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표현하자면,머리카락을가르는바람의맛
이책에는인상적인표현하나가등장한다.“머리카락을가르는바람의맛!”축구를사랑하게된어느초등학생여자아이가자신의즐거움을설명하기위해내놓은말이다.체육학을가르치는교수도,국가대표출신레전드선수도답하지못했던바로그질문,“축구의재미가무엇인가요?”에가장정확하게다가간표현이어린아이의입에서나왔다는사실은의미심장하다.남자아이들은좀처럼모르는감각이라고한다.대개머리카락이짧기에바람을느낄일이없기때문이다.
스포츠부기자인저자가4년가까운취재끝에도달한결론이이한줄에압축되어있다.여자아이들도축구를좋아한다.축구의재미를알면빠져든다.단지그재미에도달할통로가너무좁고,너무외롭고,너무우연에기대있을뿐이다.책에등장하는‘현진이’는어머니의반대를뚫고오빠의큰축구화를신고나와남자애들틈에끼어들던소녀였다.해림씨는대학에들어가서야직접여자축구동아리를만들었다.리아는“여자가무슨축구야”라는친구의한마디에발끈해결심하고야만다.이여성들의공통점은모두‘어렵게’축구에도달했다는사실이다.남자아이들이슬리퍼를신고복도에서공을차며자연스럽게습득하는즐거움을,여자아이들은용기와고집과외로움을감수해야만손에쥘수있다.
이의진작가는이비대칭을‘정보비대칭’이라고말한다.모두에게똑같은팔다리가있고,똑같이즐거워질수있는정신구조가있는데도축구라는즐거운도구의정보는한쪽으로만흐른다.누군가는손흥민을보고슈팅연습을하지만누군가는손흥민이동경의대상이될수있다는사실조차떠올리지못한다.그래서이책은흔하디흔한‘스포츠르포’가아니다.사회가어떤즐거움을누구에게허락하고,누구에게차단해왔는지를묻는작업이다.보통차별을거대한사건으로떠올리지만,우리가돌아봐야하는지점은어쩌면“그게무엇인지모르고살아왔다”는무심한결락속에있을지도모르겠다.
캐디로의피란행렬,누구도묻지않았던질문
작가는여자축구취재도중기묘한패턴을발견한다.은퇴한여자축구선수의상당수가다음행선지로‘캐디’를선택한다는것이다.처음에는우연인줄로만알았다.하지만어느자리에가도,누구를만나도같은이야기가흘러나왔다.어떤연구에서는그비율을절반으로추산하고,혹자는80퍼센트까지과장한다.정확한수치는알수없었지만어쨌든분명한사실하나는남았다.평생축구를갈고닦은여성들이축구장을떠나골프장잔디위로흘러가고있다는것.같은잔디지만완전히다른세계로의망명이다.
이러한패턴은한국여자축구의모순이응축된지점이다.책에서언급된김성희는아홉번의수술끝에축구화를벗었다.강수지는국가대표까지올랐지만,동료가월100만원도안되는임금을받는현실에분개했다.지소연은천막아래에서알몸으로옷을갈아입어야했던선수들의자괴감을차마외면하지못했다.그는또미국과영국리그를거치며본당연하다고생각했던인프라가한국에없다는사실에좌절했다.이들이공통적으로마주한것은단순한임금격차나시설부족이아니었다.자신이평생해온일이사회로부터어떤가치도인정받지못한다는감각,그품위의훼손이었다.
이책은거기서한발더들어간다.왜한국여자축구는이상황을스스로바꾸지못했는가.행정기관의만성적재정난,엘리트체육으로회귀하려는보수성,변화를추동할리더의부재,그리고무엇보다'우리만의리그'에안주해온폐쇄성.저자는이를비난하지않고,그렇다고변호하지도않는다.다만한명의선수가던진질문을그대로옮긴다.“왜우리선배들은이런상황을겪었는데도목소리를내지않았나요?”이질문은다시후배들에게부메랑처럼돌아온다.변화는누군가가가져다주지않는다.호주의마틸다선수들이누드달력을찍으면서까지인지도를만들어냈고,잉글랜드선수들이우승다음날정부에단체서한을보냈던것처럼.이책은한국여자축구가그결정적한걸음을언제,누구의손으로내디딜것인지묻는다.
1895년네티허니볼에서부터2026년명서초등학교까지,130년의믿음
이책의가장놀라운점은서사의스케일이다.창원명서초등학교운동장에서시작해1895년런던크라우치엔드의어느잔디밭까지거슬러올라가기때문이다.그곳에는1만명의관중앞에처음모습을드러낸최초의여자축구팀‘브리티시레이디스FC’가있었고,그팀의주장인네티허니볼은이렇게말했다.“여자가남자들이생각하는쓸모없는장식같은존재가아니라는걸세상에증명하겠다는확고한결의를품고시작한일입니다.”여자축구는130년전의이한마디에서시작됐다.
저자는먼과거의여자축구,그리고놀라울정도로압도적이었던여자축구의인기를서서히복원한다.1차세계대전시기군수품공장여성노동자들이만든딕·커레이디스FC는1920년한경기에서5만3천명의관중을모았다.유료관중집계이후K리그역대최다치를뛰어넘는숫자다.그러나1921년잉글랜드축구협회는단한줄의결의안으로이모든것을멈춰세웠다.“축구는여성에게적합하지않으며,장려되어서는안된다.”그50년의강제된침묵이오늘날여자축구가따라잡아야할역사적격차의빌미가됐다면,현재의저조한시장성으로여자축구의잠재력을재단하는것은부당하다는가설적명제도성립할것이다.
그리고책은다시현재로돌아온다.호주여자대표팀'마틸다'의누드달력사업,폭발적으로성장하는영국WSL,미국여자축구에400억원넘게기부한재미동포사업가미셸강.동시에책은한국의작은운동장에눈을둔다.구산중에서열린'킥키타카'프로그램에참여한어느여학생이미니게임을마치고옆에서환호하는남학생들을보며중얼거린다.“쟤넨참행복해보이네요.”작가는이한마디를들으며깨닫는다.이여학생은이제그행복의정체를안다고.그것이130년전네티허니볼이시작한작업의가장작고분명한결실이다.여자축구가나아갈방향은어디일까.남아프리카공화국선수마가이아의말을빌려마지막문장을적는다.믿음과믿음을이어가는일.이책은그연쇄의한매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