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잉어 -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7

크리스마스 잉어 -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7

$14.50
Description
비밀스러운 기쁨, 굶주림과 기다림, 극심한 치통……
먹고사는 슬픔을 희망으로 소화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독일어권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활동하며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름을 알린 비키 바움의 소설집. 국내 초역. “왜 죽이지?”라는 말이 가슴에 콕 박히는 〈크리스마스 잉어〉부터 먹고사는 행위 자체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길〉, 〈굶주림〉, 〈백화점의 야페〉까지. 각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그들이 처한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만 프라이팬에 눌어붙은 기름때처럼 잘 닦이지 않는 고통을 견디며 살아간다. 바움은 삶의 압박감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지리멸렬해진 마음이라도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담담하게 때로는 처절하게 그린다. 그들을 꼭꼭 씹으며 따라가다보면 독자는 이런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지?’

저자

비키바움

서울대학교문리대학독문학과를졸업하고서강대학교에서박사학위를받았다.지금은충남대학교인문대학독문학과교수로있으며,저서로는'괴테의소설','헤르만헤세의소설','독일여성작가연구'등이있고,역서로는'소설횔덜린','벽'등이있다.

목차

크리스마스잉어_007
길_029
굶주림_075
백화점의야페_135

해설|비키바움,20세기초반의신여성_171

출판사 서평

삶의고통이배어있는식탁에앉아
억지로라도희망을삼키며살아가는사람들

바움은사후에출간된회고록《모두전혀다르다》에서농담하듯자신을‘이류의일류작가’라고부른다.세계적인베스트셀러작가였지만,여성이라는점과삶에밀접하게닿은작품을썼다는이유로순수문학의반대편에서대중작가로폄훼되었다.하지만오늘날에는당대의문화를조명할수있는해석틀과여성문학에대한관점이여럿생겼으며,1920∼1940년대를살았던사람들,특히바이마르공화국시절을살아가던사람들이받은압박감을가장잘묘사한작가가운데한명으로평가받는다.또한,바움은상업주의와매스컴의영향을강하게받는현대작가의등장을예고하기도했다.당시순수문학의얼굴이었던토마스만이바움의〈길〉을상찬했다는점도당대바움이받았던불합리한평가를다시금생각하게하며,〈길〉에서날카롭게보여준여성의현실이나권리는이디스워튼의《석류의씨》의단편들을연상케한다.
작품속에서등장인물들은특별히대단한것을원하지않았다.〈크리스마스잉어〉의가족들은크리스마스파티에먹을잉어요리를,〈굶주림〉의주인공은사랑받기를,〈길〉의‘친칸부인’은새로운옷장을,〈백화점의야페〉의소년은넥타이를원했을뿐이다.언뜻소박해보이는등장인물들의소망은그러나마지막으로남은,그마저도찢어진희망이다.그들은자신들의현실과소망사이를위태롭게저울질한다.

행복했던순간으로돌아가려는식탁
“말리고모가도착해서대형앞치마를두르고주방의권한을이양받아야비로소빈에서크리스마스준비업무가”시작되었다.하지만전쟁이벌어졌고,모든것이변했다.크리스마스이브에떠들썩한분위기속에서잉어를고르곤했던시장은이제황량해졌고,잉어는구경할수도없다.〈크리스마스잉어〉의‘말리고모’는적어도겉으로는변하지않은것처럼보인다.어렵게구한잉어를욕조에서삼주간키우기로하는등마치아무일도없다는듯파티준비에열중한다.그사이가족들은잉어에게‘아달베르트’라는이름을지어주며각별한사이가되고,잉어요리는단순한음식이아니며전쟁전,평화롭던삶의상징이되는데…….
잉어를잡아야하는크리스마스이브에누구도선뜻나서지못하는사람들은,그러니까작고연약한잉어한마리도죽이지못하는사람들은하루아침에수많은사람이죽는시대에살고있다.말리고모가기어코울음을터뜨리며“왜죽이지?”라고소리치는대상은작은욕조에서언제죽을지모른채힘겹게살아가는잉어처럼보이지만,엄혹한시대를살아가는자신들이기도하다.

사랑하고사랑받아야만행복했던시절로돌아갈수있다고믿는〈굶주림〉의‘가브릴로프스키’는전쟁으로잃은약혼자에게받은스컹크,새롭게세든집주인의아들을거쳐젊은의사에게사랑을쏟는다.하지만젊은의사는가브릴로프스키의신경증증세를건드렸을때드러나는징후를관찰해보려는가해자에불과하다.어느덧일주일에하루이틀은굶어야할정도로궁핍해진가브릴로프스키는피아노교습을하는등자신의삶을이어나가려고안간힘을쓰지만상황은나아지지않는다.점점위축되고망상도심해져젊은의사가무심한태도로스컹크를죽일때도분노하지않으며,그저옅은미소만지어보인다.
발작을일으킨가브릴로프스키가집주인아들‘빌리’에게달려드는장면은허기를채울수없는삶에대한공격처럼느껴진다.피아노교습에서해고되고집에돌아와“빌리는내아이지?”라고묻지만,빌리는“소심하게,방어하듯,부끄러워”하며말없이먹어댄다.이때가브릴로프스키는삶과사랑에서다시한번거절당한다.“이상하게호소하는듯한”표정을지어보지만,이제자신의처지를알아주는사람은없다.터질것같은심한압박감속에서“또렷하고끔찍하게마지막으로본것은음식이가득한빌리의둥근뺨과행복하게씹고삼키는아이의관자놀이근육”이었다.삶에서극히드물게포만감을느꼈던가브릴로프스키는“내부에서무언가부서져서밖으로”토하듯쏟아낸다.형태가있던음식이식도와위를거쳐형태없는액체가되듯.끈질기게삶의형태를만들려고했던가브릴로프스키가게워내는건형태없이쏟아지는자신이었다.

행복한순간이생길거라는식탁
〈길〉에나오는친칸부인의일상은자신에게맞춰져있지않다.부인은“세번으로나눠식사”를하는남편과아이들의생활에맞춰움직인다.다림질을하고,장을보고,깨끗하지않은복도도손수왁스로닦는다.아주가끔“조그마한책장으로가서책한권을꺼낼때가있지만”몇쪽읽기전에잠들어버리고,피아노앞에앉아건반하나를누르고여운이사라질때까지듣는것이자신을위한유일한시간이다.부인은“사는게힘들다”.
〈길〉에는구체적인음식명이나오지않고‘생선’,‘빵’등으로적혀있다.〈크리스마스잉어〉에서‘구겔후프’,‘자허토르테’등구체적인음식명이많이나오고레시피도꽤자세히적혀있었던걸떠올린다면그대비는좀더명확해진다.〈길〉에서음식은쳇바퀴처럼굴러가는일상에서꼭필요한에너지의역할만할뿐정서적인풍요로움은결여되어있다.심지어친칸부인은이런필수적인일상에서도소외된것처럼보인다.부인에게남은건가사노동자로서책임감이전부다.
점점고립감에빠지는친칸부인이골몰하기시작하는건옷장이다.제대로된옷장을구하기만하면모든게나아질거라믿는다.친칸부인은새로운옷장을통해더나은삶을꿈꾼다.한참을찾아다닌끝에적당한가격과원하는수납력을갖춘옷장이경매에나온다는것을알게되지만,심하게비를맞은탓인지감기에걸려앓아눕고마는데…….

“못이룬꿈,어머니,못이룬꿈뿐이에요.”그녀가다시한번중얼거렸다.(53쪽)

친칸부인이원하는삶과실제삶에는크나큰간격이있다.부인은“삶이라는협소하고미비한감옥에”갇혔다.가득차서언제든터져버릴것같은옷장과삶에갇힌자신을동일시한다.“전부실패”라고중얼거리며감옥같은삶에서,가득찬옷장에서벗어나려한다.

〈백화점의야페〉의주인공‘야페’는“너희는그렇다!인생이너희들한테는달콤하고기름지고마치버터처럼매끄럽다”라고절규한다.그는우연히백화점에서본넥타이에온마음을빼앗기지만아무리돈을모아도결코살수없음을깨닫고는몰래숨어들어훔쳐야겠다고생각한다.하지만넥타이만훔쳐야겠다고생각했던것과달리어두운밤백화점에서본건자신이꿈조차꿔본적없는수많은상품과식료품들의범람이었고,야페는폭주하기시작하는데…….
야페는대량생산을통해소비를부추기는자본주의사회에서살아가지만“과거에그를유리창으로차단했던”이라는문장을통해이런시스템에서소외되어있다는것을알수있다.몰래들어간백화점에서“실크양말이라니,사람들이정말미쳤구나!”와같이물건들을마구잡이로뒤지며내뱉는탄성은,마네킹을따라취해보는포즈와대사는,야페자신도이곳의일원이되었으면좋겠다는바람으로읽힌다.하지만야페가갈망하는삶과실제삶의크나큰간격에서느끼는건어지럼증이다.
치통은이런“극히이상했던”상태에서깨어나게한다.통증이점점심해져치아의기능을수행하지못하는야페는먹는행위에서멀어진다.아마야페는적절한때에치과치료를받지못했을가능성이크며앞으로도마찬가지일것이다.치통은결코떨쳐낼수없는,시간이지날수록몸집을키워자신을몰아가는삶의고통의다른이름이다.그래서비극적인사건을은폐하기위해지른불이야페를무섭게따라올때,“눈썹,속눈썹이그을었고피부는탄자국과물집천지”였을때,치통이“완전히사라”지는건의미심장하다.

크리스마스가다가오면항상떠오를,
황홀하게끓어넘치다어느새비감이찾아드는소설

《크리스마스잉어》에는비유와은유가거의나오지않는다.“못이룬꿈뿐이에요”,“나는당신한테모든걸바쳤어”등등장인물들은자신의처지를직설적으로내뱉는다.이렇게직선주로를달려온문장들은읽는이의마음에깊게새겨진다.한은형작가는이책의추천사에서“어떤예감이들었다.황홀하게끓어넘치다어느새비감이찾아드는이소설을읽은이상나는크리스마스시즌이되면‘크리스마스잉어’를떠올릴수밖에없을거라고”말했는데이는정확한감상처럼느껴진다.너무많은사람과연결되어있어오히려함께살아가는사람들의면면을살피기어려운요즘《크리스마스잉어》는이시대를함께살아가는사람들의면면을자세히살펴볼것을,잠깐멈춰서서먹고사는일의기쁨과슬픔에대해다시금생각해볼것을요청한다.

책속에서

크리스마스가다가올수록식구들은잉어에게마음을뺏겼다.잉어는유일한것,비밀스러운기쁨,숨겨놓은보물,커다란자부심이었다.(〈크리스마스잉어〉,23쪽)

“하느님,맙소사,난못먹겠어.잉어는날알아보고,날좋아했어.오늘아침까지만해도.내가욕조에다냉수를틀면얼마나첨벙대면서좋아했는지모두들한번봤어야해.”(〈크리스마스잉어〉,27쪽)

부인은이불속에서이리저리뒤척였다.몸이좋지않았다.삶의여러가지일이주위로몰려와그녀를몰아쳤다.남편,아이들,살림,음식,장보기,바느질,옷수선,빨래,뒷바라지,가계부정리,그녀는아직도이런일상적인일의중심이었다.(〈길〉,47쪽)

그녀는웬여자가길을건너오는것을보았다.어떤초라한여자가,망가지고쓸모없게된여자가낡은모자를쓰고장바구니를들고걱정스러운얼굴과불가피한일에대한걱정으로가득한여자가걸어온다.아냐,내가아니야.난그런사람이되기싫어.나는죽을거야.죽는거,그게뭐지?모든것에서떠나는것이야.난떠날거야.달라질거야.나는달라질거야.나는…….그녀는생각에잠겼다.(〈길〉,53∼54쪽)

가게안은덥고파리들이라즈베리케이크위에서윙윙댄다.초콜릿냄새가난다.위가과민한여자는오그라드는것처럼아프다.(〈굶주림〉,90쪽)

처음에는들뜨고,한껏피어오르다가파멸하는거야,라고그녀는생각한다.영양실조의초라한팔다리가그것을느낀다…….(〈굶주림〉,101쪽)

실크양말이라니,사람들이정말미쳤구나!하지만그는한다발을탁자위로던졌다.(〈백화점의야페〉,151쪽)

너무짠싸구려소시지의안좋은맛이갑자기역겨웠다.멋진남자는그런쓰레기같은건먹지않을텐데,멋진남자들은대체뭘먹지?(〈백화점의야페〉,1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