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극장

해변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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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오늘 밤 유령택시는 은유를 찢고 실재를 향해 달려가지
- 윤형근 시집 『해변극장』
윤형근 시인이 신작 시집 『해변극장』을 펴냈다. 달아실시선 97번으로 나왔다.

이 시집은 비유와 장식에 기대지 않고, 세계의 표면을 살짝 뜯어내 그 밑에 감춰진 결을 직접 만지려는 실험의 기록이다.

문학평론가 오민석(단국대 명예교수)이 말했듯, “그는 상징계의 둥지에 안주하며 은유의 ‘멋진’ 시를 쓰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의 언어는 무슨 계시록처럼 상징계와 실재계 사이에 걸쳐져 있다.”

『해변극장』은 바로 그 불안한 경계에서 출발해, 끝내 상징의 안전망을 넘어 더 낯선 현실, 곧 실재를 향해 나아간다.
저자

윤형근

저자:윤형근
세종시출생으로1984년『문예중앙』으로등단하여작품활동을시작하였다.시집으로『새를날리며』,『나는신대륙을발견했다』,『사냥꾼의노래』가있다.

목차

시인의말

1부

물의아이│비로엮은시│밤비가유령처럼│불면의날들│해변극장1│두꺼비가사는법│물집│밤길의주문│돌아오지않는골목│비에젖은날들│묵은집│낡은의자│생강라면│은밀한전설│게걸음으로│달과사과│단풍잎뜨겁게│흩어진너의몸들로│환절기│해변극장2

2부

거울세상으로│우리는나에게│옷에관한명상│언덕에올라│비문법적이력서│목동과나무꾼│그때그수건│그여름의행방│수세미꽃│봉지날다│계단의추억│늙은복서│깍두기를위하여│거품시장│개같은인생│군자君子대로행大路行│유령택시│뻐꾸기둥지에서│거리의몸짓│병사는죽지않는다

3부

버스가다니던옛길│가시│신의농업│일개미1│4월은너에게│우리집에왜왔니?│하우요夏雨謠│유배지에서보낸메일│최후의유혹│악어생각│박물관의탄생│녹두밭수색기│일개미2│가을유감│화살나무단풍│버닝하우스│허기의야경│중력의오리│매미는떠나가고│불꽃의아이

해설_상징계를넘어실재계로-오민석

출판사 서평

이여정의한장면을선명하게드러내는작품이「유령택시」다.

밤이면이거리에의문의택시가다닌다
낮에는누구의눈에도뵈지않지만
얼굴없는기사가핸들을잡고암행하는데
행인이길가에서손을들고불러도멈추지않아
예약표시등도켜지않은채그림자만기웃대며
누굴찾는지,승객을찾아나선게맞는지
무작정쌩쌩달려어디론가가고있다

어디선가흐느끼는아이의목소리가울려
택시는급히방향을바꾸어그쪽으로향한다
거기는벼랑끝으로이어져있다급하게
브레이크밟는소리,타이어타는냄새
잠시후택시는태연하게휘파람불며
도심한복판대로를질주하고있다

문득젊은여자의찢어지는비명이날아와
택시는후미진뒷골목으로뛰어든다
차체보다폭이좁은길을뚫고나가
쓰레기통을뒤지던고양이를통과하여
어두운빌딩지하계단으로들어간다
외치는소리는찢어져나풀나풀흩어지고
미로를빙빙돌며숨을헐떡이는택시

자정이지난시각도시를떠난택시는
국도를지나한적한시골지방도로들어선다
가로등아래날뛰던딱정벌레떼가숨져있다
종종오소리족제비도길한복판에누워서
버둥거리다가힘없이고개를꺾는다,택시는
청소차로변해트렁크를열어사체를거둬간다

먼동이틀무렵지상은다시말끔하고태연해
택시는한순간에땅속으로스며든다
두더지가되어어딜후비고다닐지
―「유령택시」전문

여기서택시는승객의호출이나제도의규칙에따르지않는다.대신“흐느끼는아이의목소리”나“젊은여자의찢어지는비명”같은낯선신호를따라간다.현실과비현실이뒤섞이는혼란속에서,독자는“브레이크밟는소리,타이어타는냄새”같은날것의감각에부딪친다.이혼재의장면은『해변극장』이실재로치닫는출발점임을잘보여준다.

윤형근의시가빛나는또다른지점은사물이스스로말을하는순간이다.「묵은집」은삶의흔적과고통을고스란히품은채,은유가아니라감각의사실로다가온다.

수십년애면글면살아온쾨쾨한성냥갑
달팽이혼이달라붙어죄는것도아닌데
안주인은이사갈엄두가안난다고
내가벽에못을박는동안남몰래
스스로못박히고있었다,십자가가된집

예배도하지않으면서집은손바닥에
단풍드는시늉으로상흔을길러왔다
그그늘에철새들간간이둥지를틀어
알에서깨어난새끼들은이내각자의하늘을찾아
연의몸짓으로훨훨날아가곤돌아오지않는다

양조장지게미냄새로젖은유리창에
얼얼한시선띄우면눈이부시라고
낙조는건너편산자락에날개를걸친채막막하다
등성이에기댄흔들바위만큼집은들썽거리며
―「묵은집」전문

“스스로못박히고있었다,십자가가된집”이구절은집을단순한은유적장치가아니라,고통을품은살아있는실체로만든다.낡은집의냄새,유리창의습기,바위의흔들림이겹겹이쌓이며,마침내사물은의미가아니라감각의진동으로말을건다.시인은사물의표면에스민기억과고통을붙잡아,언어가아닌촉감으로드러낸다.

사물이자기몸으로실재를드러냈다면,윤형근은언어자체를무너뜨림으로써또다른길을열기도한다.시「비문법적이력서」는언어의질서를버티고있던문법을해체하며,시가어떻게의미의틀을벗어나감각의세계로들어가는지를보여준다.

나는이땅에명사로태어나
매년다른명사로명찰을바꿔달았지만
스스로깨닫지못한채살아왔다
삶이꼬리표달고실려가는것도
모르고밑바닥을서성거리다가
어느순간대명사에게포섭당하고

자폭을꿈꾸도록길들여졌다
집단속에서익명의수사로변해
어둠이눈을뜨면동사가나를이끌어
명사에매달렸던관형사를납치해가두고
숨어있던형용사를폭파하여
현장에화약냄새와끌려간자국만남아

사는건점점사라지는길이라고
동사는수행하는부사에게말하지만
나는무엇을느끼고무슨생각을하는지
빗방울하나에도지워질꿈인삶을
어떻게충만하게채울지몰라
저만치감탄사혼자속으로웅얼거릴뿐
―「비문법적이력서」전문

이시에서가장선명한장면은문법을이루는품사들이하나둘무너져내리는풍경이다.명사,동사,형용사같은언어의기본단위들이납치되고폭파되며,언어는더이상질서의틀을유지하지못한다.

“어둠이눈을뜨면동사가나를이끌어/명사에매달렸던관형사를납치해가두고/숨어있던형용사를폭파하여”

오민석평론가의말대로상징계란곧우리가살아가는언어와사회의법칙이다.「비문법적이력서」에서시인은그질서를거슬러문법을흔들고깨뜨린다.

그렇다.“시는은유넘어실재계로건너뛰는순간,은유의옷마저찢는”(오민석)것이다.

『해변극장』은바로그찢김의순간들을장면마다기록해놓은책이다.이시집은은유로포장된세계를걷어내고,우리가미처마주하지못했던감각과파편을독자의눈앞에불쑥내민다.

『해변극장』을읽는다는것은,세계가언어로포장되기전의날것같은감각과마주하는일이다.그것은불안하고거칠지만,동시에시가주는가장근원적인체험이기도하다.

상징계적의미의안전망을벗어나,실재의거친숨결과직접마주하도록이끄는것-그것이이시집의진정한여정이다.

시인의말

도심의서재와산밭사이를오가며
틈틈이끄적거린시편들이꼭돌멩이같다.

고만고만한것들쌓아올려대수롭지않겠지만
어쩌다금이가고부스러진다해도
닭똥같은거름이라도되었으면좋겠다.

2025년9월
윤형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