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모든 열정 -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2

사라진 모든 열정 -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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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비타색빌웨스트

VitaSackville-West|1892년영국켄트주의귀족가문에서태어났다.드넓은저택에서가정교사에게교육을받으며외로운10대시절을보내는동안장편소설,희곡등여러작품을써냈다.수많은여성과연애를했던그는학창시절만나사랑에빠진바이얼릿트레퓨시스와파리로도망가기도했는데,남장을하고트레퓨시스의남편인척돌아다니는등성역할이고정된시대에순응하지않았다.1913년외교관인해럴드니컬슨과결혼했으나서로의성정체성을존중하며개방된결혼생활을이어나갔다.1925년버지니아울프를만나몇년간열렬히사랑했고,열정이다소사그라든뒤에도만남을지속하며서로의창작활동에긍정적인영향을주고받았다.서사시인《땅》(1926),《시선집》(1933)으로호손든상을두차례나수상하며평단과대중에모두에게인정받았다.울프의소설《올랜도》(1928)의모델이되어주었으며,울프가운영하는호가스출판사에서《올랜도》에대한화답으로쓴《에드워디언》(1930)과관습에따른결혼생활을끝내고나서야지난날의열망을되돌아보는노년여성을주인공으로한《사라진모든열정》(1931)을연달아출간하며흥행에성공해재정적으로까지큰도움을주었다.비타는또한원예가로도유명한데,남편과함께가꾼‘시싱허스트’는지금까지도영국에서가장아름다운정원중하나로손꼽힌다.다방면으로재능을펼쳤던비타는1962년켄트주의시싱허스트에서암으로생을마감했다.

목차

제1부_011
제2부_119
제3부_157

부록
버지니아울프의편지_256

해설|노년,그한조각제정신을위해_267

출판사 서평

세상이주고싶어하는가장좋은것말고
네안에서뿜어져나오는것을쟁취하기를

슬레인백작부인은정계의거물이었던남편‘슬레인백작’과의사별로70년간의결혼생활에마침표를찍는다.아버지의장례와어머니의거처문제를논의하려한자리에모인자식들은“어머니는똑똑한여자가아니”니“얼마남지않은여생을자식들이알아서결정해주면고마워할것”이라고믿어의심치않고자신들과번갈아살것을제안하지만,슬레인백작부인은자식중누구와도함께살지않을것이라고선언한다.한적한동네로옮겨가세간의시선에서벗어나살겠다는것.슬레인백작부인은계획대로30년전부터점찍어둔집을빌리고,“태어난날보다죽을날에훨씬더가까운사람들”이아니라면주변에두고싶지않다며증손주들의새집출입을금한다.자기만큼이나나이많은하녀인‘저누’와단둘이오롯한자기만의공간에머물며“살면서처음으로,아니결혼후처음으로다른할일이없”게되자,묻어두었던어린날의꿈과욕망이비로소떠오르는데…….

이제어떤모험도닥치지않으리라는사실을상기할때마다뻔한옹졸함과까탈스러운삶에서벗어났다.그런데그것은삶이란막바지에도뜻밖의일을무궁무진하게마련한다는사실을잊은오산이었다.(166~167쪽)

슬레인백작부인은또래인세남성,집주인‘벅트라우트’와건축업자‘고셰런’,남편이인도총독으로재직할당시만난적있는미술품전문가‘피츠조지’와자주교류하며한가로운나날을보낸다.말년에만난사이답게공감대를나누며꾸밈없는관계를이어나가지만,그마저도피츠조지의갑작스러운죽음으로인해깨지고만다.피츠조지가자신의유산전부를젊은시절흠모했던슬레인백작부인앞으로남긴것.자식들은어머니와피츠조지의관계를의심하며온갖추측을내놓고,신문들은앞다퉈슬레인백작부인의사진과기사를싣는다.오랜세월동안정치명망가의부인으로서지겹도록시달린세간의이목을이제는백만장자의유산상속인으로서끌게된슬레인백작부인은이렇게소리친다.“난뭔가를바란적이없어요,(……)바란것이라고는비켜서있는것뿐이었죠.그런데세상은도대체그걸허락하지않네요!여든여덟의나이에도!”다만평화롭기만을바랐던슬레인백작부인이자신의의지와는상관없이“세상에서얻을수있는좋은것들을다”갖게됨으로써사람들의입에오르내리는장면은‘자기가진정원하는것’대신‘남성이주고싶어하는것’을받는여성의갑갑함을나타내는동시에,엇비슷한모양으로단색의풍경만이남을듯한노년의인생에도예측불가한삶의속성은여전히선명하게작용함을보여준다.

자신과삶사이의균열은남자와여자의균열이아니라일하는자와꿈꾸는자의균열이었다.(140쪽)

삶은여기서멈추지않고뜻밖의일을하나더준비해두었다.바로그를닮은증손녀와의만남이다.처음에는마음을어지럽힌다는이유로증손주들의출입마저금했던슬레인백작부인은“걸어갈삶의경로”가뚜렷이정해지지않은증손주들의소식을궁금해하며,증손주들의기사를스크랩하고아껴읽는데까지나아간다.때마침결혼전의그와같은이름을쓰는증손녀‘데버라’가찾아와공작과의파혼소식을알리고,할머니가어마어마한유산전부를기부한덕에원치않는결혼을훨씬쉽게깰수있었다며고마움을전한다.자신에게는결혼이나종교보다음악가라는꿈이더소중하다는데버라에게슬레인백작부인은나지막이말한다.“아무렴,네가옳단다.”그말은,세차게날갯짓하는나비처럼70년전의과거로날아가화가를꿈꾸던10대시절의슬레인백작부인을살짝어루만졌다가,할머니가손녀에게건네는든든한사랑이되었다가,꿈꾸는여성들을향해외치는비타색빌웨스트의목소리로몸을바꿔오늘날의독자들에게닿는다.당신이옳다고.고유하기에소중한당신을잃지말라고.

묻지않았기에알지못했던
조용한헌신뒤의이야기

슬레인백작부인이결혼한이래로쭉곁을지켜온늙은프랑스인하녀저누는소설의또다른주인공이다.저누는슬레인백작의죽음이후에도평소와다름없이요란스레집안을누비고,백작부인을조심스럽게대하기는커녕방문을벌컥열고들어와“주인님셔츠를세탁소에보낼필요가있을까요?”하고묻는다.죽은사람보다는당장눈앞에놓인집안일이중요한것인지,평소처럼행동하는것이나름의애도혹은위로의방식인지는알수없으나저누의그런태도는자식들의그것과확연히비교된다.자식들은어머니가“삶이결딴”난뒤에도“놀랍도록잘버티고”있다고말하는데,‘결딴나다’라는표현은슬레인백작이아흔네살까지살았다는점을차치하고서라도다소과하게느껴진다.“독립적인의지가없는분”이라는표현까지놓고보면,자식들은슬레인백작부인을하나의주체가아닌아버지에게딸린존재로인식하는듯하다.

그러나슬레인백작부인을지탱하는,자기자신이외의인물이있다면그것은슬레인백작보다는저누쪽일것이다.슬레인백작부인이‘자기만의집’에머물며조용히삶을돌아볼수있었던뒷배경에는조금요란스러워도능수능란하게살림을해내는저누가있다.“고마움과헌신이라는끈”으로묶인저누.하지만슬레인백작부인은저누와70년가까이같이살면서도알지못했다.저누가가난한부모의열두번째자식으로태어나삶의의미를물을겨를없이숨가쁘게달려온존재라는사실을.자신에게홀로간직해온지난날의꿈과열망이있듯이저누에게도그만의경험이,아픔이,삶이있다는사실을뒤늦게알게된슬레인백작부인은자신이한번도그런얘기를물은적없었음을깨닫고는놀란다.늘자신을보살펴준존재,당연하게곁을지켜온존재에대한새로운발견은『사라진모든열정』이건네는또하나의소중한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