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동화,안심을유예하는미완의우화
김루안의시세계에들어서는순간독자는익숙하면서도낯선표지들과맞닥뜨리게된다.흰토끼,청개구리,고양이,소녀,회전목마,유리병같은기호들은본래동화적이고따스한세계를환기하는상징들이다.그러나김루안시인의손끝에서이표지들은독자를안심시키는안전장치가되기를거부한다.시인은환상과우화의형식을빌려오되,완결된결말이주는평온함을단호히유예한다.
시집속,시인의말을그대로빌려와이번시집을하나의문장으로만들면이런거다.
“어둠은소녀의천적이에요/어둠의독방에앉아흰토끼를그린다면/마침내당신과소녀와고양이의장르가완성된다”
시집전체를관통하는서사는깨어진유리의파편처럼서늘하다.늙지않는소녀와소멸의감각,그리고유폐된공간속에서피어나는상흔들은잔혹극에가까운아름다움을띤다.시인은과거의아픔이나상처를통속적인감상주의로다독이지않는다.오히려그파편들을직면하고선명하게드러냄으로써,상처자체를존재의근원이자새로운감각의출구로전환한다.
과거를폐기하며미래로나아가는절박한언어
이시집이주는가장커다란미학적미덕은언어의‘젊음’과‘절박함’에있다.침묵의세월이길었던만큼시인의시선은둔감해지기는커녕더욱날카롭고민감하게제련되었다.총4부로구성된시집의흐름은자아의분리와충돌(1부)에서시작하여,소멸과미완의폐허를거쳐(2부),죽음과에로티시즘이교차하는고독의사유(3부)를지나,마침내방임과자유라는미궁속고백(4부)으로이어진다.
조동범시인이해설에서짚어냈듯,김루안의시는과거의유물에연연하거나주저앉지않는다.시인은안주할수있는익숙한서정의틀을끊임없이폐기하며,언어가도달할수있는무한한상상력의지평을향해무서운속도로돌진한다.그속도감과비약속에서피어나는것은여린감수성이아니라,존재의미궁을뚫고나가려는젊고사나운야성이다.
시의바다를향한자유로운항해
제목에등장하는‘자유’,‘흰토끼’,‘청개구리’는시인이향하고자하는궁극의지향점을보여준다.순수(흰토끼)와청개구리같은튀는반항심,그리고그것들이모여이루는‘자유’의상태는어둠의독방에서시를개척해낸시인의결기와닿아있다.
시집을책임편집한박제영시인은이렇게단언한다.
김루안의시는우화를흉내내지만결코우화로완결되지않는다.동화적표지들―흰토끼,청개구리,고양이,소녀,회전목마,유리병―이시집곳곳에흩뿌려져있지만,그것들은독자를안심시키기위한장치가아니라오히려안심을유예시키는장치로기능한다.시인의말에서이미그는스스로예고한다.“쓰이지못한우화를기다리는일”이라고.이시집은바로그미완의우화,즉완결되기를거부한채남아있는이야기의파편들을모은목록에가깝다.
비극의바닥까지내려가본자만이비로소평온한아침을물고오는하얀새를맞이할수있는법이다.김루안시인의이번시집은오랜정적을깨고시의바다로다시노를저어나가는굳건한서명이자,읽는이의가슴에오랫동안서늘한별빛을박아넣는아름다운잔혹극이다.모루유리창가에앉아빛을향해줄기를늘리는수국처럼,그의시가오랫동안수많은외로운고양이들과소녀들의방을환하게비추어주기를진심으로바란다.
『내가좋아하는것은자유흰토끼그리고청개구리』는침묵끝에피어난한송이서늘한불꽃이다.읽는이의가슴에오랫동안감각의파문을일으키는이잔혹하고아름다운우화집은,긴정적을깨고시단의표면위로가장강렬하게부상한올한해의소중한수확이라부르기에부족함이없다.
■시인의말
한줄의질베르를대면할때
초록스타킹을신은내발끝에서
별이빛났다.
그건단순히시간의문제가아니었다.
하나의세계가끝나는길은멀고.
다시눈발이온몸을파고들때이성이결여된주머니에서
사천년전코카서스의야생사과가터져나오듯
희망과두려움의그림자를지나며묻고또묻는다.
바닥에떨어진깃털이
날지못한것은
아닐것이라고.
마지막쉼표를찍지못한채거칠게내려놓는잉크처럼
쓰이지못한우화를기다리는일.
2026년8월
김루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