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기억이 뒤척일 때 - 달아실시선 88

달의 기억이 뒤척일 때 - 달아실시선 88

$11.00
Description
수묵으로 지은 농익은 풍속화 한 채
- 이슬안 시집 『달의 기억이 뒤척일 때』
2020년 『작가』로 등단한 이슬안 시인이 첫 시집 『달의 기억이 뒤척일 때』(달아실 刊)를 펴냈다. 달아실시선 88번으로 나왔다.

이슬안 시인에게 “첫 시집을 펴낸 소회와 본인에게 시는 어떤 의미인지? 이번 시집에서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지? 어떤 시인으로 남고 싶은지?”를 묻자 이렇게 답변했다.

첫 시집을 펴낸 소회는?
이번 첫 시집을 내기까지 지난 몇 개월 동안 쓴 물을 토해낼 정도로 시달렸습니다. 시집을 내는 일이 정말로 무겁고 엄숙한 일이라는 것, 제단 위에 나 자신을 올려 번제(燔祭)하는 일이라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첫 시집을 발간했다는 기쁨보다 시인의 길이라는 무게감이 더 큽니다. 솔직히 또다시 시집을 낼 수 있을까 두렵기도 하고요.

본인에게 시는 어떤 의미인지?
시는 오래도록 침묵했던 내 영혼의 외로움과 슬픔, 좌절과 아픔의 고해성사를 들어주고 대신 울어주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내 속 이야기를 들어주고 영혼을 위로해주는 그런 존재입니다. 시를 쓰기 이전부터 다른 시인들의 시를 통해 마음과 영혼의 위안을 받으며 견뎌왔던 일들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번 시집에서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지?
세상의 모든 낯섦과 태생적 외로움, 눈물과 소외감, 상처와 부조리 등 인간의 내재적 절망을 공감하고 위로하면서 세상과 한번 잘 지내보자, 그런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각자의 가슴 한 켠에 묻어두었던 추억 하나를 문득 꺼내게 하여 마음을 데워주는 따뜻한 불빛의 통로이길 희망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다 보니 내가 쓴 시들 대부분은 고름과 눈물 냄새가 진동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어쩔 수 없는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고 토해져 치유되어야 할 중요한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시인으로 남고 싶은지?
크게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진솔한 목소리를 내며 아프고 지치고 슬픈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 작은 목소리라도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혹시 다음에 다시 시집을 낸다면 이번에는 철없이 즐겁고 경쾌한 시로 사람들을 웃게 하고 싶기도 합니다.

저자

이슬안

저자:이슬안
시인이슬안은서울에서태어났다.2020년『작가』로등단하였고,광주전남작가회의회원이다.

목차


시인의말

1부
다전│은진미륵│곰소에서│출근│아마도│명자꽃│겨울밤│써퍼│생명│검은몽돌해변│겨울노천탕│피정│홍시│목련│천혜노인요양병원

2부
보리굴비│무장댁│연어│처서│세한도│그릇경전│나무│입덧│앨버트로스│어미│뿌리│소라│대낮│아까시나무│어떤밥상│거미

3부
정신병동│은둔자의집│통풍│불│손│여름│갱년기│층간소음│순결│거짓말│국수│나에게│번아웃증후군│철거

4부
대인동목욕탕에서│양동극장│치평동│유서│1940년대목포다녀오다│新성냥팔이소녀│바를러나사우피자│민중│가면무도회│종부│반구대혹등고래와흥수아이전설│젊은날의초상│제주박수기정

해설_수묵으로지어진농익은풍속화한채-박성현

출판사 서평

시집해설을쓴박성현문학평론가는이번시집을“수묵으로지은농익은풍속화한채”라고명명하면서시집에수록된시편들을이렇게분석한다.

다전길이라는데
길가차나무한그루없네
아무리두리번거려도
찻잎하나내어줄인적도없네
멀리대원사고차수古茶樹
곁가지잘라서
차그늘한평만짓고싶네
다전길이라는데
차나무한그루없네
―「다전茶田」전문

“우리가관심을두지않아도저절로이뤄지는것이있다면혹은인기척이없기에더욱더강건하게제길을찾아내는것이있다면저기,부지기수로자라는생명들일것이다.이슬안시인이적절하게표현한것처럼,보성군득량면의고즈넉한‘다전길’에는‘아무리두리번거려도/찻잎하나내어줄인적도없’(「다전茶田」)으며,오히려그‘없음’이‘차밭’의이름을더욱도드라지게만든다.”

쑥부쟁이한무더기,수련두송이,장미한움큼,백련초한쌍,엉겅퀴두어뿌리,안개꽃한다발,한아름모란꽃,제비한마리,물확실안개,귀퉁이유리병한개,그리고빈의자하나,내몸속에들어가있다

울타리넘어누가몰래다녀간발자국이내몸에길을냈다

빈의자하나,귀퉁이유리병한개,물확실안개,제비한마리,한아름모란꽃,안개꽃한다발,엉겅퀴두어뿌리,백련초한쌍,장미한움큼,수련두송이,그리고쑥부쟁이한무더기,내몸밖으로빠져나갔다

내몸이사라졌다
―「철거」전문

“하나의단어에는그말(言)을운용했던수많은사람의온기와감정과성격이녹아있다.이슬안시인의문장은여기서출발한다.그는감정을쉽게드러내지않은채,사물을비껴가는자신의시선을집요하게바라봄으로써객관화하는이중노출을감행한다.시인의자아그내륙에는실로생존의보고처럼살뜰한풍경이담겨있다.시인이평생을담아온‘쑥부쟁이한무더기,수련두송이,장미한움큼,백련초한쌍,엉겅퀴두어뿌리,안개꽃한다발,한아름모란꽃,제비한마리,물확실안개,귀퉁이유리병한개,그리고빈의자하나’(「철거」)도그의내륙에들어가우주로서확장되고있다.”

노가다김씨방바닥에몸이흥건히엎질러져십장홍씨가말복에도착했을때는흰뼈만남았다
―「유서」전문

“이슬안시인의또다른매력은,앞서언급한것처럼그가표현한문장-이미지자체가하나의특수한‘알레고리’로작동하고있다는점이다.하지만숨겨진뜻을밝히고자선행한이야기를완전히배제하는전통적인그것(이솝우화처럼)과는달리,그의알레고리는‘다중우주’다.두개이상의이야기(혹은‘사건’)가각각의층위에서독립적으로동시에진행된다.”

이번시집을분석한끝에박성현문학평론가는이슬안시인을이렇게요약평가한다.

“이슬안시인은반드시있어야할문장으로만구성된이야기-짓기에탁월하다.한치의망설임없이써내려가는압축된서사―기묘하지만시인의작품들은별다른퇴고과정없이단번에썼다는인상을받는다―는그가그만큼사건에밝으며자신을과장하지않음을말한다.그럼에도그밀도와무게는만만치않다.‘젖은발로들어와/불꺼진밥솥을열어보니/온기빠진/식은밥한덩이가구석져있다/양은두레반위에/열무꺼내고미역줄거리꺼내고/식은밥에물을마는데/엄마가눈비비며밥상에앉았다/법성포이모가보리굴비보내왔다며/졸린눈으로살을발라주는데/갈빗대늘어진메리야스속에서/마른젖가슴이흘러나왔다/풀리지않는회사일에한소리얻어먹고/자정넘겨들어온집/물밥수저질이무겁기만한데/말없이가시를발라주던/주름진손이/젊은날의젖을쓸어담고있다’(「보리굴비」)는작품은단편이라할정도로웅숭깊다.
이와관련해반구대벽화의혹등고래와청주시흥수굴소년(흥수아이)미라를결속해이야기의범위를넓힌「반구대혹등고래와흥수아이전설」과같은작품이나‘맹그로브킬리피시’라불리는암수한몸물고기로나뭇가지속에서몇달동안물없이살수있다는등목어에서우리삶의애환을이끌어낸「가면무도회」같은작품도간과해서는안된다.이들모두시인이수묵으로축성한농익은풍속화이기때문이다.”

첫시집인데농익었다.이십대독자층부터육십대독자층까지공감할만큼시의감성과시의운용의폭이무척넓다.어떤작품은서사로,어떤작품은서정으로,어떤작품은묘사로,독자의오감을자극한다.다음시집을기대하면서일독을권한다.

시인의말

달의뒤편에오래도록서있었다.
세상은너무밝아들여다볼수없었다.

어둠을헤집고가끔달빛이드나들기도하였는데
그여린빛이내어준마음이시가되었다.

짧은시간이었지만
모월당달빛아래함께했던인연들과
달빛으로되돌아가신그분을추억한다.

세상의모든빛이모두에게평안하길.
작은바람에크게흔들리지않길.

나는여전히매사벅차고
세상에홀로나온아이처럼두렵고
자주눈이부시다.

푸른위안이되어줄한줄기작은빛이고싶다.

깨우침을주신모든분께감사를전한다.

2025년1월
이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