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것들의세밀화가,내면을걷는산책자로베르트발저
로베르트발저는27년의정신병원생활과거의그만큼의절필기간으로인해한동안잊히는듯했다.그러나헤세와같은문인들의계속적인언급에의해작품들이재출간되었고,사후1970년대에이르러서는수많은젊은작가와비평가들이그의독특한작품세계를이해하고연구했다.현재발저는20세기독일문학사의가장중심적인위치에놓인작가이다.
1878년스위스의독일어사용가정에서자란발저는어려운형편탓에14세에학업을중단해야했다.이후하인,사무보조,사서,은행사무원,공장노동자등의직업을전전한다.종이조차살수없는궁핍한생활중에도영수증,전단지,포장지,달력뒷면등에글을썼고그것을끊임없이신문과잡지에투고했다(수록작「최후의산문」참조).이러한그의삶은그대로글의소재가되었다.당시대중적으로인기를끌지못했던발저는그러나문단에서는어느정도성취를이루었는데,그중에서도발저보다5살어린카프카가그의찬미자였다.로베르트무질은카프카의초기산문「관찰」을읽고“발저유형의독특한예”라고언급하며그유사성을지적하기도했다.연구자들은카프카의《성》에등장하는두명의조수의원형을발저의장편《야콥폰군텐》(한국어판제목‘벤야멘타하인학교-야콥폰군텐이야기’)에서찾기도한다.
카프카뿐아니라헤세역시발저를“동시대가장의미있는스위스작가”라칭하며그의작품이더많이읽히기를바라는글을여러차례쓰기도했다.그러나아웃사이더적인면모와정규교육을마치지못한점,스위스방언등의이유로발저는독일이지성인사회에서겉돌았고,결국적응하지못하고스위스로돌아가기에이른다.발저는잠을자는시간외에는늘걷고또글을쓴듯하다.
바로앞에풍요로운대지가펼쳐져있었지만나는가장작고가장허름한것만을주시했다.지극한사랑의몸짓으로하늘이위로솟아올랐다가다시가라앉았다.나는하나의내면이되었으며,그렇게내면을산책했다.모든외부는꿈이되었고지금까지내가이해했던것들은모두이해할수없는것으로바뀌었다.나는표면에서떨어져나와지금이순간내가선함으로인식하는환상의심연으로추락했다.우리가이해하고사랑하는것이우리를이해하고사랑한다.나는더이상나자신이아니라어떤다른존재였으며,또한바로그렇기때문에비로소진정으로나자신이었다._「산책」중에서,p.349
발저는산책에강박적으로몰두했다.그에게산책은자신의내면을거니는행위였고이는곧그의글의소재와형식이되었다.심상,스케치,우화,단편같은형식속에서발저의인물들은대부분무기력한보통의소시민으로등장한다.그들은권력과지배를끔찍하게생각하고심지어가난하고초라한자신의생활을유지하고자애쓴다.발저는작품속에서고립되고무력하나자유로운자신의작은세계를지키고아무것도아닌것들에애정어린시선을보낸다.
1차세계대전발발이후발저는더욱심한경제적인궁핍과우울감에시달리다결국자살을시도한다.그러나그마저실패하고(“나는심지어올가미조차제대로맬줄몰랐기때문이다.”)1929년베른의발다우정신병원에입원했다.1933년헤리자우병원으로옮긴다음부터는단한글자도쓰지않았지만(“나는여기글을쓰러들어온것이아니라미치기위해들어온것이니까요.”),발저의작품을사랑하는이들에의해,작품의재출간을위해1936년병원을찾은출판인카를젤리히에의해재조명되고늦은성공을거두었다.1956년크리스마스산책길에서그는눈밭위에쓰러져사망한채로발견되었다.
발저의작품에서주체의세계는항상내면에있다.하지만이러한우주는,그리고절망은,결코유아론적인것은아니다.그것은연민으로가득하며,슬픔을동반하는생명이라는존재를한시도의식의바깥으로밀어내지않는다._수전손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