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사소한 별리 (정말로 행복했던 순간은, 그 순간들이 사라진 후에 찾아온다)

이토록 사소한 별리 (정말로 행복했던 순간은, 그 순간들이 사라진 후에 찾아온다)

$14.00
Description
다양한 방법으로 탈주를 도모하고, 위반을 꿈꾸는 소시민 같은 존재들의 이야기
“모든 사랑은 부서진 인연만을 남긴다”
‘별리’를 통해 ‘부서진 인연’으로 반짝이는 일곱 편의 중단편 소설
2023년 〈문학수첩 신인문학상〉(중편소설 부문)을 수상하고, 2024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소설 부문)에 선정된 최석규의 소설집, 《이토록 사소한 별리》가 문학수첩에서 출간되었다. 촘촘한 문장으로 인간이 지닌 모순의 간극을 관조하고, 갈수록 복잡해지는 시스템 속에 선과 악이 이질적인 형과 색으로 변하는 사회상을 탐구해 온 작가는 《이토록 사소한 별리》에서 일상에서 조용하게 금기를 위반하며 욕망을 꿈꾸는 인물들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내 안의 문어〉에서 화자인 중배는 조경업 분야에서 일하기를 소망하며 조경업 자격증을 취득하기 전에 장애인 활동지원사로 당장의 밥벌이를 하고 있다. 복지사가 중배에게 담당자로 배정한 장애인은 우연찮게도 같은 대학을 다녔던 지선이다. 대학 시절부터 탱고 무용수로 유명했던 지선은 혼자 기동을 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이 되어있다. 십수 년 만의 조우에 놀란 중배와 달리, 지선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맞이한다. 중배는 그녀와의 만남이 석연찮은 느낌을 받지만, 차츰 그녀와 그녀의 현실에 몰입하게 된다.
2024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인 〈계단 아래 우리〉에서는 음악을 전공하고 오디션 프로그램에도 숱하게 도전했지만 결국 음악을 그만두려고 하는 기타리스트가 등장한다. 경제적으로도 궁핍하게 살아가는 그는 친구의 소개로 하룻밤만 보내면 되는 ‘생동성 실험’에 참가해서 30만 원을 벌 작정을 한다. 실험실에 들어간 그는 그림에 집착하는 내성적인 또래의 여자를 만나 새롭고도 낯선 현실을 마주한다.
〈증발〉에서는 자본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금융업계에서 최고 애널리스트로 잘나가는 남자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다. 행방이 묘연해진 애널리스트의 친구이자, 전직 형사로 현재 흥신소를 운영 중인 주인공은 애널리스트 아내로부터 남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오랜 친구의 행방을 좇는 그는 예사롭지 않은 점들을 발견한다.
〈내일은 해피 엔딩〉에서 어느 잡지 기자는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등진 세 남녀의 녹취가 담긴 녹음기를 전달받는다. 녹음기 속에는 인터넷으로 친분을 쌓은 세 남녀가 한적한 국도변의 펜션을 찾아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옥상정원〉은 오랜 세월 친구 사이인 중년 남성 준성과 창수가 등장한다. 창수는 공사현장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준성에게 전화해서는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사실을 고백한다. 이 소설은 창수와 불륜 상대인 ‘유리’의 관점을 오가며 둘의 심리를 그려나간다.
〈내 친구 긴코〉에서 ‘나’는 산책을 결심한다. 오랜만에 외출을 감행하는 듯한 나는 휴대전화기마저 챙기지 않고 집을 나선다. 골목길을 나서며 이제 볼 수 없는 친구 영석을 떠올리며 그와 함께했던 과거를 회상한다. 회상 속에는 차마 쉽게 털어놓지 못할 서글픈 사연이 담겨있다.
2023년 문학수첩 신인작가상 수상작 〈세상의 끝, 거북이, 자그레브 박물관〉은 이 소설집에서 유일한 중편소설이다. 주인공 진석은 중년 남성으로 식물인간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아내로부터 도망하다시피 나와, 앞날이 불투명한 의료기 부품 회사에 입사하여 뮌헨에 지사장으로 파견되어 있다. 최저가 덤핑 가격으로도 판매가 쉽지 않은 열악한 판매 시장에서 근근이 버티고 있는 그에게 순수했던 20대 시절 사랑했던 여자를 닮은 묘령의 젊은 여성이 나타난다.

일곱 편의 소설을 관통하는 것은, 소설집의 제목으로도 표현된 ‘별리’이다. 〈세상의 끝, 거북이, 자그레브 박물관〉에서 등장하는 문장인 ‘세상의 모든 사랑은 부서진 인연만을 남긴다’는 소설 속 인물들이 겪는 사건을 통해 독자의 머릿속에 뚜렷하게 각인된다. 부서진 인연은 각 소설에서 다양한 양태를 띠고, 의미를 유지한다.
때문에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양한 변주와 방법으로 시도하는 탈주-불륜, 동성애, 이혼, 가출-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소시민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듯 보이면서도 이들에게 현재의 일상성은 의미가 없다. 작가는 서사의 초점을 주인공들이 이루고자 하는 ‘해방’에 겨눈다. 이들에게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성취를 이루려는 세속적인 욕망도, 가정을 이루고 지켜내고자 하는 가족 로망스도 없다. 인물들은 자신의 내재적 본능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내면이 이끄는 욕망을 따른다. 작가는 ‘별리’를 통해 ‘부서진 인연’으로 남게 된 존재와 그들의 관계를 담백한 시선으로 관조하며 진한 여운을 남긴다.
저자

최석구

저자:최석규
2014년<천강문학상>,2018년<경북일보문학대전>,2023년<문학수첩중편소설부문신인작가상>등을수상했으며,2020년<예술지원정기공모사업>,2024년<아르코문학창작기금소설부문>에선정되었다.
소설집『소설이곰치에게줄수있는것』과장편소설『마그리트의껍질』,『검은옷을입은자들』을출간했다.

목차


작가의말………………7
내안의문어………………11
계단아래우리………………41
증발………………73
내일은해피엔딩………………105
옥상정원………………137
내친구긴코………………167
세상의끝,거북이,자그레브박물관………………195
해설_위반과탈주하는인물들(이덕화문학평론가)……295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혀를조금내밀었다.녹진녹진해진껌이혀를감싸며삐죽튀어나왔다.입술을동그랗게하고천천히불었다.작은공기방울이입술에걸렸다.그것은점점커지고붉은색은점점희미해졌다.풍선안으로한낮의햇살이빨려들어왔다.만지면그대로부서져버릴것만같은연약한무지개하나가안에만들어졌다.
_53쪽,<계단아래우리>에서

“남편이사라졌어요.”
경찰에신고했냐는물음에그녀는고개를저었다.스스로집을나간것같다고했다.기태의자발적실종이라니.듣고도믿기지않았다.정말그렇다면신고도별도움이되지않을것이다.성인단순가출의경우보통은72시간이내에집으로돌아오니일단기다려보라는틀에박힌대답뿐일테니까.
“그이는증발한겁니다.”
증발이란단어에서이질감이느껴졌다.
_76~77쪽,<증발>에서

“너,그거아니?은행나무에도암수가있다는것.”
“그래?”
“주변에열매가떨어져있다면그것은틀림없이암나무야.군것질거리가별로없던시절,사람들은열매를서로가져가려고했지만이젠아무도그렇게하지않아.껍질까기도불편하고,중금속에절어있고,냄새까지구리니까.그래서앞으로길거리의은행나무를모두수나무로교체한대.”
“그렇구나.”
“그런데한가지문제가생겼어.맨눈으로는어린은행묘목의암수를구별하는게불가능하다는거야.적어도10년은지나열매가맺힐때쯤에나확실히알수있거든.”
_175쪽,<내친구긴코>에서

“정…아…야.”
자기도모르게이름이튀어나왔다.정아.그녀는윤정아였다.
젊은날의모습그대로였다.진석은눈을의심했다.정아는고장난형광등처럼시야에서깜빡거렸다.버퍼링걸린동영상처럼툭툭끊기며,흐릿하게,애잔하게,서늘하게그녀는서있었다.정아의뺨에맺힌눈물이빛줄기와만나부서졌다.정아는다시어둠에매몰됐다.같은장소가밝아졌을땐그녀의모습은이미사라진후였다.
_205쪽,<세상의끝,거북이,자그레브박물관>에서

수연은언제가게될지모르지만,그곳이여행의끝이될거라했다.가보지도못한그곳이야기를쓰고있는그녀는어느새두뺨이빨갛게변해있었다.약한도수지만라들러도술이었다.
“‘세상의모든사랑은부서진인연만을남긴다(Everyloveintheworldleavesonlybrokenties)’이박물관의모토예요.이말,참멋지지않아요?하지만저는모든사랑이라는표현이마음에들지않아요.더좋은것이없을까?지금도고민중이에요.”
_243쪽,<세상의끝,거북이,자그레브박물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