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인문학 (동아시아의 기억과 미래)

재난인문학 (동아시아의 기억과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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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현대 문명은 이른바 ‘위험의 상시화’라는 전 지구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기후 위기, 팬데믹, 그리고 고도화된 시스템의 결함이 초래한 복합적 참사들은 인간 문명의 취약성을 준엄하게 경고한다. 이제 재난은 발생해서는 안 될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한계를 끊임없이 환기하는 ‘실존적 상수’이다.

본서는 이러한 시대적 파국 앞에서 인문학이 수행해야 할 사유의 좌표를 설정하고자 기획된 것이다. 그동안 재난에 대한 논의는 주로 공학적 예방이나 행정적 복구라는 기술적 관리의 영역에 머물러 왔다. 그러나 수치화된 데이터와 관료적 보고만으로는 재난이 남긴 깊은 존재론적 균열, 즉 개인과 공동체의 기억 속에 각인된 상실의 고통과 가치의 붕괴를 온전히 치유할 수 없다.

본서에서 정의하는 ‘재난인문학(Disaster Humanities)’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재난인문학은 재난을 단순한 물리적 파괴로 한정하지 않고, 그것이 인간의 실존과 역사적 기억의 층위에 미치는 심층적 의미를 탐구하는 학제적 실천이다. 재난이 관통한 자리에서 발생하는 존재론적 위기를 응시하며, 파편화된 일상 속에서 인간 가치의 재구성과 윤리적 응답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이 학문의 본질이다.

이러한 사유의 틀 위에서 본서는 다음의 세 가지 학술적 지향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의 정치학’이다. 공식적인 국가 서사가 사건의 조기 종결을 시도할 때, 재난인문학은 소외된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복원하여 파편화된 비극을 공동체의 공유된 서사로 승화시킨다. 이를 통해 재난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사회적 성찰을 추동하는 능동적인 역사적 텍스트가 된다.
둘째, 구조적 폭력에 맞서는 ‘윤리적 애도’의 실천이다. 현대의 재난은 불평등과 시스템의 부재가 결합한 구조적 산물이다. 재난인문학은 ‘누가 애도받을 권리가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며, 사적인 슬픔을 공적인 정의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이는 국가와 사회의 책무를 묻는 주체적인 시민 의식의 발현이기도 하다.
셋째, 인문학적 토대 위에서 구축하는 ‘공동체적 레질리언스(Resilience)’이다. 진정한 회복은 물리적 기반 시설의 재건을 넘어, 붕괴된 사회적 신뢰를 복원하고 타인의 고통에 연대하는 역량에서 기인한다. 동아시아가 공유해온 전통적인 천인감응(天人感應)의 지혜부터 현대적 연대 서사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거대한 상실을 견디고 일어선 문화적 자산을 발굴함으로써 재난을 새로운 문명을 상상하는 전환적 계기로 삼고자 한다.
특히 동아시아라는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한국, 중국, 일본이 겪어온 재난의 궤적을 비교 분석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각국이 재난을 해석하고 기억하는 독특한 방식은 서로의 고통에 공감하고 공동의 미래를 설계하는 귀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저자

이석현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고려대학교에서 동양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경성대학교, 연세대학교, 서강대학교, 서울대학교의 전임강사, 연구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논문으로는 「중국의 역사기후학과 데이터베이스, 지도」, 「중국 재이관의 성립과 변용」, 「중국의 재해 연구와 데이터베이스, 지도」, 「동위의 구황활민서와 구황책」, 「중국의 재해 재난연구와 ‘재난인문학’」 등이 있고, 논저로는 『한중 외교관계와 조공책봉』(공저), 『중국 번속이론과 허상』(공저), 『일본 지진 재해사』(공역), 『송사 외국전 역주』 1·2·3(공역), 『중국의 역사-송대』(공역), 『감염병의 중국사』(번역) 등이 있다.

목차

서론 재난인문학의 시각

1. 왜 지금, 재난인문학인가?
재난이 호출한 존재론적 위기
현대 사회의 복합적 재난 양상과 인문학적 성찰의 필요성
재난인문학의 학문적 정체성 확립
동아시아 재난 연구의 의의와 경험

2. 재난인문학의 시각
재난과 기억의 문화: 망각에 저항하는 기록
재난과 감정: 공포, 슬픔, 분노의 연대
재난 서사의 서발턴: 주변부의 목소리

제1장 재난인문학의 이론적 지형

1. 재난인문학의 탄생과 정체성
위험사회론과 재난 담론
재난인문학의 학제적 성격
재난인문학의 정의: 재난의 인간적, 문화적, 역사적 의미 탐색
재난인문학의 핵심 질문과 연구 영역
재난인문학 연구의 주요 쟁점과 방법론

2. 위험사회와 재난의 새로운 얼굴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론: 근대화와 위험의 내재화
팬데믹 시대의 위험사회론 재조명
전통적 재난과 현대적 위험의 차이: 불확실성, 책임, 전 지구적 파급력
재난의 정치경제학: 불평등과 취약성 증폭

3. 지진, 쓰나미, 기후변화: 자연재해의 일상화
대규모 기술 재난과 시스템 위험
감염병 팬데믹: 보이지 않는 위협의 확산
복합 재난과 불확실성의 시대

제2장 동아시아 재난 사유의 기원

1. 고대 동아시아 재난의 담론과 기록
천재지변과 정통성의 문제: 명분과 하늘의 뜻
춘추필법과 재난 기록: 역사가의 준엄한 붓
천인감응론과 재이설: 하늘의 경고
천문현상과 왕조 교체: 징조와 예언의 정치학

2. 재난과 지식인의 역할: 사유와 비판의 기록자들
유교 사대부의 재해 인식: 천인감응과 위정자의 책임
재난을 기록하고 해석한 사서와 문헌: 역사의 거울
재난 이후의 사회비판과 논쟁: 개혁의 목소리

3. 재난과 종교: 구복과 구제의 경계
유교적 재난관: 위정자의 책임과 애민
불교의 재앙 해석과 의례: 업보와 자비의 순환
도교의 재해 진언과 신성 공간
민간 신앙: 구복과 벽사의 세계

제3장 동아시아 전통시대 재난의 양상과 대응

1. 동아시아 전통시대의 재난 경험과 대응
중세 동아시아의 재난 경험: 재이(災異)의 기록 속에서
당송원명 시기 대기근과 기후변화
고려와 조선 전기의 재난 대응
일본 중세의 지진과 불교적 해석

2. 국가와 재난 대응 체계: 제도와 통치
왕조의 재해 대응 제도
구휼제도의 진화: 재난 약자에 대한 인식 변화
통계와 보고의 문화: 재난 관리의 기초

3. 전염병의 세계: 동아시아의 팬데믹 역사
원・명 시대 페스트: ‘흑사병’의 동아시아적 그림자
조선 후기 천연두와 종두법: 질병과의 과학적 투쟁
1910~20년 만주 페스트의 동아시아적 파장

4. 문학과 예술 속 재난: 고통과 치유의 언어
문학(시, 소설) 속 재난의 서사: 비극적 현실의 반영과 극복의지
재난화(災難畵)와 민화, 벽화: 시각적 기록과 재앙 극복의 염원
전설과 민담 속 재난의 대처: 집단 지혜의 전승
구전과 문서화: 살아있는 기억과 불멸의 기록

제4장 현대 동아시아의 재난과 변화

1. 현대적 재난과 동아시아 근대
근대적 재난국가의 탄생: 과학과 통제의 시대
일본 메이지 이후 국가적 재난 대응 체제 형성
청말~민국기 중국의 재해 대응과 한계
일제시대 조선의 재난 담론: 식민지 근대성의 그림자

2. 산업화와 기술적 재난: 문명의 그림자
대형 사고와 체르노빌적 변화: 시스템 위험의 부상
울진, 후쿠시마 그리고 동아시아의 핵위기: 보이지 않는 공포
도시 확장과 기후 재난: 새로운 불평등의 지형

3. 재난 이후의 동아시아, 그리고 포스트코로나
COVID-19 팬데믹과 동아시아: 위기 대응과 사회적 성찰
재난 이후 ‘회복’과 ‘복원력’의 인문학: 단순한 복구를 넘어
문화적 회복력(resilience)의 가능성: 예술, 이야기, 그리고 공동체

제5장 재난의 공간과 집단기억의 정치학

1. 재난 기억의 형성, 변용, 그리고 정치학
기억의 주체와 객체: 누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개인적 기억과 집단적 기억의 상호작용
기념과 망각: 기억의 선택과 재구성
재난 기념 공간과 박물관: 기억의 공공화와 전유

2. 재난의 공간적 이해와 집단기억
역사지도에 나타난 재난의 흔적
홍수 지도, 기근지도, 전염병 경로의 시각화: 재난의 과학적 접근
공간적 레질리언스의 개념: 재난에 강한 공동체
재난과 집단기억: 망각에 저항하는 공동체의 노력
재난의 기념비, 위령비, 제례
재난의 장소화와 유적지화

3. 동아시아 주요 재난 사례별 기억 양상 비교
일본: ‘자연과의 공존’과 ‘복구의 미덕’ 속의 기억
한국: ‘국가 책임’과 ‘애도의 정치학’으로서의 기억
중국: ‘국가 주도 복구’와 ‘희생 속의 영웅 서사’
대만: ‘시민사회 역량’과 ‘재건의 경험 공유’

제6장 재난 서사의 증언의 힘: 재현과 치유

1. 재난 서사의 재구성: 문학, 예술, 미디어
문학 속 재난: 트라우마와 상실의 언어화, 고통의 재현 방식
재난 문학의 장르적 특징과 역할
재난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시각적 재현과 사회적 영향
시각예술과 공연예술: 재난의 시각화와 공동체적 애도
미디어와 재난 서사: 보도 방식, 프레이밍, 정보 생산의 윤리
뉴미디어 시대의 재난 서사: SNS와 참여적 기억

2. 구술사와 증언의 힘
구술사의 중요성
재난 구술사의 의미와 방법론
증언의 윤리: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
동아시아 재난 구술사 프로젝트 사례 분석
재난 생존자의 증언이 공동체 기억에 미치는 영향
서발턴의 목소리 발굴과 재난 정의

3. 동아시아 각국의 재난 서사 유형 비교 분석
일본: ‘극복과 재생’의 서사, 그리고 ‘자연과의 공존’의 의미
한국: ‘진실 규명’과 ‘애도의 정치학’으로서의 서사
중국: ‘국가 영웅주의’와 ‘인민 단결’의 서사
대만: ‘시민 주도 연대’와 ‘실용적 학습’의 서사

제7장 재난의 치유와 재난인문학의 역할

1. 고통과 애도
트라우마와 심리적 회복의 과정
애도의 문화적 형식과 공동체적 의례
재난 이후 공동체의 연대와 상호 돌봄
전통적 치유 방식과 현대적 접근의 융합

2. 재난인문학의 실제적 적용과 미래
재난인문학 교육의 중요성
재난 정책 수립 및 인문학적 거버넌스 강화
예술 치유, 서사 치유 등 실천적 치유 프로그램 개발
재난인문학의 윤리적 지향
미래 재난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력과 대비

결론 동아시아 재난문화의 미래

공유된 기억, 다른 대응
동아시아적 연대 모델은 가능한가?
재난인문학의 미래 지향: 성찰과 실천의 동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