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가 고래를 삼킨 날

멸치가 고래를 삼킨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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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고래 한 마리 손바닥에 올려놓고 미소 짓는 날’을 그리는
원재훈의 다섯 번째 시집
『멸치가 고래를 삼킨 날』은 시인이자 소설가인 원재훈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표제작 「멸치가 고래를 삼킨 날」을 비롯해 4부에 걸쳐 총 70여 편의 시를 담은 이 시집은 파람북 시집 시리즈 ‘파람의 시’ 그 두 번째 권이다.
시집은 서시 「길」로 문을 열며, 제1부 ‘바다로 가는 꿈’, 제2부 ‘타인의 시’, 제3부 ‘멸치가 고래를 삼킨 날’, 제4부 ‘너는, 잘 살아라’의 구조로 이루어진다. 엄마와의 관계, 타자와의 만남, 바다와 물고기를 매개로 한 생의 탐구, 그리고 타인과 세상을 향한 포용으로 이어지는 ‘흐름’의 서사다.
시인은 그 어느 때보다 가까운 곳에서 이 시들의 소재를 주워 들었다. 점점 작아지는 어머니의 모습, 젊은 날의 벗과 나누었던 기억들, 그리고 바닥을 기다가 마침내 하늘로 오르는 생명의 이치까지, 화려한 수사나 관념의 유희 없이 삶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건져 올린 말들로 시어를 이룬다.
표제작 「멸치가 고래를 삼킨 날」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현실이 되는 날을 꿈꾸며, 작고 하찮아 보이는 존재가 품은 가능성을 역설적으로 노래한다. “바다에서 밀집 대형으로 항해하는 멸치는 / 고래처럼 크다”(「멸치의 힘」)에서 왜소한 것들의 연대와 그 힘을 발견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시종일관 놓지 않고 있다.
시인은 후기에서 “시는 땅에 새겨진 생명의 지문”이라고 쓴다. 이 시집은 시인이 살아온 세월의 지문이며, 동시에 우리 각자가 자신의 지문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거울이기도 하다.
저자

원재훈

시인,소설가.《세계의문학》에시「공룡시대」를,《작가세계》에장편소설『망치』로등단했다.시집『딸기』,『그리운102』,『낙타의사랑』,『사랑은말할수없는것을말하라하네』.장편소설『망치』,『연애감정』외소설집다수.산문집,『시의쓸모』,『고독의힘』,『나무들은그리움의간격으로서있다』,『네가헛되이보낸오늘은어제죽은이가그토록그리던내일이다』외다수의책을냈다.이시집은시인의5번째시집이다.

목차

서시006

제1부바다로가는꿈
그냥,쉬어013│그냥,내버려두기014│사랑을이토록사랑하지만016│유행가를들어요018│엄마는이제시가되었어요020│엄마가보고싶은엄마022│부엌024│나를떠나는나025│바다로가는꿈026│좋은날031│자주보다보면032│담수淡水의시간034│끈036│먼지038│새가지나간자리040│이,별이빛나는밤에042│가시장미044│바구니046│감047│흑요석048

제2부타인의시
그림엽서-시인황성우에게051│지네052│지네를밟아버렸다054│잠자리눈056│고드름058│더덕060│이동의습관062│타인의시064│껍데기067│달팽이집072│지리산뱀사골에무엇을두고왔을까?075│껍질078│역사의껍데기080│소금의시학082│무서운습관084│바람의모습086│사랑의습관088│항아리090│참불편한습관092│눈이내려야만보이는것들094│봄이왔다096│묵주의시간098

제3부멸치가고래를삼킨날
눈부신그대101│심해어深海魚102│지느러미104│고래106│바다한마리108│멸치가고래를삼킨날110│멸치의힘112│뼈와가시114│썰물116│환생118│바다의눈120│테트로도톡신-복어121

제4부너는,잘살아라
신호등125│신의눈물126│단풍위로내리는눈128│누가민들레를밟고지나갔을까130│나비할머니132│땀134│첫눈135│역사의뼈138│너는,잘살아라140│상처142│새부리144│나와비와꽃146│선물148│하루149│꽃피는자리150│봄152│도토리뚜껑153│섬,꽃잎154│시는156│별을심은사람158│서해-時節因緣160

후기나의시이야기161

출판사 서평

세계삶의가장낮은곳에서발견한,
노동하는시인의언어들

시인원재훈이다섯번째시집을들고돌아왔다.전작들이사랑과고독,자연의서정을넓게펼쳐보였다면,이번시집은방향이다르다.확산보다는침잠,관조보다는접촉인데,언어는삶의표면을유려하게흐르는대신그안쪽으로파고든다.시인자신이후기에서고백하듯,“시궁창에손을넣어야”쓸수있는시들이다.
이시집에서가장먼저눈에띄는것은형식의이질성이다.짧은행의시와긴산문시가교차하고,때로는한편안에서운문과산문이섞인다.「껍데기」「타인의시」「나비할머니」「너는,잘살아라」같은작품들은특정기억이나장면을불러와거기에시적통찰을얹는산문시의형태를취하는반면,「고드름」「먼지」「선물」은극도로압축된심상중심의짧은시들이다.이두가지방식이한부(部)안에서,심지어인접한작품들사이에서교차하는탓에시집전체는균질한음색대신불균등한리듬을갖는다.이것이이시집의긴장감이다.

이시집은‘바닥’과‘발광(發光)’이라는두이미지에관통당한다.시인은집요하게낮은곳을찾는다.바닥을기는지네,먼지가쌓인창문과마루,썰물로드러난뻘밭,빛이닿지않는심해.그러나이모든낮은곳들은단순한비천함의비유가아니라,발광의조건이다.
이역설이가장명료하게구현된작품이「심해어深海魚」다.빛이닿지않는심해에살다결국눈이퇴화한물고기는“여기는어둡지않다/그냥보이지않을뿐”이라는자기인식에서“제몸을스스로빛으로만드는/오묘한진화의방향성”으로서의발광에도달한다.빛을받지못하는존재가빛의원천이되는역설,그것이시인이시쓰기를바라보는방식이자,이시집전체가지향하는미학이다.
「지네를밟아버렸다」에서도같은구조가엿보인다.밟혀죽은지네가새겨진자리에서“작은시내가흐르고,그시내가강으로흘러들어갈때,/나비가떼를지어하늘로날아오른다.”죽음이생명의조건이된다는이논리는일종의윤회라기보다,가장낮고처참한것에서가장눈부신것이출현한다는시인특유의세계인식이다.후기에서시인이이시를쓴날이5월18일임을밝히면서1980년광주를언급하는대목은이이미지가개인이라는차원을넘어역사적차원까지열려있음을보여준다.

이시집에서가장무게있는시들은어머니를다룬작품들이다.시인은여기서언뜻시라는수단을배반하는것처럼보인다.
「엄마가보고싶은엄마」는그방법론이가장잘드러나는작품이다.치매를앓는어머니가자기어머니를찾는대화를시인은거의연극대본처럼받아적는다.“엄마가보고싶구나/엄마는엄마의엄마가보고싶다고한다.”감정을추상화하는대신,대사의구조자체를시화(詩化)한다.시인을알아보지못하는어머니가자신의어머니를부르는그장면안에세대를가로지르는그리움의연쇄를압축시킨다.
「부엌」에서는“끼니때마다밥을지어주신,/어머니의힘으로/긴세월시를썼는데//어머니에대한/시,한,편,/없네.”라는자기고발이등장한다.밥짓는어머니를존재론적배경으로삼아시를써온아들이,어머니가아들을알아보지못하는지금에야비로소어머니를시의주어로세운다.늦가을귀뚜라미울음소리로끝나는이시는설명을모두잘라낸자리에서오히려가장많은것이말해진다는것을보여준다.

제3부'멸치가고래를삼킨날'은이시집에서가장응집된부(部)로,바다와물고기를매개로생의다양한국면을알레고리화하며관념들을긴장시킨다.
표제작「멸치가고래를삼킨날」은불가능한것들의목록이다.“내동생복권당첨되고,/작고하신아버지다시일어나서/개성고향집에서/말타고달리는날.”이처럼지극히구체적이고,어쩌면시시할정도로단순한소망들이중첩되어고도의추상성을이룬다.기적이불가능하다는사실을껴안으면서도,한편으로는그것을꿈꾸는모순된마음이타자와의경계를무너뜨리는첩경이된다는,더없이시적인이상이짧은연들사이에축약된다.
「바다의눈」은이부에서가장독특한형식을취한다.운문이아닌산문한단락으로만이루어진이작품은고래의눈을통해존재의역설을탐색한다.너무큰것을보기에아무것도보지않는다는역설은,작은것에집착하지않는것이오히려전체를보는조건이된다는인식이다.시인이언어를다루는방식에대한메타적발언으로도읽을만하다.

후기「별빛이지구에오는시간을」에서시인은릴케가세잔의편지에서발견한문장,“나는매우느리지만매일발전하고있다”와오르테가이가세트의명제,“나는나와나의환경이다”를두축으로삼아자신의일상을고백한다.느리지만매일,자신이살아온환경을정직하게받아들이며쓰는것.
“순간적으로떠오른영감은하늘의별빛이아닙니다.온전히한낮의태양을견딘자에게다가오는축복입니다.”「소금의시학」에서“세상바닷물을다끓여내야소금한줌이나오는거야”라고했던것과같은인식을시인은여전히오래붙들고있는것이다.또한시인은아울러단언한다.“시는땅에새겨진생명의지문입니다.”마치지문앞에서의탐정처럼,시인은요양원의어머니,요절한벗들,바닥을기는지네,횟집아줌마의칼질을골똘히관찰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