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 (허림 시집)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 (허림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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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그는 사실 니체처럼, 그러나 시처럼 견디고 있다
- 허림 시집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


허림 시인이 11번째 시집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을 달아실 기획시선으로 펴냈다.

그는 고통을 극복하거나 넘어서는 대신, 끝까지 감내하며 묵묵히 살아내려는 자다. 소박하고 고요한 그는 늘 그랬지만, 조용히 삶을 응시하는 자이다. 그리고 이제는 더 명징하게 절망을 버텨내는 힘을 시에 실어 떠나보내고 있다.
저자

허림

시인허림은홍천에서태어났다.강원일보신춘문예당선,『심상』신인상으로문학활동을해오고있다.시집으로『다음이라는말』,『골말산지당돌대장간에서제누리먹다』,『누구도모르는저쪽』,『엄마냄새』,『신갈나무푸른그림자가지나간다』,『노을강에서재즈를듣다』,『울퉁불퉁한말』,『이끼,푸른문장을읽다』,『말주머니』,『거기.내면』과산문집으로『보내지않았는데벌써갔네』가있다.현재한국작가회의회원,A4동인,표현시동인으로활동하고있다.지금은내면오막에서산다.

목차

시인의말

1부.노을이가는곳
상강무렵│달둔길을걷다│달팽이의사랑법│삶이라는중력│감나무가있는집│새떼몰려가는골말쪽│구름처럼가벼운│산거山居│피아노소리가들리는골목│울음이있는저녁│노을이가는곳│사월│아소베랑에서│배웅│한입

2부.입말을내귀로들다
잉크│구름에숨는반달│흰빛의고요│보살│마곡에하룻밤│입말을내귀로들다│호밀이밥│뻐꾸기울무렵│주막을찾아서│사진틀│후동고개│양말한켤레│도서관에서본풍경│개미굴을들여다보다가│서랍속에넣어둔시간

3부.뻿속에서바람소리가났다
염천│아지랑이풍경│단풍│암탉│나를알아보시겠어요│골목샛길│낮달│후다닥│발자국│작은논골│뻿속에서바람소리가났다│실론약수│바람에귀를씻다│모갯불│살고싶다고했더니

4부.흰닭똥이약이되어
찰나,마음에두었다│밤은흘러가서은하수가된다│그믐달│눈꽃이피다│감자싹│골말에는부엉이가산다│비로소│가을밤│어떤어록│삼백고지│다음│득음│흰닭똥이약이되어│아재│누가가르쳐준것도아닌│낯설은옛날

해설_내면內面에서길어올린내면의화두ㆍ김겸

출판사 서평

해찰떨지말고이쪽등강에서저쪽비탈로
염소가자는대로따라가라했다
삶이란원래절망하면서사는거니까
산이너를받아줄그때까지만참으라했다
-「살고싶다고했더니」부분


삶은절망으로가득차있지만,시인은그것을부정하지않는다.끝내버티며살아내려한다.니체는『우상의황혼』에서“살아야할이유를아는사람은어떤고통도견딜수있다(HatmanseinWarum?desLebens,soverträgtmansichfastmitjedemWie.)”고말했다.니체에게고통은삶을부정해야할이유가아니라,오히려삶전체와함께긍정해야할무엇이었다.그는고통을인간의지의힘으로끌어안고,그것까지포함한삶을사랑해야한다고했다(amorfati).

허림또한고통을피하지않는다.다만그방식은다르다.니체가고통을의지의힘으로긍정해야한다고강조했다면,허림은고통을삶의본질로받아들이며묵묵히견디려한다.“삶이란원래절망하면서사는거니까/산이너를받아줄그때까지만참으라했다”는고백이바로그것이다.

그의언어가지닌무게는시「단풍」에서도드러난다.


단풍나무둥치에빨랫줄맸다
사흘에한번속옷가지빨아널고
날좋으면이불과요를내다넌다
곱게잔듯해도가위눌린땀이배고악몽에흘린눈물의얼룩과
눈물묻고잠든베개

이번만은견뎌보자던날들주름진다

들창에서성이는새벽
눈절로떠습관성처럼인력시장처마밑에줄을선다
이골이난듯해도잡부셋
냉큼달려간다

우물가에서세수하고목장갑과양말을빨아
어둠이내려앉은빨랫줄에넌다
저녁마다손이퉁퉁붓고마디마다뻐근한작업풍이도진다
여기저기파스를붙이고좀심하다싶어
하루쯤쉬자
마음먹고집구석돌아보는데
목졸린단풍나무가유독붉다

빨랫줄만기억나고나무는보지못했다
서서히목조이는일이파다했는데핏줄이선나무
가을이라고단풍이든다
-「단풍」전문


이시에서단풍은계절의색이아니라,노동의고통과함께새겨진삶의흔적이다.“이번만은견뎌보자던날들주름진다”는구절은시집전체를관통하는태도를드러낸다.

삶은끊임없이목을조이지만,그고통을감내하며버티는과정이곧단풍의붉음이된다.저녁마다손이붓고마디마다작업풍이도지는몸의고통은단풍잎의색으로치환된다.자연의변화와인간의삶이하나로겹쳐지며,‘견딤의흔적’이언어로형상화된다.

허림의시에서견딤은울음이기도하다.그러나그것은단순한설움이아니다.시「사월」은울음이곡진한울림으로바뀌는과정을보여준다.


울음을곡哭이라하지
애걸하듯북방산개구리우는사월
아홉사리고개
울음이곡曲을넘는다
봄이어서꽃들도산을넘는데
한소절한소절곡진하다
지금울지않는다면언제울까
울음이산을키운다
푸른울음으로도지는사월
여기저기쓸어놓은울음의발랄
내게돌아오는메아리도점점푸르다
-「사월」전문


울음은응어리로머물지않고산을키우는힘이된다.개인의눈물이공동체적울림으로번져나가며,그울림은곧타인을향한배려로이어진다.이런태도는시「피아노소리가들리는골목」에서도잘드러난다.


꽃으로산날은길지않았다
꽃만보려했지안부는묻지않았다

아파도아픈척하지못하고
괜찮다괜찮다고꽃만보여주었다

꽃으로산길지않은날들
사랑만큼은뜨거웠다

꽃으로무거워
가지가찢어지고흥건해지기도했다

그런계절이다시와서
코트자락여미고밤길을걷는골목

그녀의손끝에피었다지는
꽃의느린듯여린
적막
-「피아노소리가들리는골목」부분


시인은아픔을드러내지않고(사실견디면서)끝내꽃과적막을건넨다.자신의울음을삼키며타인을안심시키는태도,그것이허림의견딤이자사랑이다.그리고끝내저무는빛속에서도결기는남는다.


세상에는눈물이차고넘쳤다

모래톱따라걷다가뼈처럼반짝이는조개를보았다
끝까지살아보겠다는결기같다
-「노을이가는곳」부분

노을은허무가아니라결기의자리다.소멸속에서도살아내려는힘이다.니체의변신은유를빌려말하자면,끝까지살아보겠다는그결기는,낙타의견딤이면서동시에용맹한사자의태도이기도하다.

허림은“삶이란원래절망하면서사는거니까/산이너를받아줄그때까지만참으라했다”고노래했다.고통은고통일뿐,다만견뎌야하는것이다.그러나그겸손한견딤은어느순간결기로전환되고,그자리에서허림의시가태어난다.

니체에게고통은의지적결단을통해삶전체와함께긍정해야할대상이었다.반면허림에게고통은본래삶의자리이며,그속에서묵묵히살아내야하는것이다.

그렇다고해서그는울음을숨기지않는다.오히려그울음을곡曲으로바꾸어,곡진한노래로길어올린다.그것이허림의시가보여주는힘이다.

그것이오늘우리에게가장깊게전하는허림의말이다.겸허한견딤이자,타인을향한사랑이며,삶을긍정하게하는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