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그래, 죽어야겠다. 딱 1년만 놀고!”
해금 들고 나선 걸음 위에서 찾은 행복의 사잇길
해금 들고 나선 걸음 위에서 찾은 행복의 사잇길
고등학교 시절 모든 시험에서 국어만큼은 백분위 100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자연스레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고 고전시가부터 국문학사까지 교재를 달달 외울 정도로 행복했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나중에 학생들을 상담할 때 도움이 될까 싶어 심리학까지 복수 전공했다. 모두 ‘다른 사람들은 다 떨어져도 너는 한 번에 붙을 거다’라고들 했다. 몇 년 후면 멋진 국어교사가 되어있으리라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 자신조차도.
그러나 첫 시험에서 소수점 둘째 자리 차이로 떨어졌다. 두 번째, 세 번째도 그랬다. 네 번째, 다섯 번째… 몇 번인지도 모를 ‘불합격’ 결과를 보던 날. 길고 간절했던 걸음을 이제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기대는? 교사가 되겠다 했을 때도 ‘좀 더 공부해서 교수나 장관이 되는 게 어떠냐’고 하셨던 분들이다. 그렇지만 어느새 나는 국어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세상 쓸모없는 사람이 돼있었다.
죽어야겠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죽으려고 하니 10대, 20대 전부를 좁디좁은 독서실 칸막이에서 날린 게 미치도록 억울했다. 그래서 죽기 전에, 1년만 놀아볼 생각으로 해금을 들고 무작정 거리로 나왔다. 그러다 알게 됐다. ‘행복’이란 진짜 목적지에 나는 아직 한 걸음도 내딛지 않았다는 걸.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는 ‘내 길’이 실은 ‘내 길’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내 길과 행복은 탄탄대로처럼 보이는 저곳에 있을 줄 알았건만, 조그만 사잇길이 실은 훨씬 더 멋지고 행복한 ‘나의 길’이었다는 걸 말이다.
꿈꾸던 교사는 되지 못했지만,
누군가의 하루를 위로하고 연주로 마음을 건네는 사람이 되기까지
칙칙한 옷만 입고 보낸 젊음이 아까워 화사한 한복을 입고, 유일하게 다룰 줄 아는 악기인 해금을 들고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누가 욕하면 어떡하지? 경찰이 오면? 비웃으면? 무서워…’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난 죽을 거니까. 떨리는 마음으로, 눈을 꼭 감고 첫 곡을 마쳤다. 사방이 고요하다. 하지만 곧 정적을 깨고 수많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아무도 나를 비웃지 않았다. 몇몇 분들은 왜 팁 박스가 없냐며 손에 억지로 돈을 쥐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거리 공연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거리 연주를 위해 여러 오디션도 보았다. 그리고 그해, 지원한 오디션들에 전부 ‘합격’했다. 합격은 임용시험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합격한’ 연주자가 되었다. 그렇다고 마냥 꽃길만 펼쳐진 건 아니었다. 술 취한 아저씨들이 무대에 난입해 껴안고 입을 맞추기도 했고, 국악 전공자들이 대놓고 멸시의 눈빛과 말을 보내기도 했다. 장소를 제공해 주는 것만 해도 어디냐며, 돈 한 푼 주지 않는 무대에 서보기도, 먼 지방 공연을 갈 때면 공연비보다 왕복 차비와 숙식비가 훨씬 더 많이 나와 허탈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보다, 공연을 듣고 감동했다며 눈물을 글썽거리거나 잘 들었다며 따뜻한 말 한마디, 눈빛 한 번 보내주시는 분들이 훨씬 더 많았다. 좌절하고 우울해하기보다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날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해의 세밑, 매년 하는 ‘혼자만의 송년회’를 했다. 1년간 쓴 다이어리와 일기를 보며 한 해를 돌아보는 것이다. 눈이 창밖에 가득 펼쳐진 카페에 앉아 일기장을 꺼내며 생각했다. 이제 계획대로 죽어야겠다. 어떻게 죽어야 덜 아플까. 하지만 일기장을 읽으면서 조금 아쉬워졌다. 이렇게나 행복했는데, 이대로 끝내버리기엔 좀 아깝다. 그럼 삶이 재미없어질 때까지만 살아볼까? 나는 10여 년이 지난 오늘도, 해금 연주자로 재미있게 살고 있다.
그러나 첫 시험에서 소수점 둘째 자리 차이로 떨어졌다. 두 번째, 세 번째도 그랬다. 네 번째, 다섯 번째… 몇 번인지도 모를 ‘불합격’ 결과를 보던 날. 길고 간절했던 걸음을 이제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기대는? 교사가 되겠다 했을 때도 ‘좀 더 공부해서 교수나 장관이 되는 게 어떠냐’고 하셨던 분들이다. 그렇지만 어느새 나는 국어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세상 쓸모없는 사람이 돼있었다.
죽어야겠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죽으려고 하니 10대, 20대 전부를 좁디좁은 독서실 칸막이에서 날린 게 미치도록 억울했다. 그래서 죽기 전에, 1년만 놀아볼 생각으로 해금을 들고 무작정 거리로 나왔다. 그러다 알게 됐다. ‘행복’이란 진짜 목적지에 나는 아직 한 걸음도 내딛지 않았다는 걸.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는 ‘내 길’이 실은 ‘내 길’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내 길과 행복은 탄탄대로처럼 보이는 저곳에 있을 줄 알았건만, 조그만 사잇길이 실은 훨씬 더 멋지고 행복한 ‘나의 길’이었다는 걸 말이다.
꿈꾸던 교사는 되지 못했지만,
누군가의 하루를 위로하고 연주로 마음을 건네는 사람이 되기까지
칙칙한 옷만 입고 보낸 젊음이 아까워 화사한 한복을 입고, 유일하게 다룰 줄 아는 악기인 해금을 들고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누가 욕하면 어떡하지? 경찰이 오면? 비웃으면? 무서워…’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난 죽을 거니까. 떨리는 마음으로, 눈을 꼭 감고 첫 곡을 마쳤다. 사방이 고요하다. 하지만 곧 정적을 깨고 수많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아무도 나를 비웃지 않았다. 몇몇 분들은 왜 팁 박스가 없냐며 손에 억지로 돈을 쥐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거리 공연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거리 연주를 위해 여러 오디션도 보았다. 그리고 그해, 지원한 오디션들에 전부 ‘합격’했다. 합격은 임용시험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합격한’ 연주자가 되었다. 그렇다고 마냥 꽃길만 펼쳐진 건 아니었다. 술 취한 아저씨들이 무대에 난입해 껴안고 입을 맞추기도 했고, 국악 전공자들이 대놓고 멸시의 눈빛과 말을 보내기도 했다. 장소를 제공해 주는 것만 해도 어디냐며, 돈 한 푼 주지 않는 무대에 서보기도, 먼 지방 공연을 갈 때면 공연비보다 왕복 차비와 숙식비가 훨씬 더 많이 나와 허탈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보다, 공연을 듣고 감동했다며 눈물을 글썽거리거나 잘 들었다며 따뜻한 말 한마디, 눈빛 한 번 보내주시는 분들이 훨씬 더 많았다. 좌절하고 우울해하기보다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날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해의 세밑, 매년 하는 ‘혼자만의 송년회’를 했다. 1년간 쓴 다이어리와 일기를 보며 한 해를 돌아보는 것이다. 눈이 창밖에 가득 펼쳐진 카페에 앉아 일기장을 꺼내며 생각했다. 이제 계획대로 죽어야겠다. 어떻게 죽어야 덜 아플까. 하지만 일기장을 읽으면서 조금 아쉬워졌다. 이렇게나 행복했는데, 이대로 끝내버리기엔 좀 아깝다. 그럼 삶이 재미없어질 때까지만 살아볼까? 나는 10여 년이 지난 오늘도, 해금 연주자로 재미있게 살고 있다.
해금의 말들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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