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껴안는기린의산수,그리고실존적해피엔딩
-유문호시집『나와사과나무그리고어쩌면해피엔딩』
시인유문호가첫시집『사랑,지나가다』(2000)이후무려26년만에두번째시집『나와사과나무그리고어쩌면해피엔딩』(달아실刊)을상재했다.
·26년의침묵,한번도시를떠나지않은자의귀환
두번째시집을펴내기까지무려26년만이다.분초단위로유행이명멸하고생산성과효율성이지배하는문학장안에서이토록긴침묵은흔치않다.세속의잣대로는시의영역을이탈한오랜방황으로비쳤을테지만,책임편집을맡은박제영시인의말처럼그는“한번도시를떠난적이없었다”.빈집에들어앉아밥이되지않는시를쓰는일을스스로의‘팔자소관’이자‘위로’라명명하는시인의말은,이시집이자본의영토바깥에서오랜시간숙성된영혼의순례기임을방증한다.
어쩌면해피엔딩이란
찬란한결실을손에쥐는일이아니라
꽃피우지못한계절의나를
가만히안아주고용서하는일일지도모른다.
-「나와사과나무그리고어쩌면해피엔딩」부분
이번시집은구차하고비루한‘지구적삶’에서출발하여,상처와환멸로점철된‘우주적망명’을거쳐,마침내강원도영월의사과나무아래라는구체적이고토착적인공간에서실존의미학을완성하는궤적을그린다.
·자본의산수(算數)와‘기린’의진화론
시집의전반부를관통하는핵심모티프는박민규의소설을시적으로변주한「그렇습니까?기린입니다」연작이다.시인에게유년의‘산수’란가난과의유대관계였다.외상계란빵하나를반으로갈라두개로만들어먹던기억은정량적자본의논리를거부하고심리적허기를채우려는가련한발버둥이다.구로공단의매연속에서목을길게빼고하늘을향해시꺼먼연기를뿜어대던‘기린’의형상은가족의생존을위해삶을갈아넣어야했던누이와소시민들의피눈물나는역사로치환된다.
이가난의산수는2026년현재의디지털자본주의에이르러더욱심화된소외를낳는다.
스마트가스마트하는세상,느리고더딘나는눈과귀가어두운인간이되었다.뉴스를봐도,전화기를들어도,거리의간판을봐도못알아듣는말들이많아졌다.하나만알면가능했던세상이그이상을넘어점점더많은것을요구했다.경험하지못했던숫자들은이해정도로해결되는문제가아니었다.그것은편의점에서원플러스원의물품을사는것과는차원이다른세계였다.산수속의물리학이라고나할까,아무튼.
-「그렇습니까?기린입니다2」부분
창구가없어진대합실과키오스크가점령한세상에서대화의단절을겪는시인은자신을허허벌판의“스톤헨지”로인식한다.유용성과속도만을강요하는시스템속에서낙오된이들은무념무감한눈빛으로“그렇습니까?기린입니다”라고중얼거릴뿐이다.이는자본의폭력앞에소외된단독자가취할수있는최소한의실존적존엄이다.
·사막이된도시,환멸을건너는풍자
2부의시선은시인이건너온도시의어두운풍경과정치·사회적환멸을거침없이기록한다.「모래시계」속“새벽3시의사막”은불경기로인해불을끄지못해별이되어버린상가들이즐비한도심이며,「그도시」는줄을서도차례가돌아오지않아결국과로사로밀려나는비참한사육장이다.
시인은이러한사회적억압과재난에대해날선풍자를아끼지않는다.「냉동인간」에서담뱃값인상이라는소시민적스트레스앞에냉동인간이되기를자처하는인물이나,「사막이왔다」와「계엄이왔다」연작을통해한인간의사소하고도미친권력욕이빚어낸시대적황당극을폭로하는대목이그러하다.“바람이분다.거짓말이쏟아진다.그렇게계엄이왔다”라는서늘한진술은진실이실종된시대를향한깊은환멸의표출이다.
·실패의복원,어쩌면해피엔딩이라는구원
시집의진정한절정은단종의유배지이자까마득하게잊혀가는공간인강원도‘영월’에서이루어지는사과나무와의대면이다.시인은산골로들어와사과나무를심고십수년을돌보았으나나무는끝내사과를맺지못한다.자본주의적생산성과유용성의기준으로보면이는완벽한‘실패’이자낙오다.
그러나시인은표제작「나와사과나무그리고어쩌면해피엔딩」을통해놀라운시적반전을선언한다.“사과를품지못했다고해서그나무의봄이거짓이었을리없다”는자각이다.결실이없다고해서사과를꿈꾸며땅밑에서자신을밀어올린봄의과정까지부정될수는없기때문이다.
여기서시인은세속이말하는해피엔딩의정의를전면수정한다.진짜해피엔딩이란화려한성공을거두는것이아니라,꽃피우지못한결핍가득한과거의나를가만히안아주고용서하는일이다.타인의유쾌한꽃밭을향했던실존적질투를거두고,상처받고멍든자리로다시손을뻗어결핍을결핍대로인정하는성찰의미학이다.
·쓸쓸한빈틈의길을걷는청춘
시인은거칠것없는금빛의창공을날수있는날개가자신에게없음을잘안다.대신그는땅에남아얕은바람에도허리를휘는들풀들의자리,즉“구부러진마음한쪽의빈틈”을선택한다.그쓸쓸한빈틈의길을날듯이걸어가는것이시인이도달한마지막실존의양식이다.
이제시인은홀로걷지않는다.시집의대미를장식하는「우리는낙원으로간다」에서이웃들의이름을부르며걸어가는그낙원은멀리있는이데아가아니라,“나의피로와웃음이섞인자리”,즉“언제나지금”이라는구체적인현실이다.
유문호시인의『나와사과나무그리고어쩌면해피엔딩』은겨울의논리를흙속에서무너뜨리고‘동사(動詞)’로깨어나고자하는봄의선언문이다.자본의산수에치여목이길어진이시대의기린인당신들에게,이시집은어쩌면쓸쓸하고도따뜻한구원의문장으로남을지도모르겠다.
·시인의말
아무도찾아오지않는
빈집에들어앉아
밥이
되지않는
詩를쓴다.
즉,팔자소관八字所關
그것은
스스로를
위로함에다름아니다.
2026년사과,꽃을기다리며
유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