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걷는다 (윤문순 시집)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걷는다 (윤문순 시집)

$12.00
Description
윤문순의 시집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걷는다』는 슬픔과 환희, 상흔과 영광이 한 몸인 세계를 지금 여기 붙들어 세운다. 이 시집에서 자주 등장하는 시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감각과 기억의 결을 바꾸는 압력이고, 사물과 몸은 그 압력의 흔적을 고스란히 새긴 증거이다. 시인은 그 흔적 속에서 날기를 꿈꾼다. 이 시집의 첫 작품 「나비가 피운 꽃으로」가 보여주듯, 등불이 켜지고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동시에 점화되는 장면은, 한 몸의 리듬으로 올라타는 비상의 합창이다. 그러나 비상은 곧바로 추락의 예감과 함께한다. 「접힌 날개」의 세계는 비상 직전 혹은 직후의 파열을 집요하게 응시한다. 윤문순의 시에서 날기는 그래서 상승의 신화가 아니라, 현실의 중력과 협상하는 삶의 조건이다. 그의 시에서 꽃이 많이 등장한다. 그에게 꽃은 장식이 아니라 사건이다. 「나비가 피운 꽃으로」의 “하나 된 울림”은 군중의 열기가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을 그리지만, 그 열기는 언제나 상처와 맞닿아 있다. 「슬픔의 무게」에서 “그날 꽃송이들 어둠에 묻혔다”는 구절은, 아름다움의 클리셰를 거부하고 애도의 지층을 나타낸다. 물결의 압력, 쓰러짐의 연쇄, “거대한 통곡의 산”은 집단적 재난을 생체적 기록으로 전한다.
이 시집 제목 그대로 이 시집은 ‘걷기의 시학’을 보여준다. 표제작 「아주 느린 걸음으로」에서 나이테는 시간의 단면이 아니라, “마디마다 새긴 이야기”가 겹쳐진 문장이다. 느림은 회피가 아니라 읽기의 속도, 즉 세계를 식별하려는 감각의 속도다. 반대로 「잃어버린 시간」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가짜 뉴스”와 “남의 깃털로 꾸민 까마귀”의 장난으로 시간을 혼탁하게 만든다. 이 시에서 안개는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인식의 훼손이자 공동체 언어의 붕괴를 상징한다.
이 시집의 시들에서 몸과 사물은 상처의 증언대다. 「지금 여기에」의 소나무는 “질긴 칡덩굴”과 “새의 부리”를 견디며, 흰 눈물과 옹이로 시간을 봉인한다. 자연은 수난의 장이면서도, 그 수난을 기억으로 전치轉置하는 탁월한 기록자다. 「새벽을 찢다」의 상실은 “전화선을 타고” 온다. 소식은 칼이 되고, 빛은 꺼지며, 혀끝의 피비린내가 내면을 점령한다. 상실은 외부 사건이 아니라, 감각의 질서를 전복하는 내부의 충격이다. 한편 도시의 골목과 선술집, 이민자의 근육이 진동하는 「탱고」는 삶의 피로를 비루함으로 덮지 않는다. 반도네온의 호흡, G선의 울부짖음, 그리고 “동굴 벽을 걸어 다니는 땅게”의 이미지가 비루와 기품을 한 화면에 겹쳐 놓는다. 상흔은 비천과 존엄의 합성어이며, 바로 그 합성이 윤문순 시를 빛나게 하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윤문순의 시는 불빛과 어둠, 피어남과 접힘, 비상과 추락을 둘 중 하나로 선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사이의 진동을 시의 본질로 삼는다. 군중의 열기가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나비가 피운 꽃으로」), 상실의 칼이 감각을 썰어버린 새벽(「새벽을 찢다」), 담장 틈의 미세한 생(「인내의 끝」), 안개가 인식을 마비시키는 도시(「잃어버린 시간」), 그리고 광장에서의 참사와 애도(「슬픔의 무게」)까지, 각 편은 다른 소리의 비명을 내지만, 시집은 그것들을 한데 묶어 걷기의 호흡과 속도로 정리한다. 그 걷기는 늦추고, 듣고, 기억하고, 다시 피워내는 행위다.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걷는다』는 우리 시대의 상흔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꽃이 피어나는 장면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시집이다. 나는 것의 자유는 상처를 무화하지 않고, 꽃의 화광은 애도를 잊지 않으며, 시간의 회한은 느림의 독해로 전환된다. 그래서 이 시집의 제목은 선언이 아니라 독자에게 건네는 요청이다. “당신도 이렇게 시간을 걸어가라.” 이 걷기의 리듬을 배우는 순간, 우리는 비상과 추락의 사이에서, 피어남과 접힘의 사이에서, 비로소 지금 여기에 선다.
저자

윤문순

2020년계간『문파』신인상을받으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
시집『우리는그렇게시간을걷는다』가있다.

목차

1부창너머뒤돌아선그림자처럼

나비가피운꽃으로/데칼코마니/곡선과직선사이/새벽을찢다/유리기억/여백에앉은/
하나둘그리고다섯개의불빛/손등읽기/아직도어른으로이사중/지금여기에/
정선오일장/사라지는것에대하여/가시가자라는손톱밑/감옥이다/ 접힌날개

2부돌고돌아열두개의문을닫는다

그림을듣는다/벽을쌓는사람/뒤틀린나무의꿈/열두개의이야기/ 팰림세스트/
걸음의침묵/탱고/끝에서만난문장/아주느린걸음으로/익어간다/그림자/
낡은신발/어디쯤/여행가방/인내의끝/커피잔에풀어지는노을

3부숨결조차쉼표가된정적

내게멈추지않는고요가있어/렌즈는울지않는다/그자리의상수리나무/잃어버리다/
흔들리는풀/보도블록전시장/스러지다또다시/잃어버린시간/걸어가는담쟁이/
어쩌다/ 거짓말걷어내기/어우러지다/슬픔의무게/ 울지않는숲/빈둥지

4부부딪힌말들이가득한골목

출렁거리는어둠/휙/네감은눈에입맞추면/오래된빛/어때/거기,누구없나요?/
비워진자리/가을사위/지금은소나기가지나는중/미련하나/소리,받아들이다/
바람의시간/오르다/봄밤을풀다/발끝에/별을건지다


해설_길항하는세계와중첩된존재사이에서
조동범

출판사 서평

시인은우리안에존재하는여러자아를탐문하고자한다.또한서로다른세계가길항하는가운데주고받는관계에대한이야기도한다.우리의삶과세계는단편적이지않다.그것은언제나복합적이며다양한층위의이야기를담고있다.하지만그런점을파악하기는쉽지않은일이다.시인은자아의여러모습이나서로다른세계를호명함으로써복합적이고다채로운삶과세계의양상을우리앞에펼쳐놓으려한다._조동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