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말의 질감 (슬픔이 증발한 자리, 건조하게 남겨진 사유의 흔적 | 고유동 산문집)

낱말의 질감 (슬픔이 증발한 자리, 건조하게 남겨진 사유의 흔적 | 고유동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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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슬픔이 증발한 자리, 건조하게 남겨진 사유의 흔적”
글 쓰는 군인 고유동의 첫 산문집. 20년간 군인의 길을 걸어온 작가가 건강을 잃은 뒤, 새로운 눈으로 ‘낱말’과 ‘일상’을 직조하면서 길어 올린 50편의 이야기를 전한다. 작가는 총 대신 펜을 들고, 실체가 분명한 적 대신 허공을 배회하는 사유와 싸운다. 수많은 낱말과 일상에서 작가 자신을 본다. 그리고 깨닫는다. 사멸조차 생을 내포하고 있음을. 바로 그곳에 새로운 삶이 피어남을 온몸으로 증언한다.

작가는 좌절에 빠졌거나 심연을 헤매는 이에게 위로를 전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그러니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힘을 얻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볼 일이다. 놀라운 사유의 깊이와 폭, 삶을 예리하게 벼려내는 문체에 흠뻑 빠져 읽다 보면, 어느새 당신 앞의 진창이 단단한 아스팔트로 변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저자

고유동

결핍을궁구하는군인,
낱말과일상을직조하는수필가.

육군사관학교에서기계공학을전공한후20년간육군장교로복무했다.2016년부터2018년까지KAIST미래전략대학원에서공부하며인문학과공학적소양을쌓았고,미래전쟁에관한독창적인논문을발표하여우수논문상을받았다.2023년전국고전읽기백일장대회대통령상수상을시작으로글을쓰기시작했고,2024년계간《문학고을》등단신인문학상을수상하며본격적으로수필가로서활동을시작했다.이후낱말과일상을직조하여삶의심연을드러내는글을꾸준히발표해왔고,소재와주제를형상화하는독특한시선과건조한문체로DMZ문학상,용아박용철전국백일장등다수대회에입상했으며,2024년하반기《문학고을》최우수작가상을받았다.

목차

프롤로그해상도를높이면보이는것들


1부거칠게쪼개진표면

프링글스
살상무기
엘리베이터
팽이
바위
책장
두부
그릭요거트
망부석
스타벅스
눈송이
안개
껍질
미래학자
성벽
낙타
아귀
백지수표
사냥꾼
비석
편의점
도플갱어
마트료시카
계란프라이
귀이개


2부잘게부서진심연

수영
비명
낱말
황혼
복제
시선
삼투
색채
이인증
하드보일드
미숙
중단
점선
균열
임계점
이중나선
영원
탄생
뾰족함
희망사항
댓글
슬럼프
독파
이독제독(以讀制毒)
기원


에필로그낱말에서새로운삶이피어난다

출판사 서평

“심연을기꺼이열어젖힐의지를가진작가는얼마나귀한지,그런의지를가진작가의글을만났을때의전율이어떤것이었는지를이작품을읽으며다시금추억할수있었다는말에는과장이없다.”

이책은육군에서20년을근무한독특한이력을가진수필가의작품이다.

군인이었던경력이어째서독특하냐고한다면,그가군인의삶을떠나선택한것이글을쓰는작가이고그중에서도수필가이기때문이라고할것이다. 저자는스스로군인으로살면서‘규칙적이고몹시실천지향적인삶’을살았으며지독한일중독자에야근이일상이었다고밝히고있다. 글을쓰는일도부지런함과실천이중요하니그리괴리가큰삶일까할수도있지만,아무래도군인의삶과작가의삶을비슷한선에올려놓기는쉽지가않다. 아마책을선택하기에앞서저자의이력을살펴본독자는내가그랬듯저자가어째서그누구도쉽게선택하기어려운완전히다른길을선택하게된것일까?하는궁금증에가장시달리게될것이다.

저자는건강의문제로야근을일삼았던일중독자의삶을유지할수없다는깨달음을 얻었다고털어놓고있어서저자를안정된삶에서밀어낸것이무엇이었는지를조금이나마짐작하게해준다. 하지만왜저자가주변의모든이가뜯어말리는안정된미래를포기하고하필무엇이기다릴지모를바다로뛰어드는것을선택한것인가에대해서는의문이남는다. 내가가보지않은길,해보지않은일이나를어디로이끌것인가는우리모두가궁금하고항상아쉬움을갖고사는일이지만실제로그도전에몸을던지는사람은흔치않다. 

“이런상황이닥치면감각은몹시예민해진다. 
마음의해상도가급격하게올라가고기존에보지못하던것들을보고느낀다. 
비로소드러나는적대감의근원. 
군인의본능은투쟁으로이끈다. 
총대신펜을들고실체가분명한적대신허공을배회하는사유와싸운다.”

저자는여전히자신에게군인의본능이남아있다고말한다. 군인의본능이말미암은투쟁의일환으로총대신허공을배회하는사유와싸운다고. 그렇다면이작품은군인의글일까, 아니면군인으로살았으나이제철저히글을쓰는삶을사는작가의글일까,이도저도아니라면군인의삶을살았을뿐그저늘깊이사유하는사람의글일까? 

“아직도생생하다.이기이한바삭함은뭔가.도무지형용하기힘든짭짤한맛.한번도경험하지못한감각의공격은맹렬했고,저돌적이었다.겉으로부드러워보였던노란색탄수화물덩어리는,잔인하게도아직덜여문초등학생의혓바닥을가차없이점령해버렸다.“꿀꺽”무언가가물처럼목구멍을넘어갔다.입안의어둡고습한공간에여운만을남겨둔채.”

저자는이작품이세상속에서좌충우돌하며한없이비틀거리는이가쓴글이라는것과좌절에빠진이에게희망이되는글이기를바란다는고백으로50편의글을엮어내놓았다.이50편의글중저자가독자에게보이기를원한첫번째글은의외이면서고개가끄덕여지는작품이기도하다. 

초등학생시절부잣집친구의생일잔치에갔다가처음먹어본프링글스. 초등학생이처음먹어본프링글스의맛이준충격을묘사하는이글은당시의어린저자뿐만아니라독자에게도강렬한인상을심어주는글이다. 제목만으로는언뜻내용을예측할수없었던이작품은독자가직접프링글스를입에넣는것처럼생생한묘사와더불어맹렬한감각의공격에신을대면하는광신자의자세로무릎꿇은초등학생의모습으로인해한편의잘만든연극처럼생동감이넘친다. 

20년동안군인이었고군인의삶에몰두했던저자가작가로훈련을받지는않았을터,군인으로살았던오랜세월이있으니군인의방식으로투쟁의이야기가펼쳐지지않을까했던예상은첫번째작품에서부터보기좋게빗나갔다. 프링글스를처음맛본초등학생의이야기는곧첫경험의강렬함에대한성찰로이어진다.

수필은개인적인경험을글감으로삼아글을쓰되,저자의개인적인경험을모두가공감하는보편성으로확대해야하는글이다. 개인적이지만너무특별하거나완고해서공감을이끌어내지못하면실패하고,보편성만 글곳곳에흔하게널린글이어도실패한다. 그래서수필은어쩌면소설이나시같은문학보다도더독자와함께숨쉬는글쓰기이고적정한선을지켜내지못하면존재의가치를잃는다.

새롭고낯선것,내가쉽게가지거나볼수없었던것을처음대면했을때의강렬한기억은누구에게나있다.저자는자신이가진그강렬한처음의기억으로이야기를시작해서독자들의공감과재미를이끌어내고독자들로하여금누구나갖고있을첫경험을떠올리며미소짓게만든다.왜이작품이저자의책첫머리에등장한것인지깨닫게된순간을지나자저자의낱말은제대로방향을잡은듯좀더기운차게달려나간다. 
 
“이글이글불타는눈동자는엘리베이터의숫자를쏘아본다.마치그러면진즉에떠나버린연인이돌아오기라도하는듯.당최누군지도모를누군가를원망한다.올라가던엘리베이터가3층에서멈춘다.이정도높이면걸어다녀야하는것아닌가.아기엄마라도탔나.다시돌아오겠지하며기다리는데여지없이배반하는엘리베이터.매정하게다시올라가고,4층에서멈춘다.”

작품〈엘리베이터〉에서무거운짐을들고층층이멈추는엘리베이터앞에선채분노를삼키며온갖번뇌에시달리는저자의모습은그자체로우리자신의모습이다. 양손을압박하는무거운짐을들고두고보자두고보자벼르면서엘리베이터가내려오기만을기다리며,엘리베이터가마침내열리면상대를향해얼른날선말을꽂을준비를하던저자의곁에서서독자인우리는울컥하는긴장감으로엘리베이터가열리는걸지켜본다.

하지만저자와함께우리가끝내마주한것은그저텅빈엘리베이터. 끊어질듯말듯팽팽한긴장감이퍼덕거리던순간은빠르게치솟아오르다가덜컹하고멈춰선엘리베이터처럼당혹감이흐르는침묵을끝으로긴장의끈을가차없이잘라낸다. 수필에서솔직함은막강한무기다. 저자스스로를불쏘시개삼아독자들의흥미와공감을끌어내는일은결코쉽지않았을터,이작품에는솔직함뿐만아니라새로운형식의글에대한기대감을주는단서가있다. 

“잘들어보시라.
중요한이야기를하려한다.일단짝다리짚고,
믹스커피홀짝이며
똥배좀내밀고나서.
에헴.많이들들어보셨겠지만오늘날우리는
빠르게변화하는세상에살고있다.
‘변화’는
4차산업혁명어쩌고메타버스저쩌고
NFT어절씨구
ChatGPT저절씨구옹헤야다.”

〈미래학자〉라는제목의작품은특히눈길을끄는인상적인글이다. 시인듯도하고랩인듯도한,수필에서는찾아보기힘든형식의이글은전에없던날것의신선함을주면서도글맛이잘느껴지는리듬으로독자들을사로잡는다. 눈은물론귀에도들리는듯한리듬의글이란다년간의훈련이아닌원초적인감각으로만탄생하는것이기에,어쩌면이것은저자가작가이전의삶에서얻은강력한무기가아닐까한다.
 
이책은1,2부로챕터를나누고있는데앞선1부가일상적이면서보편적인정서를예리하면서도주저없는강렬함으로건드렸다면2부는저자본인의심연으로독자를한층더깊이끌어들인다. 
 
“색채의장엄한순환에서생명의유구한순환을느낀다.저마다의사연을품고분주하게움직이는사람들의활력이곧인생임을다시한번깨닫는다.삶이란정지가아닌순환.움직이고또움직여야만실현되는것임을이렇게배운다.분초단위로의미를새기고또새기며사는삶이란얼마나아름다운가.”

자신의심연을내보이는일은작가에게는숙명이다. 작가는끊임없이자신의내면을들여다보되,그관찰의결과를독자와나누어야만한다. 그것이정련되지않은거칠고투박한,심지어얼굴붉어지는부끄러운것이라해도그러하다. 자신의심연은감추고드러내고싶은것만전시하는글에서독자는심연을드러낼용기를내지못한작가에게연민은느낄지언정정작필요한위로와공감은얻지못한다. 심연을기꺼이열어젖힐의지를가진작가는얼마나귀한지,그런의지를가진작가의글을만났을때의전율이어떤것이었는지를이작품을읽으며다시금추억할수있었다는말에는과장이없다.
 
“글쓰기란마음을산산조각내는일이아닐까.얇은두께의유리창을콘크리트바닥에내동댕이쳐서바스러뜨리는일.분자단위로말끔하게해체된마음은그제야제모습을드러낸다.이는부끄러워할일이아니다.
온전히드러난생각.혹자는이를두고다른사람앞에서벌거벗은기분이라토로하지만,‘쓰는사람’은언제나옷을입고있다.글로아무리까발려봐야,독자가받아들이는것은‘벌거벗겨진사람’을보는것이아니라‘종이에박힌활자’를보는것이니말이다.”

저자가고된시간을넘어이작품을독자들에게내보이며갖는바람은소박하다. 좌절에빠진이에게는희망을,심연을헤매는이에게는한줄기빛이되기를. 그리고자신의작품이독자의발을붙잡는무른길을단단한길로바꾸어줄수있기를. 이전에저자가규칙과질서의삶을살았다면그삶에서떠난저자는놀라울만큼기존의질서를벗어나새로운삶의길에안착했다.
 
저자의낱말은‘진화’중이며,독자는그진화의목격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