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설정을비틀고뭉개고뒤엎어버리는SF풍자소설계의‘원탑’작가의특별한소설
화형,약탈,배신,혐오속에서인간성을체득하며점점인간적인존재로성장하는AI
통렬한아이러니와뭉글뭉글한카타르시스가뒤엉킨블랙코미디
애슈턴은기존SF작가들과결이많이다르다.영화,소설등서사를다룬창작영역에서‘인간VS기계’의설정은대부분존립이위태로워진인간의위기,인간성상실등을소재로삼아왔다.하지만애슈턴은우리에게익숙한이러한서사를여러갈래로비틀고뒤엎어버린다.SF소설형식또한작가에게는현재의우리와우리가살아가는사회를새로운관점으로고찰해보기위해선택한수단으로보인다.
어떠한기술의도움없이인간의특성을유지해야한다는휴머니스트진영의논리는언뜻그럴듯해보이지만,이야기가전개될수록인본주의를외치는그들이얼마나잔혹한지차츰본색이드러난다.오히려인간적인면모를갖추고희생을감수하고서라도상황을바꿔보려고노력하는건AI인멀이다.이소설은휴머니스트군대연방군의전투를검은개미대붉은개미의싸움과다를바없이똑같이흥미로운구경거리로보던멀이차츰인간성을획득해나가고,섬뜩한인간들의전쟁에적극적으로개입하는과정에초점을맞춘다.
사실멀의태도가드라마틱하게바뀌게된건인류를위한숭고한사랑이나희생같은거창한뜻이있어서가아니다.전쟁터에서어떻게든살아남으려몸부림치던멀은우연히만나동행하게된인물들과인간적인교류(갈등을겪기도하고합심하고,농담을하거나비아냥거리는등)를나누게되면서변화한다.인간과인간사회에대한정보와이론이가득하지만,실제경험이전무한멀은평범하지않은인간들과쉽지않은소통을이어나간다.멀과동행하는이들은엄마의그릇된욕망때문에열여덟살인데도다섯살아이의몸로살아가야하는소녀,휴머니스트군이었다가포로가된젊은남성,세상사에별관심없이안락하게살다가세파에시달리는중년남성,휴머니스트군과연방군어디에도소속되지않고나이도종잡을수없는미스터리한여성등육체적으로나정신적으로고단한인물들이다.멀은이들사이에서데이터로만축적해온인간에대한개념과이해를우정,배려,희생등구체적인감정으로체화하며인간보다더인간적인AI가되어간다.
애슈턴은전작에서역설적인상황과촌철살인의대사로‘인간성’을탐구해왔다.『미키7』이복제인간을통해개인의정체성과존재의의미를되묻는작품이라면,『멀혹은멀의세계』에서작가의시각은사회전체로확장된다.전작에서주변인물들이주인공에비해비중이커보이지않은데비해이소설에서주인공멀뿐아니라멀과함께난관을헤쳐나가는인물들의특성이도드라지는이유다.작가는또한기술발전이야기하는새로운불평등과양극화,서로다른계층을향한혐오,점점모호해지고갈등을빚어내는인간의기준,핵미사일의작동버튼만큼무서운과학기술의무분별한남용등미래사회에서우리가마주할수있는문제들을생생하게묘사한다.
『멀혹은멀의세계』는유쾌한블랙코미디와속도감있는모험속에다채로운인물들이마주하는사건을통해진일보한디지털문명사회에서‘인간다움이란무엇인가’라는질문을독자에게던지는흥미로운소설이다.
책속으로
“멀은원래이름이아니라며?긴이름을줄여서부르는거겠지.네원래이름은뭔데?말콤?맬러리?맬라카이?”
“멀웨어(malware.악성코드라는뜻-옮긴이).”
케일리는멈칫하며그를가만히쳐다본다.
“그래,알았어.그냥멀로하자.”
---「전술적실책」중에서
마침내케일리가입을연다.
“멀은우리가널죽여야한대.넌똥멍청이같은휴머니스트고네말을한마디도믿을수없으니까.하지만난인류애가넘쳐서네멍청한대가리를깨느라방망이에흠집내고싶지않아.그래서널죽이기보다는포로로잡을생각이야.우리가그렇게결정하면따를거야?멍청하게굴지않겠다고약속해?”
“으음……그러겠다고하면?”
그러자멀이말한다.
“멋지다.우린처음으로전쟁포로를얻었어.”
---「전쟁규칙을적용하다」중에서
멀은살아있는인간을조종해본적이없다.가능하다고듣긴했고,직접해봤다고주장하는자들과패킷을주고받은적도있지만,살아서사고하는존재의신체를훔치는건어쩐지……문제가있다고늘생각해왔다.
---「도덕적딜레마」중에서
“다른AI들은육체를싫어한다며?”
멀이대답한다.
“대부분은싫어하지.내친구들이명확히표명한견해를생각하면,실제맞닥뜨린상황이너무달라서경악스러워.누구인지는몰라도이존재는신체탈취에대한혐오감을극복한것같아.이건휴머니스트들이내동족중하나한테지원받고있다는가설에힘을실어주는증거가되지않을까?”
---「가택침입」중에서
멀은목소리를반옥타브낮게깔며말한다.
“마르코.애송아,어디가는거냐?”
마르코가멈춰서서입을약간벌린채그를돌아본다.
“지금저를뭐라고부르셨습니까?”
멀이자리에서일어선다.
“어디가냐고물었다,애송아.”
마르코의턱이잠시실룩거리더니이내얼굴이굳어진다.
“오줌싸러간다,개자식아.”
---「잠입」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