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엄마도아내도아닌
그림그리고글쓰는할머니윤명숙의‘나혼자산다’
예순이넘은나이에글쓰기를시작해67세의나이로문단에등단,83세의나이로첫책『나로말할것같으면』을출간하며‘인생에늦은때란없음’을몸소증명해낸작가윤명숙의신간『명랑한독립』이출간되었다.2023년,남편박서보화백을갑작스레떠나보낸윤명숙작가는65년간의부부생활끝에한순간혼자가된다.동시대의다른많은여성들처럼이렇다할사회생활한번해보지못한채스무살의나이로아내이자엄마가되었고,그후한국현대미술계의거장이라는화려한수식어로내내빛났던남편의곁에서자신의삶을뒤로한채내조와육아에만전념하며묵묵히살아온터였으므로,남편이세상을떠나고서야비로소홀로서기를해볼결심이섰다.그리하여남은생은자신들과편히사시자는아이들의만류를뿌리치고시니어하우스(실버아파트)입소제한연령마지노선인만85세를턱걸이로통과해겨우이사를했다.
생의끝을향해있는나이에새로운환경과이웃에적응하기란쉬운일이아니었다.하루하루쇠락해가는몸과정신으로매일식당에서함께밥을먹을이웃친구를새로사귀어야했고,(아이들의성화에못이겨반쯤은강제로)자동차와운전면허증을반납하고‘어르신무료교통카드’를이용해외출했다집으로돌아가는길을다시익혀야했다.무엇보다내가어떤사람이었는지,무엇을좋아하고잘했는지,무슨일을하고싶어하는사람이었는지를알고싶었고,누구의아내도엄마도아닌‘윤명숙’이라는이름자앞에어떤타이틀을남길지만큼은스스로정하고싶었다.그래야만이늦깎이독립도의미를찾을수있을터였다.
엄마의그런아슬아슬한도전을바라보는딸의마음은조마조마할수밖에없었다.그렇다고당신의건강을생각하시어그저자녀들손길닿는집안에서가만히만계시라고할수는없는노릇이었다.엄마가내일맞이할일상이,자신에게도곧들이닥칠미래였기에.아흔을바라보는나이가되어서야온전한한개인으로자유롭게살아보겠다결심한엄마에게딸로서해줄수있는것이라고는결국응원과격려뿐이었다.그렇게딸은어린딸을놀이터에내보내던마음으로,엄마가이사한시니어하우스에매주들러안부를물으며새로운인생을개척해가는엄마의최대조력자를자처하기에이른다.
인생4막에다다른나이에도조용한열정과활기를잃지않고오랜삶으로다져온노련함으로,때로는조금뻔뻔해질수밖에없는늙은몸으로자기만의삶을개척해나가는윤명숙작가와,한국전쟁부터챗GPT까지그모든변화와역사를온몸으로통과하고있는엄마를존경하고응원하는마음으로,또이윽고자신도맞게될노년을기대하는마음으로엄마곁에선박승숙작가,이모녀가담담히완성해가는이중주는애틋함을넘어감동까지안겨준다.
누구나노인이된다
우리의미래에먼저당도한어른의지혜와위트
아들딸에게큰소리치며호기롭게옮긴새둥지건만적응해나가기는여러모로쉽지않다.윤명숙작가가새로닻을내린시니어하우스는평균나이87세의노인들이350세대규모로모여사는아파트였다.말그대로노인들만의세상.작가는곧머리허연학생들이가득한학교에새로전학간전학생의심정이된다.무엇보다새로운이웃과가까워지기가자신앞에놓인크나큰과제였다.일반아파트라면이웃과제대로된인사한번나누지않고이사들고나가기가흔한요즘이라지만,시니어하우스에서는이야기가달랐다.공동식당에서한식탁에앉아얼굴을마주하고삼시세끼밥을함께먹어야했으므로웬만한철면피가아니고서는억지로라도인사를나눌수밖에없었다.그렇게작가는80대의나이에식당짝꿍을찾고,새로운관계맺기를시도한다.그과정이간단했을리없다.남편,아이들과함께생활하던때는인간관계를굳이적극적으로맺지않아도항상주변에사람들이북적였고,굳이새로운관계를찾아나설필요가없었다.그때는의식하지못했지만스스로관계를맺고의미를부여할기회가없었다는뜻이다.그런데이곳에서는달랐다.먼저손을내밀고인사하며다가가야했다.거기다이곳이웃들은몸에병을안고있거나살아온긴세월동안나름의사연을간직해온사람들이었다.가벼운치매나파킨슨이진행되고있는경우도드물지않았다.멀쩡해보이던사람이예기치못한행동을하는일도비일비재했다.순간‘이제와서평생안하던짓을하는게무슨의미가있나,그동안못배운대인관계기술을습득해서익숙해질때쯤이면내가이세상에없을지도모르는데?’주춤대는마음이앞섰다.그러나작가는특유의호기심과다정함으로,긴세월쌓아온노련함으로자신앞에닥친새로운과제들을해결하며새로운인간관계를맺어나간다.동시에자신도몰랐던대인관계안에서의자아와성격,취향을발견하며즐거움을느낀다.얼마남지않은시간이라도열심히좌충우돌하면서하나라도더배우고죽는게낫다는작가의결론이자작심은,그의명랑한마음만큼이나명쾌하다.
작가는뒤늦게시작한글쓰기에도열정을다한다.이제식당에서키오스크를사용하거나앱으로택시를호출하기도버거운인지력이지만매일같이노트북을열고일상에서얻은글감을통해생각과감정을부지런히정리해나간다.처음에는그저기록을남기고싶어시작한글쓰기였건만사위어가는기억들을조심조심들어내어정리하고손질하는과정은,결국작가에게자신이어떤사람인지되짚어보게하는자기성찰이자자기치유과정이었다.그렇게글쓰기는자신을비추는거울이자자신을가두고있는생각과습관의테두리를벗어나려는작은시도가되어주었고,오랜시간갇혀있던자기만의우물에서벗어나조금이나마밖을볼수있는창이자통로가되었다.나아가작가는여러나이대의사람들과함께하는글쓰기모임을통해타인에게자신의글을내보이고비평을받아들이며계속해서글의완성도를높여나간다.그런일상을엿보고있노라면꺼져가는몸과두뇌에도배움에는때가없으며,성장욕과창작욕역시결코끝이없다는사실을실감하게된다.
시들어가는몸과마음에도꺾이지않는
주체적인삶을향한의지
누구나한때어린이였듯누구나언젠가는노인이된다는걸,사람들은가끔잊고산다.그래서노년기의생활을나와는상관없는일로,아직은머나먼일로,심지어자신은절대겪지않을일로여긴다.그러는사이우리사회이웃노인들의존재는지워지고사라진다.새로운노년의일상을소박하면서도서정적으로그려낸윤명숙작가의글을따라읽다보면낯설게만느껴졌던나이듦과노년이지금우리가살아가는삶과크게다르지않다는걸깨닫게된다.그리고그깨달음은곧우리가맞을노년에대한안도와희망으로이어진다.
흐린눈과귀,마음처럼움직여주지않는팔다리,언제쓰러져도이상하지않을심장으로도고갈되지않는지적호기심과성장욕으로마지막까지주체적인삶을살고자하는의지,그의지야말로우리시대의어른이다음세대에게물려줄수있는최고의유산이아닐까.끝없는배움과깨달음,즐거운사색과담담한농담으로노년의삶을씩씩하고명랑하게채워나가는윤명숙,박승숙작가와함께언젠가만나게될나만의즐거운노년을상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