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와 고구려

삼국지와 고구려

$14.00
Description
격동의 세월 속 고구려의 지혜와
삼국지 영웅들의 전략을 탐험하다!

삼국지와 고구려의 숨겨진 관계를
생생하게 복원해낸 흥미진진한 역사 이야기
이 책은 삼국지의 조조, 손권, 사마의 등 실존 인물들을 통해 그들은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 왔고, 또 그 격동의 세월 동안 고구려는 생존을 위해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떠한 판단과 선택을 하였는지를 삼국지의 주요 사건에 맞춰 되짚어 본다.
소설 《삼국지》는 천 년이 넘도록 오랜 세월 동안 진정한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해 있다. 이름난 저자들의 직접적인 번역을 통해 밀리언셀러로 위세를 떨친 책들도 있고, 요약본부터 만화까지 다양한 장르로 변주가 이루어진 세대 불문의 베스트셀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의외로 이 당시 중원의 역사와 동북아시아 변방, 특히 고구려의 역사에 실제로 밀접한 교류가 있었음을 아는 이는 많지가 않다. 오나라의 손권이 원교근공을 통해 외교적으로 고구려를 끌어들이기 위해 교류를 주고받은 것 역시 소설 《삼국지》 속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다. 《삼국지》를 중원의 역사로서만이 아니라 동북방 변경과의 역학 관계로 관점을 바꾸어 고구려 그리고 부여까지 상호 연관성을 중심으로 읽어 보면 그 시기에 동시대의 만주 그리고 한반도 내의 각국은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 또 거대한 역사적 파고에 얼마나 슬기롭고 현명하게 대응하였는지 배울 수 있게 된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역사 속 《삼국지》를 토대로 하여 격변의 세월 속에서 우리 선조가 생존을 위해 기울인 각고의 노력과 삶의 지혜를 접하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삼국지 안의 주연급 인물들과 직접 마주하는 듯 생생한 경험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우재훈

저자:우재훈
고구려,발해,고려등동북아고·중세의역사를파고든지20여년,역사기록의문맥속에서소외당했거나저평가되었던혹은오해받아온인물들을중점적으로발굴해내어역사적실체를찾아재조명하기위한작업을꾸준히해왔다.그과정중에어느덧네권의대중적역사책에이어,이번에는중국역사에서도가장역동적이었던시기를담은삼국지라는배경속에서고구려를중심으로역사적교집합을파헤쳐내어그뜨거웠던역사의한복판을오늘날재현하였다.
저서로는『발해제국연대기』,『개혁군주광종』,『연개소문전쟁』,『강조의난』이있다.

목차


삼국지의시대
황건적의난과요동그리고고구려
고국천왕과을파소의개혁프로젝트,“복지국가고구려”
고구려의내란과공손도가문
조조의오환정벌
위나라와오나라,그사이에서의위태로운외교
사마의,요동에등장하다
위나라관구검의고구려침공
재건그리고새로운수도평양
삼국지의종막,삼국시대의개막

참고자료

주요인명및용어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삼국지》는100년도채안되는기간동안수많은영웅들이등장하고,온갖속임수와잔혹함이난무하는극한의경쟁속에서어느누군가는나름대로인생의의미를찾고또누군가는사회의혼란에대한해답을모색해나가는모습을보여주는흥미로운역사를다루고있다.
p.9

194년7월,이제겨우초가을에접어들었던이무렵에갑자기서리가내려한해동안고생한농사를망치게되자수많은백성들이굶주리게되어국가의창고를개방하여긴급구제책을펼쳤다.다만이때의시혜조치는사실근본적으로문제의원인을해결하는것은아니었고,급박한상황에서의응급처치에해당하는것이었다.
p.40

결정적순간은그리멀리있지않았다.이제초겨울로접어드는10월,원소의군수물자가전장으로오고있다는첩보를투항한허유를통해입수한조조가순유와가후의적극적인지지를바탕으로급습을결정하였고,이때의판단이전황자체를바꿔놓는분수령이되었다.조조의본진을공격하려했던장합까지도항복해버리자,결국견디지못한원소와원담부자는물자들을모두내팽개쳐두고본거지로급히퇴각할수밖에없었다.이것이관도대전의전말이었다.
p.70

어쨌거나이들은천신만고끝에고구려의도움으로오나라로돌아갈수있었고,손권을만난자리에서기쁨을감추지못할정도였다고한다.손권은그들의귀환을크게환영하면서모두를교위에임명하였다.그리고다시손권은사신으로사굉(謝宏)과진순(陳恂)을고구려로보내와동천왕을선우(單于)로책봉하고의복과진귀한보물을선물하도록하였다.
p.107

226년여름5월,조비의건강상태가갑자기심각해져서아들조예(曹睿)를급히태자로삼았다.그리고운명의날인5월16일,급히호출받고온사마의는조진,진군,조휴와함께조비의유언을받았다.유서에서도조비는여전히사마의에대한신뢰를보여주었다.그리고바로다음날에그는마흔의젊은나이에너무도일찍세상을떠났다.같은날조예가황제로즉위하였고,이때사마의는무양후(舞陽侯)에봉해졌다.
p.126

관구검의공격을받게된동천왕이처음에보병과기병총2만명을거느리고비류수에서싸워승리하니위군의사망자만3천여명이었다.또다시병력을이끌고다시양맥(梁貊)의골짜기곧양구(梁口)에서싸워재차승전하였는데위군측사상자와포로가3천여명에이르렀다.
p.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