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세상이 어떻게 좋아져야 하는지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때로 한 영혼을 말려 죽인다”
죄책감과 수치심이 아닌 우정과 사랑을 동력으로 더 넓은 세상 만들기
때로 한 영혼을 말려 죽인다”
죄책감과 수치심이 아닌 우정과 사랑을 동력으로 더 넓은 세상 만들기
“지금 이 순간 텔레비전 옆에 누워 있을 사람들을 생각해보세요.”
한창 자주 쓰던 러닝 애플리케이션에서 이런 응원 멘트가 흘러나오곤 했었다. 이어서 목소리는 유혹에 지지 않고 달리고 있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나를 북돋워주었다. 이 말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이상하게도 나는 저 말만 들으면 달리기를 멈추게 되었기 때문이다._45~46쪽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더 나은 곳으로 가기를 종용한다. 누군가는 꿈을 꾸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꿈을 이루자고, 누군가는 텔레비전 앞에 지친 몸을 누이고 있을 때 한강변을 힘껏 달리자고 한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끔찍하고 더러운 동물의 사체를 먹는 대신 ‘살리는 식탁’ 앞에 앉아야 한다고, 그 어떤 신념과 윤리도 저버리지 않는 안온하고 무해한 농담만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꾸짖음도 들려온다.
환하고 빛나는 곳,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깨끗하고 올바른 세상으로 가는 길은 쉽고 마땅해 보인다. 그러나 안담은 낙오되는 사람들, 애초에 지도를 손에 쥐어본 적도 없거나 혹은 걸음을 뗄 수조차 없는 사람들을 돌아보느라 흔들린다. 그들은 친구의 얼굴을 하고 있을 때도 있고, 안담 자신이기도 하다. 하루에 열네 시간을 꼼짝도 않고 일하는 날엔 신념보다 배달 음식을 택하기가 쉽고, “씻으러 가고 싶지만 몸을 일으킬 수가 없”어 운동장처럼 넓어진 다섯 평 방 안에 누워 있는다. 비건식을 위해 낼 삼사천 원이 없는 날이 있는가 하면, 비건식을 먹으며 “안정적으로 말라지”기를 남몰래 기도하는 날도 있다.
“더 도덕적인, 덜 착취적인 삶을 구축할 수 있는 물적 자본, 인적 자본, 지적 자본을 소유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곧잘 넘어진다. 강렬하고 매혹적인 윤리적 각성과 연대가 미처 구하지 못한 이들이 눈에 밟힐 때, 안담과 친구들은 “현실을 외면하고 동지를 배신하며” 그 옆에 눕는다. 타인, 비인간동물에게 의존하고 민폐를 끼쳐버리는 방식으로밖에 살 수 없는 이들이 사는 “관대하고 너른 마음의 나라”, “많은 잘못을 이미 했고, 그러다가 지친 나머지 타인에게도 관대한 사람들의 나라”에 있기로 한다.
하루는 미뤄둔 통성명을 하는 기분으로 이끼에게 물었다. 조금은 부푼 마음으로.
“혹시 잘못한 쪽이었던 적 있어요?”
“나는 항상 그쪽이에요. 늘 그런 기분이에요.”
“억울함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그럴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지요.”
그건 모두 정답이었다._266쪽
한없이 다정하게 들리는 안담의 목소리는 실패 앞에서 날카로워진다. 친구를 사랑하는 데 실패하고, 동물과 함께 사는 데 실패하고, 밤을 지새워도 글은 좀처럼 나오지 않고, 페미니즘과 비거니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똑바로 나아가고 싶은데 발이 자꾸 멈추어도 안담은 “실패를 귀여워하거나 가여워하”지 않는다. 안담에게 실패는 주저앉는 것이 아니다. 조금 오래 쉬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일어서야 함을 알고,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한발 내딛기를 권한다.
실패해도 괜찮다며 손쉽게 어르지 않고, 지속 불가능한 죄책감과 수치심의 그늘에서 벗어나 “다만 그렇게 해야 하므로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안담의 세상을 상상해보자. 네 잘못이 아니라는 말 대신 “잘못한 사람의 친구로 남”아, 올바름을 가르는 심판대에 선 순간까지 공범이 되어주겠다는 안담의 선언은 더 좋거나 나은 세상이 아닌 더 넓은 세상을 만들어줄 것이다.
한창 자주 쓰던 러닝 애플리케이션에서 이런 응원 멘트가 흘러나오곤 했었다. 이어서 목소리는 유혹에 지지 않고 달리고 있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나를 북돋워주었다. 이 말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이상하게도 나는 저 말만 들으면 달리기를 멈추게 되었기 때문이다._45~46쪽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더 나은 곳으로 가기를 종용한다. 누군가는 꿈을 꾸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꿈을 이루자고, 누군가는 텔레비전 앞에 지친 몸을 누이고 있을 때 한강변을 힘껏 달리자고 한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끔찍하고 더러운 동물의 사체를 먹는 대신 ‘살리는 식탁’ 앞에 앉아야 한다고, 그 어떤 신념과 윤리도 저버리지 않는 안온하고 무해한 농담만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꾸짖음도 들려온다.
환하고 빛나는 곳,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깨끗하고 올바른 세상으로 가는 길은 쉽고 마땅해 보인다. 그러나 안담은 낙오되는 사람들, 애초에 지도를 손에 쥐어본 적도 없거나 혹은 걸음을 뗄 수조차 없는 사람들을 돌아보느라 흔들린다. 그들은 친구의 얼굴을 하고 있을 때도 있고, 안담 자신이기도 하다. 하루에 열네 시간을 꼼짝도 않고 일하는 날엔 신념보다 배달 음식을 택하기가 쉽고, “씻으러 가고 싶지만 몸을 일으킬 수가 없”어 운동장처럼 넓어진 다섯 평 방 안에 누워 있는다. 비건식을 위해 낼 삼사천 원이 없는 날이 있는가 하면, 비건식을 먹으며 “안정적으로 말라지”기를 남몰래 기도하는 날도 있다.
“더 도덕적인, 덜 착취적인 삶을 구축할 수 있는 물적 자본, 인적 자본, 지적 자본을 소유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곧잘 넘어진다. 강렬하고 매혹적인 윤리적 각성과 연대가 미처 구하지 못한 이들이 눈에 밟힐 때, 안담과 친구들은 “현실을 외면하고 동지를 배신하며” 그 옆에 눕는다. 타인, 비인간동물에게 의존하고 민폐를 끼쳐버리는 방식으로밖에 살 수 없는 이들이 사는 “관대하고 너른 마음의 나라”, “많은 잘못을 이미 했고, 그러다가 지친 나머지 타인에게도 관대한 사람들의 나라”에 있기로 한다.
하루는 미뤄둔 통성명을 하는 기분으로 이끼에게 물었다. 조금은 부푼 마음으로.
“혹시 잘못한 쪽이었던 적 있어요?”
“나는 항상 그쪽이에요. 늘 그런 기분이에요.”
“억울함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그럴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지요.”
그건 모두 정답이었다._266쪽
한없이 다정하게 들리는 안담의 목소리는 실패 앞에서 날카로워진다. 친구를 사랑하는 데 실패하고, 동물과 함께 사는 데 실패하고, 밤을 지새워도 글은 좀처럼 나오지 않고, 페미니즘과 비거니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똑바로 나아가고 싶은데 발이 자꾸 멈추어도 안담은 “실패를 귀여워하거나 가여워하”지 않는다. 안담에게 실패는 주저앉는 것이 아니다. 조금 오래 쉬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일어서야 함을 알고,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한발 내딛기를 권한다.
실패해도 괜찮다며 손쉽게 어르지 않고, 지속 불가능한 죄책감과 수치심의 그늘에서 벗어나 “다만 그렇게 해야 하므로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안담의 세상을 상상해보자. 네 잘못이 아니라는 말 대신 “잘못한 사람의 친구로 남”아, 올바름을 가르는 심판대에 선 순간까지 공범이 되어주겠다는 안담의 선언은 더 좋거나 나은 세상이 아닌 더 넓은 세상을 만들어줄 것이다.
친구의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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