할까, 나는 정말 고등학교에 가고 싶은 걸까. 겉으로는 진학을 바라는 척하며 속으로 그렇게 묻던 후미는 누구의 지시도 아닌 자신의 판단으로 진로를 정한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같은 말이 누군가에게는 잠들기 위한 주문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첫걸음을 떼는 출발점이 된다.
관도 꽃도 필요 없다. 언뜻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의 말처럼 들리는 표제는 다섯 편의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조금 다르게 읽힌다. 그것은 남이 정해준 격식이나 위로 없이도 제 방식대로 살고, 제 방식대로 끝맺겠다는 말이다. 체념의 문장처럼 보이던 말이 실은 부정을 거친 끝에야 닿을 수 있는 자기 긍정이라는 것. 여기에 이 책의 아이러니가 있다.
그러한 긍정은 무엇보다도 인물들이 스스로에게 건네는 작은 말들 속에 있다. 아사쿠라 가스미는 일반적이라 불리는 삶의 궤도에서 얼마간 비껴난 채 하루하루 버텨내는 인물들을 설명하는 대신 그 말들을 옮겨 적는다. 현찰에서 제비꽃의 향기를 감지하고 낡은 집을 해자에 둘러싸인 성으로 상상하듯, 이들의 언어는 척박한 현실을 잠시 다른 질서로 전환하는 미약한 주문이 된다. 작가는 그 위태로운 자기 위안마저 존재를 지속하게 하는 은밀한 유희로 받아들인다. 결국 타인을 자세히 바라보는 일이란 익명성에 가려진 존재의 단독성을 복원하고, 그 응시를 다시 자기 자신에게 되돌리는 일이다.
책 속에서
보호소의 고양이에게 입양자가 생기면, 그 고양이가 입양 가서 살게 될 집을 ‘쭈욱 우리 집’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사람은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끝내고 이렇게 말했다.
“어느 게 쭈욱 우리 집이 될까?”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 사람의 검은 눈동자는 빛나면 문득 녹색으로 보인다. 그 색깔이 언제나 나를 조금 겁먹게 했다. 그 사람의 눈 속에는 끝없는 들판이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레이와의 마른 참억새」, 10쪽)
어떻게든 내 힘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불을 턱까지 끌어 올리고 눈을 감으면, 미래의 추상적인 이미지가 눈꺼풀 뒤를 사악 스치고 지나갔다. 매우 낙관적이 되는 밤도 있고, 몹시 비관적이 되는 밤도 있었다. 어쨌든 잠은 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마음 편히 잠들기 위해 어느 경우에나 유효한 주문을 생각해냈다. 그 주문은 이렇다.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까지도 어떻게든 해왔잖아.(「레이와의 마른 참억새」, 24쪽)
누구였던가, ‘생생生生’의 반대라면 ‘사사死死’일 거라고 농담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바로 그런 상태였다. 나는 사사한 상태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었다. 일을 하게 된 지금도 생생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할 수밖에 없으니까 하고 있을 뿐이다.(「레이와의 마른 참억새」, 34쪽)
얌전히 그날을 기다릴까, 아니면 후회에 몸부림쳐볼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차라리 실컷 미련을 갖고 아쉽게 생각해줄까 하는 기분이 되기도 한다. 원망해줄까, 아니면 너를 생각하면서 혼자 훌쩍훌쩍 울어줄까.(「도토루에서」, 83쪽)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해둔 비밀을 털어놓는 겐은 절대 아무도 들어선 안 된다며 무네시게에게 바싹 다가왔다. 무네시게의 위팔에 겐의 가슴이 닿고,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이 전해졌다. 무네시게의 귀에 겐의 축축한 입김이 들어왔다.(「도토루에서」, 87~88쪽)
가슴이 이상하게 두근거리고, 심장박동 소리가 폭음으로 들렸다. 숨이 얕아지고 가빠졌다. 정말이야? 위험해, 패닉인가? 뭐? 패닉이라고? 패닉, 패닉, 패닉이라고 헛소리처럼 가슴속에서 한바탕 되풀이하다가, 아니, 그건 안 돼. 절대로 당황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며 자신에게 말을 걸고 호흡을 가다듬는 데 전념했다.(「이미 충분해, 정말로」, 115쪽)
꽃에 물을 주러 나온 아줌마를 보거나 라디오 소리가 낮게 들리거나 하면, 여기서 사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이웃이니까 얼굴을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길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하는데도 그렇게 생각했다. 저 사람들은 여기 살고 있구나, 그리고 나도 여기 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비상용 휴대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