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종종묻는다.
무대는언제끝나는가.
막이내려오면끝나는가,박수가멎으면끝나는가,아니면더이상몸이예전처럼움직이지않을때끝나는가.내대답은언제나같다.나의무대는끝나지않았다.무대는내가살아온시간그자체였다.내가숨쉬며버텨온자리였고,나를나로만들었던유일한언어였다.
나는춤으로태어났다.
말을배우기전에몸이먼저세상을기억했다.기쁨보다먼저고통을몸으로배웠다.사랑보다먼저인내를몸으로익혔다.춤은나에게직업이기이전에생존이었고,예술이기이전에삶의방식이었다.넘어질때마다다시일어나는법을가르쳐준것도춤이었고,길을잃을때마다나를다시불러세운것도춤이었다.
이책은성공담이아니다.
찬란한기록만을모아놓은연대기도아니다.오히려수없이흔들리고,의심하고,버티며,포기하고싶었던순간에대해조곤조곤이야기하고있는것에가깝다.누군가의그늘에서벗어나기위해몸부림쳤던시간,내방식이틀렸다고손가락질받던순간들,세상이나를밀어낼때끝까지나를붙잡고있었던단하나의끈,그모든이야기가여기에있다.
나는오래도록한길을걸어왔다.
그길은늘환하게열려있지않았다.때로는눈보라속이었고,때로는아무도알아주지않는외길이었다.그길위에서나는나만의질문을던졌고,나만의답을몸으로만들었다.그렇게태어난것이‘바기본’이었고,그렇게만들어진모든무대가나의춤이었다.
돌이켜보면나는늘경계에서있었다.
전통과창작사이에서,교육과예술사이에서,한국과세계사이에서,여자로서의삶과무용가로사는삶사이에서.어느한쪽을버리지못해늘불편했지만,바로그불편함이나를앞으로밀어냈다.나는타협하는대신질문했다.멈추는대신몸을던졌다.이해받기보다는끝까지밀고나갔다.
나는안다.춤은사라지지않는다는것을.
무대에서내려와도,극장을떠나도,국경을건너도,춤은몸안에남아또다른무대를만든다는것을.지금,이글을쓰는이순간도,나는여전히춤을추고있다.다만동작이문장이되었고,호흡이기억되었을뿐이다.
이책은내인생의무대기록이다.
빛났던순간만이아니라,빛을견뎌야했던순간들까지포함한무대.그럼에도끝내춤을선택했던한인간의이야기다.춤은나의영원한고향이었고,지금도그렇다.나는오늘도,조용히무대위에서있다.
책속에서
“너는참특별한아이였단다.”
어머니의이한마디는긴세월을지나내삶전체를관통하는예언이되었다.내가태어난1943년2월21일,세상은지독한꽃샘추위로몸살을앓고있었다.그런데기이하게도내가태어나던그순간,맹위를떨치던추위가언제그랬냐는듯사그라들었다고한다.
“남들은추위에어깨를움츠릴때도너는팔을위로뻗었단다.마치얼어붙은세상을향해춤을길어올리는아이처럼.”
(p.17중에서)
선생님은놀란표정으로내동작을지켜보셨다.
그리고천천히말했다.
“얘는…천재예요.”
그말은축음기에서흘러나오는음악보다도더선명하게내
귀에꽂혔다.춤을추기시작한이후,처음으로들은단어였다.
‘천재.’그단어는그날이후,오랫동안나를이끌고다녔다.나
는한달배울것을이삼일만에배워버렸다.큰삼촌은그저놀
란눈으로나를바라보았다.그곳에서춤이나를이세상어디
든데려갈것이라는기대가생겼다.나는한번만보고도동작
을정확하게따라할수있었다.
(p.62중에서)
1961년6월,한국땅을다시밟았을때,나는내가떠났던자리로그대로돌아올수있을거라믿었다.하지만세상은그사이,전혀다른얼굴이되어있었다.5·16이후학교는달라져있었다.출석일수는예전처럼더이상‘봐줄수있는것’이아니었다.
교장이할수있는문제가아니었다.문교부에서서류를직접들여다보는시대가된것이다.교장도,학교도,누구하나내편이되어줄수없었다.고등학교2학년으로다시다니라는통보를받았을때,나는말문이막혔다.
(p.145중에서)
배숙자라는이름으로고등학교도졸업하지못했고,대학에도가지못했지만그이름이너무많이알려진탓에,큰삼촌도감히이름을바꿀엄두를내지못하셨다.나는혼자틈만나면작명소를찾아다녔다.좋은이름은쉽게나오지않았다.
그러던중운명처럼새이름이정해졌다.정혜.1969년,나는배정혜로다시태어났다.이름이바뀐순간,마음속깊은곳에서도무언가조용히변하고있었다.배숙자였던시절이가고배정혜가된나는,그이름만으로도새롭게숨을쉬는기분이었다.
(p.166중에서)
그해가을,국립극장해오름극장에서거대한막이오르기직전,나는무대뒤어둠속에서거칠게뛰는심장을진정시켜야했다.발령받은그해에바로예술제를올린다는것,그것도고작중학교1학년과2학년뿐인어린아이120명을데리고국립극장이라는대무대를채운다는것은무모함에가까운도전이었다.
사실그때나는인생의중대사인결혼날짜를받아놓은상태였다.하지만내머릿속에는오직아이들의동선과춤사위뿐이었다.120명전원이한국무용부였던시절,그아이들하나하나를무대위에서빛나게하려면내온신경을그곳에만쏟아야했다.결국나는결혼식을포기했다.남들에겐일생일대의사건이었을결혼식을미루고나는연습실바닥에앉아아이들의땀방울을지켜보는쪽을택했다.
(pp.209-210중에서)
비로소,나의예술이된순간
한해가마무리되어갈즈음,뜻밖의소식이전해졌다.
〈타고남은재〉가그해최고의무용작품으로선정되었다는이야기였다.동아일보를비롯한여러지면에작품명이실렸고,무용을넘어한국창작예술사에서도최우수작으로꼽혔다는평이이어졌다.그모든기록을제대로남겨두지못한것이못내아쉽다.그때나는자료를모아두는법도,역사를정리하는법도몰랐다.
(p.247중에서)
“한국무용의양식정착과무대화성공은큰수확.배정혜씨의<타고남은재>는한국무용의식화및무대화작업에성공한예술정신이깃들어진올해의큰수확이다.”
(1977.12.중앙일보박금옥기자)
(p.249중에서)
“배정혜예술은멋의차원이아닌방법론에있다.이는한국춤고전미학에의도전같으면서도이를보완,발전시키는새해석으로보는것이옳다.그리하여앞으로제2,제3의방법론이나타날것이자명한일이며,우리춤의미래상의방향이발레적안경만을통해서보아온우리춤의현대화로부터돌려질수있다는훌륭한증거를보인것이다.”
(1978.11.신동아조동화)
(p.251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