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시대에서 시민의 시대로,
전후 독일인은 무엇을 망각하고 어떻게 회복했는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똘똘 뭉쳐 있었던 독일인들은 전쟁이 끝나자 완벽하게 분열되었다. 옛 질서는 사라졌지만, 새 질서는 아직 모호한 이때, ‘인간이 다른 모두에게 늑대’라는 뜻으로 ‘늑대의 시간’이란 이름이 붙었다. 전쟁 이후, 절반 이상의 독일인은 과거 속하던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폭격에 사망하거나 피난, 망명, 강제 이주를 당한 사람들에 1000만 명의 강제 징용자까지 합하면 그 규모는 총 4000만 명에 달했다. 자신이 살던 자리에서 추방당하고 끌려가고, 풀려나며 새로운 자리를 찾아가던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시민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을까? 완전히 새로운 구성원으로, 무질서의 상태에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했던 시기. 저자는 이 시기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가장 중대한 변화는 일상에서 시작되었다. 먹을 것을 조달하는 일에서, 약탈에서, 교환에서, 구매에서 일어났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전쟁이 끝나자 성적 모험의 물결이 봇물처럼 터져나왔고,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 갈망하던 남자들의 귀향 뒤에 극심한 실망도 뒤따랐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고 싶어 했으며, 이혼 수치는 비약적으로 치솟았다.
가족은 해체되고, 삶의 질서는 산산조각이 났으며, 인간 관계는 상실되어 갔지만, 사람들은 새롭게 다시 모여 어울렸고, 젊고 용기 있는 사람들은 잿더미의 혼란 위에서 매일마다 자신의 행복을 찾는 모험을 즐겼다. 전후 독일인의 의식을 볼 때 홀로코스트가 미친 영향은 놀라울 정도로 미미했다. 자신들의 ‘수상쩍은 행복’을 위해서 홀로코스트를 회피했고, 자신들을 희생자로 그렸다. 그러면서도 전후 시대는 지금까지 여겨지던 것보다 더 논쟁적이었고, 삶은 더 개방적이었으며, 지식인은 더 비판적이었다. 의견의 스펙트럼은 넓었고 예술은 더 혁신적이었다. 이런 의식적 억압과 왜곡 속에서 반파시스트적이고 신뢰를 일깨우는 오늘의 독일이 탄생했던 것이다.
이 책은 전쟁 직후 10년의 기간 동안 독일이 거쳐야 했던 재건 사업과 그 속에서 분열된 독일인의 멘털리티를 다각도로 살핌으로써, 잊고 있던 1945년과 1955년 사이의 독일을 새롭게 조명한다. 공식문서나 출간된 책뿐 아니라 일기, 수기, 문학작품, 신문, 잡지, 영상자료, 심지어 유행가 가사 등 방대한 자료와 세심한 해석을 통해 독일이 어떻게 그 시기를 넘어 오늘의 독일을 만들었는지 새로운 시선을 제공한다. 특히 토마스 만, 한나 아렌트 같은 유명인뿐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일반인들의 개인적 기록을 통해 그 시대의 분위기까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포착했다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우리가 아는 자기반성은 없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침묵의 카르텔, 희생양 논리를 주장한 독일인들
1947년 1월, 독일의 잡지 《관점(Der Standpunkt)》에는 이렇게 묻는 기사가 실렸다. “독일인들은 왜 세상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기가 없을까?” 기사는 독일이 “유럽의 문제아이자, 세계의 속죄양”이라며, “국제사회에도 일반 가정과 마찬가지로, 사랑받는 아이가 있으면 미움받는 아이도 있다”고 질문에 자답한다. ‘과거 청산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수출국’이라고 자부하는 독일에서, 그것도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된 홀로코스트 직후에 어떻게 이런 문답을 던질 수 있었던 걸까? 세계대전을 ‘가정 불화’ 수준으로 축소시키고, 가해 민족을 ‘문제아’ 정도로 치부하는 사람의 내면은 대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 걸까?
1945년 5월 8일 독일이 공식적으로 패망한 이른바 ‘제로 시간’ 직후, 독일인들이 맞닥뜨린 건 약 5억 세제곱미터의 폐허 더미였다. 전쟁으로 인한 6000만 명의 사망자, 붉은 군대의 진입과 함께 시작된 강간의 물결, 서방 연합군의 독일 점령, 1946년과 1947년 ‘기아의 겨울’이라 불리는 지옥을 경험한 독일인은 마치 홀로코스트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들을 ‘희생자’로 여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들은 그저 사람을 마비시키는 ‘독’과 같은 국가사회주의에, 사람을 순종적인 도구로 길들이는 ‘마약’과 같은 나치즘에, 히틀러라는 ‘악’에 희생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어떤 민족의 영혼도 독일 민족의 영혼만큼 운명에 의해 그렇게 자주, 그렇게 깊이 갈아엎어져 새로운 정신의 씨앗이 싹틀 토양을 마련하지는 못할 것이다.”_본문 430쪽
당시 언론과 책, 논문에는 독일인이 겪은 고통을 다른 민족의 어떤 고통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최상급으로 표현한 글이 넘쳐난다. 그 시기를 어둡게 그릴수록 자신들의 잘못과 책임과 죄책감이 더 가벼워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앞선《관점》의 기사는 이러한 처절한 생존 욕구 앞에서 독일인들이 택한 희생자 논리, 홀로코스트에 대한 의식적 억압, 집단적 침묵의 심리적 발로였다.
전후 독일인조차 옛 시절을 회고할 때, 스스로를 그동안 겪은 일을 일단 말없이 견뎌내야 했던 ‘위대한 침묵자’로 그리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 침묵은 홀로코스트에 한해서만 선택적으로 이루어졌다. 오히려 죽음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대다수 사람들은 전례 없이 뜨거운 ‘삶의 기쁨’을 만끽했다. 항복 선언 후 보름 만에 폐허 속에서 영화관이 다시 문을 열었고, 두 달 만에 밤새 투어를 돌 수 있을 만큼 수많은 댄스홀이 영업을 재개했다. 전후 전체 인구의 약 5%만이 살아남은 쾰른에서는 1946년 으스스한 잔해 사이로 이미 작은 ‘카니발 행렬’이 지나갔고, 같은 해 베를린에서는 ‘환상 무도회’가 열렸다. 1947년이 되자 사람들은 벌써 휴양지로 휴가를 떠났다. 질트섬의 1만여 개 휴양 숙소 가운데 6000개는 피난민들로 꽉 차 있었지만, 나머지 숙소는 휴양객들이 차지했다.
저자는 패망 직후 수십 년간 수백만 명의 학살에 대한 폭넓은 사회적 논쟁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과거 청산은 1963년부터 1968년까지 아우슈비츠 재판이 진행되면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이 또한 철저한 자기반성의 산물이라기보다는 “나치 세대에 불복종 운동을 펼칩시다”라는 1967년 길거리에 붙은 전단처럼 68세대의 분노에서 촉발된 부모 세대에 대한 역사적 승리였다. 즉 우리가 모범 사례로 드는 독일의 과거사 청산은 1945년 이후 독일인들이 스스로에게 가했던 억압의 후유증이었던 것이다.
“도덕적 붕괴와 집단적 인식의 왜곡”
내부자의 눈으로 전후 독일인의 멘털리티를 부검하다
당연하게도 전쟁은 독일의 수많은 사회적 개념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도덕 관념’이다. 오늘날 우리가 독일인의 특징으로 떠올리곤 하는 ‘정직성’은 전후 독일인에겐 해당되지 않는 얘기였다. 패망 전까지 굶주림이란 걸 몰랐던 독일인들은 종전 이후 보급망이 파괴되고, 연합군이 식량 배급을 급격히 줄이자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살아남기 위해서 독일인들은 새로이 생존 기술을 익혀야 했는데, 약탈, 암거래, 좀도둑질이 바로 그것이었다.
패전 후 연합군이 점령하기 직전 ‘권력의 공백기’에 독일인들은 ‘약탈’에 몰두했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 속에서 사람들은 정부 건물, 비축품 창고, 화물열차, 농장, 이웃의 집까지 미친 듯이 물건들을 털었다. 이는 18세의 평범한 독일 여성의 일기에 친지, 이웃들과 함께 떠난 약탈 기행이 기록되어 있을 만큼 일반적인 일이었다. 연합군은 곧 행정기관의 정상화를 통해 사회 시스템은 안정시켰지만, 도덕적 붕괴는 멈출 줄을 몰랐다. 특히 종전 직후 3년간은 1인당 최하 800칼로리의 식량만 배급했기 때문에 독일인들은 늘 굶주림에 시달렸다. 사람들은 대체로 부도덕한 자구책을 다양하게 마련했고, 시골로의 ‘도둑질 투어’도 그중 하나였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원하는 것을 살 수 없는 도시민들은 시골 농부들의 수확물을 훔치기 위해 기차를 탔다. 식량 배급표의 틈새에도 금세 구멍이 생겼다. 암시장에는 연합군의 PX에서 횡령하거나 밀수한 물건들이 넘쳐났고, 위조된 식량 배급표가 다발로 유통되었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늑대의 시간’, 즉 ‘자연 상태의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늑대인’ 시간이 찾아왔다고 말했다. 법의식과 도덕 감정의 완전한 붕괴가 임박했다는 뜻이었다.
“얼어 죽지 않은 사람은 모두 도둑질을 했다. 모두가 도둑이라면 과연 서로를 도둑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_본문 261쪽
1947년 범죄학자 한스 폰 헨티히는 “독일의 범죄 양상은 서양 문명의 역사에서 유례없는 규모와 형태를 띠고 있다”며 ‘범죄의 일상화’에 대해 우려하는 글을 발표했다. 당시의 잡지, 학술서, 신문, 수기 등에는 이런 독일인의 법의식 실종과 죄책감에 대해서 벌인 논쟁이 수없이 발견된다.
그러나 독일 전후 일상의 특수성에서 벗어나 역사적 거리를 두고 이런 논쟁을 바라보면, 논쟁 자체가 터무니없어 보인다. 독일에서만 50만 명의 유대인이 약탈당하거나 집에서 쫓겨났고, 그중 16만 5000명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은 법의식 실종의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패전 후 세상 사람들의 눈에 ‘독일인들’은 전쟁 범죄와 제노사이드를 통해 가해자로 낙인찍힌 지 오래였는데도 독일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나라가 질서와 품격을 갖췄다고 생각했다. 국외에서는 전후의 이런 시스템 붕괴를 독일을 재사회화할 기회로 바라보았지만, 독일인들은 이제야 범죄의 구렁텅이에 빠졌다고 우려했다는 점에서 당시에 집단적 인식의 왜곡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유추할 수 있다.
강제수용소 유대인의 행방, 전쟁 이주민의 사회적 역할
시민사회의 초석은 이렇게 다져졌다
독일인들이 궁핍한 나날 속에서 수상쩍은 행복을 누리는 동안, 800~1000만 명에 달하는 강제 징용자들의 송환도 시작되었다. 전쟁 중에 부족한 노동력을 해결하기 위해서 끌고 온 700만 명의 외국인과 유대인들이었다. 매일 10만 7000명이 고향으로 수송되었지만, 수용소에 남기를 택한 유대인도 적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수용소에 잔류한 까닭은 다양했다. 대부분은 돌아갈 곳이 없어서였고, 정신적ㆍ신체적 쇠약함으로 이송을 감당하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미군은 “유대인은 같은 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