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시인이 되고 싶었던 소설가 강기희가 아내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마지막 동화
2023년 8월 1일 쉰아홉이라는 나이로 훌쩍 세상을 떠난 故 강기희 소설가의 유고 소설 『겨울 동화』(달아실 刊)가 출간되었다. 달아실한국소설 20번으로 나왔다. 표지 및 본문의 그림은 강기희 소설가의 아내인 유진아 동화작가가 그렸다.
『겨울 동화』는 비록 달아실한국소설 시리즈로 나오긴 했지만, 실은 장편 동화라고 해야 맞겠다. 암투병을 하던 강기희 소설가가 출판사에 초고를 보내오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생전에 꼭 한번 써보고 싶었던, 아내와 함께 만들어보고 싶었던 동화인데, 알다시피 내 몸뚱이가 앞일이 불투명해서 거칠지만 초고 그대로 보내네. 시간이 허락한다면 퇴고를 하겠지만, 퇴고를 못하고 떠날 수도 있을 거야. 그때는 많이 부족하더라도 부족한 대로 세상에 내보내주면 고맙겠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정말로 훌쩍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열 권이 넘는 소설책을 쓰면서도 한 권의 시집-『우린 더 뜨거워질 수 있었다』(달아실, 2022)-밖에 남기지 못했지만, 소설가 강기희는 늘 시인을 꿈꾸었고 꿈처럼 우리 곁을 떠났다.
함백산 아래 울울한 전나무 숲
아름드리 숲 지나 정암사 일주문 따라 오르면
적멸의 땅으로 이어지는 작은 석교 하나 나온다
다리를 건너면 이승 사람도 극락에 이른다는 극락교
극락교 입구에서 발길을 멈추곤
스님을 찾아보는데
- 자장 스님 계시우?
두어 번 더 소리쳐도 스님은 나오지 않고
계곡 물소리만 청아한 오후
극락교 아래 돌 틈에 숨어있던 열목어가 눈을 빼꼼 열며,
- 스님은 출타하셨는뎁쇼
- 언제?
- 글쎄요, 하도 오래되어서. 1천3백 년도 넘었거든요
- 故 강기희 시, 「스님은 출타 중」 전문
시인이 되고 싶었던 소설가 강기희는 영영 출타 중인데, 그가 남긴 말이 씨가 되어 출판사에는 퇴고하지 못한 그의 초고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마오쩌둥과 김일성과 김좌진과 안중근과 신채호와 윤봉길 등을 오라 하여 술판이라도 벌이고 싶다는 사내, 살다가 생이 지루해질 무렵 덕산기 숲속책방 접고 북녘땅 물빛이 순하고 고운 어디쯤에다 작은 ‘통일책방’ 하나 열었으면 좋겠다는, 북녘 동무들에게 남쪽에선 팔리지 않는 내 소설들이나 팔며 남은 생 살고 싶다는 사내, 비록 정선 시골 마을이지만 그래도 이장도 해보고 회장도 해봤다며, 폐암 말기라는 의사 소견에 내 몸에 아라리가 제대로 났다며 너스레를 떠는 사내, 전생을 사람으로 소설가로 살았으니 후생에는 가난한 소설가네 집 아궁이로 들어가면 좋겠다는 사내, 남과 북이 하나로 하나 되고 외세가 물러나는 날, 해방춤 추며 꽃 잔치나 해야겠다는 사내, 덕산기계곡에는 소설 쓰고 시 쓰다 〈우린 더 뜨거워질 수 있었다〉며 제대로 아라리가 난 빨갱이 촌놈 강기희가 산다.
- 박제영 시, 「덕산기계곡에는 빨갱이 촌놈이 산다」 전문
이번 장편 동화를 편집하고 책으로 펴낸 박제영 달아실출판사 편집장은 “미완이면 미완인 채로 강기희 형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며 “형은 사랑하는 아내에게 완성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했지만, 미완이어서 오히려 더 슬프고 아픈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동화가 되었다”고 책을 펴낸 소감을 밝혔다.
동화의 내용은 〈글쓴이(강기희)의 말〉과 〈그린이(유진아)의 말〉에 잘 나와 있어 별도로 소개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눈으로 가득한 겨울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춥지만 따스함이 기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지요. 어릴 적 도깨비가 있다는 도깨비소 앞에 살았습니다. 경치가 무척 아름다운 곳인데요. 장마철이면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이 장관이었습니다. 너무 아름다워서였을까요. 도깨비소는 어린 내게 금단의 구역이었습니다.
어른들은 어느 때고 도깨비소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었는데요. 그때 등장하는 뿔 달린 도깨비는 얼마나 무섭던지요. 어린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하여 어릴 땐 도깨비소로 접근도 하지 않았습니다. 도깨비가 잡아갈 줄만 알았거든요.
나이가 든 지금, 다시 도깨비소 옆에 살고 있습니다. 어릴 적 그렇게 무섭던 도깨비소가 이젠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밤이 되면 도깨비를 찾아 어슬렁거리기도 하니 나이가 들긴 한 모양입니다. 도깨비소 인근엔 반딧불이가 많습니다. 도깨비 친구들이지요.
고향인 정선 덕산기계곡에 돌아오면서 도깨비와 도깨비소에 얽힌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책방에 고양이가 살고 있는 데다, 겨울철이면 해마다 아내와 만드는 눈 고양이를 등장시켜 평화를 이야기하고 싶었거든요. 작품을 쓰면서 〈동화〉라는 형식을 빌렸지만, 결말에 이르니 〈아이들 동화〉가 아닌 ‘슬프고도 아름다운’ 〈어른 동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고백하지만 작품을 쓰며 내 눈에도 눈물이 촉촉하게 고인 적 있었거든요. - 2023년 여름, 강기희”
“남편과 나는 마당에 쌓인 눈을 치우면서 해마다 이런저런 눈고양이들을 만들었었다. 그때마다 남편은 눈고양이를 주인공으로 동화를 쓰면 좋겠다고, 나에게 써보라고 권하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못 들은 척했다. 태생적으로 죽을 운명(?)을 가진 눈고양이의 슬픈 삶을 쓰기 싫었다.
남편이 폐암 말기 선고를 받고 투병을 하는 긴 겨울에는 눈 치우기 힘들어서 눈고양이도 더 이상 만들지 못했다. 그때 남편은 마당에 눈고양이를 만들어 세우는 대신 책상 앞에서 글로 눈고양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게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보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쓴 글을 읽어보니 과연 내 염려대로 눈고양이는 죽었고, 남편도 우리 곁을 떠났다. 글 속에는 히포크라테스를 상상하며 만들어낸 요정 ‘히포’가 죽어가는 눈고양이를 되살려놓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아마도 남편은 투병 중에 그런 기적을 꿈꿨을지도 모르겠다.
살아 있을 때 그림 그려서 함께 만든 책을 펼쳐보자는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고, 그림을 전문으로 그리는 사람도 많은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섣불리 나서기 힘들었다. 그림을 그리느라 글을 다시 읽다 보니 컴퓨터 앞에 앉아 마지막 글을 쓰던 남편이 떠올라 무척 힘들었다. 남편이 떠난 후 서툴고 부족하기만 한 그림을 이제야 완성했다. 누구보다 좋아했을 남편에게 많이 늦어서 너무 미안하다. - 2024년 여름, 아내 유진아”
이 책은 그러니까 소설가 강기희가 이승에 남은 아내와 독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이겠지만, 반대로 아내와 독자들이 저승의 강기희에게 주는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당신을 잃고
천삼백삼십 날 꼬박
지독한 열병을 앓았지
정선에 와서 알았지
아라리를 앓았다는 것을
당신을 잃고
해발 1,330미터 만항재에 올랐네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만 개의 아라리를 적어
만 개의 풍등을 띄워 보낸 항구라지
만 개의 이별이 피워낸 아라리라지
열꽃들 만개한 만항재에 올랐네
당신을 천삼백삼십 번 잃겠네
그때마다 아라리를 앓겠지만
그때마다 만항재에 오르겠네
천삼백삼십 개의 풍등을 띄워 보낸다면
마침내 당신에게 닿을지 모르겠네
- 박제영 시, 「당신을 잃고 만항재에 올랐네」 전문
『겨울 동화』는 비록 달아실한국소설 시리즈로 나오긴 했지만, 실은 장편 동화라고 해야 맞겠다. 암투병을 하던 강기희 소설가가 출판사에 초고를 보내오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생전에 꼭 한번 써보고 싶었던, 아내와 함께 만들어보고 싶었던 동화인데, 알다시피 내 몸뚱이가 앞일이 불투명해서 거칠지만 초고 그대로 보내네. 시간이 허락한다면 퇴고를 하겠지만, 퇴고를 못하고 떠날 수도 있을 거야. 그때는 많이 부족하더라도 부족한 대로 세상에 내보내주면 고맙겠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정말로 훌쩍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열 권이 넘는 소설책을 쓰면서도 한 권의 시집-『우린 더 뜨거워질 수 있었다』(달아실, 2022)-밖에 남기지 못했지만, 소설가 강기희는 늘 시인을 꿈꾸었고 꿈처럼 우리 곁을 떠났다.
함백산 아래 울울한 전나무 숲
아름드리 숲 지나 정암사 일주문 따라 오르면
적멸의 땅으로 이어지는 작은 석교 하나 나온다
다리를 건너면 이승 사람도 극락에 이른다는 극락교
극락교 입구에서 발길을 멈추곤
스님을 찾아보는데
- 자장 스님 계시우?
두어 번 더 소리쳐도 스님은 나오지 않고
계곡 물소리만 청아한 오후
극락교 아래 돌 틈에 숨어있던 열목어가 눈을 빼꼼 열며,
- 스님은 출타하셨는뎁쇼
- 언제?
- 글쎄요, 하도 오래되어서. 1천3백 년도 넘었거든요
- 故 강기희 시, 「스님은 출타 중」 전문
시인이 되고 싶었던 소설가 강기희는 영영 출타 중인데, 그가 남긴 말이 씨가 되어 출판사에는 퇴고하지 못한 그의 초고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마오쩌둥과 김일성과 김좌진과 안중근과 신채호와 윤봉길 등을 오라 하여 술판이라도 벌이고 싶다는 사내, 살다가 생이 지루해질 무렵 덕산기 숲속책방 접고 북녘땅 물빛이 순하고 고운 어디쯤에다 작은 ‘통일책방’ 하나 열었으면 좋겠다는, 북녘 동무들에게 남쪽에선 팔리지 않는 내 소설들이나 팔며 남은 생 살고 싶다는 사내, 비록 정선 시골 마을이지만 그래도 이장도 해보고 회장도 해봤다며, 폐암 말기라는 의사 소견에 내 몸에 아라리가 제대로 났다며 너스레를 떠는 사내, 전생을 사람으로 소설가로 살았으니 후생에는 가난한 소설가네 집 아궁이로 들어가면 좋겠다는 사내, 남과 북이 하나로 하나 되고 외세가 물러나는 날, 해방춤 추며 꽃 잔치나 해야겠다는 사내, 덕산기계곡에는 소설 쓰고 시 쓰다 〈우린 더 뜨거워질 수 있었다〉며 제대로 아라리가 난 빨갱이 촌놈 강기희가 산다.
- 박제영 시, 「덕산기계곡에는 빨갱이 촌놈이 산다」 전문
이번 장편 동화를 편집하고 책으로 펴낸 박제영 달아실출판사 편집장은 “미완이면 미완인 채로 강기희 형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며 “형은 사랑하는 아내에게 완성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했지만, 미완이어서 오히려 더 슬프고 아픈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동화가 되었다”고 책을 펴낸 소감을 밝혔다.
동화의 내용은 〈글쓴이(강기희)의 말〉과 〈그린이(유진아)의 말〉에 잘 나와 있어 별도로 소개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눈으로 가득한 겨울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춥지만 따스함이 기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지요. 어릴 적 도깨비가 있다는 도깨비소 앞에 살았습니다. 경치가 무척 아름다운 곳인데요. 장마철이면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이 장관이었습니다. 너무 아름다워서였을까요. 도깨비소는 어린 내게 금단의 구역이었습니다.
어른들은 어느 때고 도깨비소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었는데요. 그때 등장하는 뿔 달린 도깨비는 얼마나 무섭던지요. 어린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하여 어릴 땐 도깨비소로 접근도 하지 않았습니다. 도깨비가 잡아갈 줄만 알았거든요.
나이가 든 지금, 다시 도깨비소 옆에 살고 있습니다. 어릴 적 그렇게 무섭던 도깨비소가 이젠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밤이 되면 도깨비를 찾아 어슬렁거리기도 하니 나이가 들긴 한 모양입니다. 도깨비소 인근엔 반딧불이가 많습니다. 도깨비 친구들이지요.
고향인 정선 덕산기계곡에 돌아오면서 도깨비와 도깨비소에 얽힌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책방에 고양이가 살고 있는 데다, 겨울철이면 해마다 아내와 만드는 눈 고양이를 등장시켜 평화를 이야기하고 싶었거든요. 작품을 쓰면서 〈동화〉라는 형식을 빌렸지만, 결말에 이르니 〈아이들 동화〉가 아닌 ‘슬프고도 아름다운’ 〈어른 동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고백하지만 작품을 쓰며 내 눈에도 눈물이 촉촉하게 고인 적 있었거든요. - 2023년 여름, 강기희”
“남편과 나는 마당에 쌓인 눈을 치우면서 해마다 이런저런 눈고양이들을 만들었었다. 그때마다 남편은 눈고양이를 주인공으로 동화를 쓰면 좋겠다고, 나에게 써보라고 권하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못 들은 척했다. 태생적으로 죽을 운명(?)을 가진 눈고양이의 슬픈 삶을 쓰기 싫었다.
남편이 폐암 말기 선고를 받고 투병을 하는 긴 겨울에는 눈 치우기 힘들어서 눈고양이도 더 이상 만들지 못했다. 그때 남편은 마당에 눈고양이를 만들어 세우는 대신 책상 앞에서 글로 눈고양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게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보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쓴 글을 읽어보니 과연 내 염려대로 눈고양이는 죽었고, 남편도 우리 곁을 떠났다. 글 속에는 히포크라테스를 상상하며 만들어낸 요정 ‘히포’가 죽어가는 눈고양이를 되살려놓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아마도 남편은 투병 중에 그런 기적을 꿈꿨을지도 모르겠다.
살아 있을 때 그림 그려서 함께 만든 책을 펼쳐보자는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고, 그림을 전문으로 그리는 사람도 많은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섣불리 나서기 힘들었다. 그림을 그리느라 글을 다시 읽다 보니 컴퓨터 앞에 앉아 마지막 글을 쓰던 남편이 떠올라 무척 힘들었다. 남편이 떠난 후 서툴고 부족하기만 한 그림을 이제야 완성했다. 누구보다 좋아했을 남편에게 많이 늦어서 너무 미안하다. - 2024년 여름, 아내 유진아”
이 책은 그러니까 소설가 강기희가 이승에 남은 아내와 독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이겠지만, 반대로 아내와 독자들이 저승의 강기희에게 주는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당신을 잃고
천삼백삼십 날 꼬박
지독한 열병을 앓았지
정선에 와서 알았지
아라리를 앓았다는 것을
당신을 잃고
해발 1,330미터 만항재에 올랐네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만 개의 아라리를 적어
만 개의 풍등을 띄워 보낸 항구라지
만 개의 이별이 피워낸 아라리라지
열꽃들 만개한 만항재에 올랐네
당신을 천삼백삼십 번 잃겠네
그때마다 아라리를 앓겠지만
그때마다 만항재에 오르겠네
천삼백삼십 개의 풍등을 띄워 보낸다면
마침내 당신에게 닿을지 모르겠네
- 박제영 시, 「당신을 잃고 만항재에 올랐네」 전문
겨울 동화 - 달아실 한국소설 20
$1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