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걷는다 (윤문순 시집)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걷는다 (윤문순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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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윤문순의 시집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걷는다』는 슬픔과 환희, 상흔과 영광이 한 몸인 세계를 지금 여기 붙들어 세운다. 이 시집에서 자주 등장하는 시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감각과 기억의 결을 바꾸는 압력이고, 사물과 몸은 그 압력의 흔적을 고스란히 새긴 증거이다. 시인은 그 흔적 속에서 날기를 꿈꾼다. 이 시집의 첫 작품 「나비가 피운 꽃으로」가 보여주듯, 등불이 켜지고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동시에 점화되는 장면은, 한 몸의 리듬으로 올라타는 비상의 합창이다. 그러나 비상은 곧바로 추락의 예감과 함께한다. 「접힌 날개」의 세계는 비상 직전 혹은 직후의 파열을 집요하게 응시한다. 윤문순의 시에서 날기는 그래서 상승의 신화가 아니라, 현실의 중력과 협상하는 삶의 조건이다. 그의 시에서 꽃이 많이 등장한다. 그에게 꽃은 장식이 아니라 사건이다. 「나비가 피운 꽃으로」의 “하나 된 울림”은 군중의 열기가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을 그리지만, 그 열기는 언제나 상처와 맞닿아 있다. 「슬픔의 무게」에서 “그날 꽃송이들 어둠에 묻혔다”는 구절은, 아름다움의 클리셰를 거부하고 애도의 지층을 나타낸다. 물결의 압력, 쓰러짐의 연쇄, “거대한 통곡의 산”은 집단적 재난을 생체적 기록으로 전한다.
이 시집 제목 그대로 이 시집은 ‘걷기의 시학’을 보여준다. 표제작 「아주 느린 걸음으로」에서 나이테는 시간의 단면이 아니라, “마디마다 새긴 이야기”가 겹쳐진 문장이다. 느림은 회피가 아니라 읽기의 속도, 즉 세계를 식별하려는 감각의 속도다. 반대로 「잃어버린 시간」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가짜 뉴스”와 “남의 깃털로 꾸민 까마귀”의 장난으로 시간을 혼탁하게 만든다. 이 시에서 안개는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인식의 훼손이자 공동체 언어의 붕괴를 상징한다.
이 시집의 시들에서 몸과 사물은 상처의 증언대다. 「지금 여기에」의 소나무는 “질긴 칡덩굴”과 “새의 부리”를 견디며, 흰 눈물과 옹이로 시간을 봉인한다. 자연은 수난의 장이면서도, 그 수난을 기억으로 전치轉置하는 탁월한 기록자다. 「새벽을 찢다」의 상실은 “전화선을 타고” 온다. 소식은 칼이 되고, 빛은 꺼지며, 혀끝의 피비린내가 내면을 점령한다. 상실은 외부 사건이 아니라, 감각의 질서를 전복하는 내부의 충격이다. 한편 도시의 골목과 선술집, 이민자의 근육이 진동하는 「탱고」는 삶의 피로를 비루함으로 덮지 않는다. 반도네온의 호흡, G선의 울부짖음, 그리고 “동굴 벽을 걸어 다니는 땅게”의 이미지가 비루와 기품을 한 화면에 겹쳐 놓는다. 상흔은 비천과 존엄의 합성어이며, 바로 그 합성이 윤문순 시를 빛나게 하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윤문순의 시는 불빛과 어둠, 피어남과 접힘, 비상과 추락을 둘 중 하나로 선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사이의 진동을 시의 본질로 삼는다. 군중의 열기가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나비가 피운 꽃으로」), 상실의 칼이 감각을 썰어버린 새벽(「새벽을 찢다」), 담장 틈의 미세한 생(「인내의 끝」), 안개가 인식을 마비시키는 도시(「잃어버린 시간」), 그리고 광장에서의 참사와 애도(「슬픔의 무게」)까지, 각 편은 다른 소리의 비명을 내지만, 시집은 그것들을 한데 묶어 걷기의 호흡과 속도로 정리한다. 그 걷기는 늦추고, 듣고, 기억하고, 다시 피워내는 행위다.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걷는다』는 우리 시대의 상흔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꽃이 피어나는 장면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시집이다. 나는 것의 자유는 상처를 무화하지 않고, 꽃의 화광은 애도를 잊지 않으며, 시간의 회한은 느림의 독해로 전환된다. 그래서 이 시집의 제목은 선언이 아니라 독자에게 건네는 요청이다. “당신도 이렇게 시간을 걸어가라.” 이 걷기의 리듬을 배우는 순간, 우리는 비상과 추락의 사이에서, 피어남과 접힘의 사이에서, 비로소 지금 여기에 선다.
저자

윤문순

2020년 계간 『문파』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걷는다』가 있다.

목차

1부 창 너머 뒤돌아선 그림자처럼

나비가 피운 꽃으로/ 데칼코마니/ 곡선과 직선 사이/ 새벽을 찢다/ 유리기억/ 여백에 앉은/
하나 둘 그리고 다섯 개의 불빛/ 손등 읽기/ 아직도 어른으로 이사 중/ 지금 여기에/
정선 오일장/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가시가 자라는 손톱 밑/ 감옥이다/ 접힌 날개

2부 돌고 돌아 열두 개의 문을 닫는다

그림을 듣는다/ 벽을 쌓는 사람/ 뒤틀린 나무의 꿈/ 열두 개의 이야기/ 팰림세스트/
걸음의 침묵/ 탱고/ 끝에서 만난 문장/ 아주 느린 걸음으로/ 익어간다/ 그림자/
낡은 신발/ 어디쯤/ 여행 가방/ 인내의 끝/ 커피잔에 풀어지는 노을

3부 숨결조차 쉼표가 된 정적

내게 멈추지 않는 고요가 있어/ 렌즈는 울지 않는다/ 그 자리의 상수리나무/ 잃어버리다/
흔들리는 풀/ 보도블록 전시장/ 스러지다 또다시/ 잃어버린 시간/ 걸어가는 담쟁이/
어쩌다/ 거짓말 걷어내기/ 어우러지다/ 슬픔의 무게/ 울지 않는 숲/ 빈 둥지

4부 부딪힌 말들이 가득한 골목

출렁거리는 어둠/ 휙/ 네 감은 눈에 입 맞추면/ 오래된 빛/ 어때/ 거기, 누구 없나요?/
비워진 자리/ 가을사위/ 지금은 소나기가 지나는 중/ 미련 하나/ 소리, 받아들이다/
바람의 시간/ 오르다/ 봄밤을 풀다/ 발 끝에/ 별을 건지다


해설 _ 길항하는 세계와 중첩된 존재 사이에서
조동범

출판사 서평

시인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여러 자아를 탐문하고자 한다. 또한 서로 다른 세계가 길항하는 가운데 주고받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한다. 우리의 삶과 세계는 단편적이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복합적이며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그런 점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시인은 자아의 여러 모습이나 서로 다른 세계를 호명함으로써 복합적이고 다채로운 삶과 세계의 양상을 우리 앞에 펼쳐 놓으려 한다. _ 조동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