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에 앉아 있는 이야기들

계단에 앉아 있는 이야기들

$12.00
Description
최수지의 시는 슬픔과 우울을 외면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들을 ‘가볍게 만들기’의 기술로 다룬다. 가벼움은 회피가 아니라 체중 이동이다. 무게를 덜어내기보다, 다른 지점으로 옮겨 균형을 잡는 동작이다. 이 시집에서 화자는 바람, 달빛, 그늘, 복숭아꽃, 휘파람 같은 감각의 매개들을 통해 정서의 중심을 옮긴다. 그리고 그 이동의 끝에 ‘함께 사는 세계’의 꿈을 조용히 펼쳐 보인다.
「그 숲으로 가자 하니」에서 시적 나는 상처의 원형을 ‘잘린 무’의 촉감과 ‘하옥계곡’의 기별로 불러낸다. 여기에 “측백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기억의 안내자처럼 배치된다. 중요한 것은 상처를 봉합하거나 지우는 일이 아니라, “잘린 발목을 붙들고… 버티다 보면/발자국이 찍힌다”는 문장으로 드러나는 견딤의 깨달음이다. 강당이라는 공적 공간을 배경으로 한 「빰빠라밤빠, 뺨」은 고통의 장면을 슬랩스틱의 리듬으로 이행시키는 독특한 시도다. “핑크빛으로 물이 드네/빨갛게… 부풀어 올라라 빵”에서 볼의 타격감은 색채와 의성어로 재편되어 미학적 경험으로 전환된다. 폭죽, 복숭아꽃, 날아다니는 휠체어의 초현실적 이미지가 겹치며 웃음과 아픔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진다.
「봄 앓이」라는 작품에서 “와장창 깨어나는 하늘”과 “매매 아리다”의 어법은 경쾌함과 통증을 동시에 품어, 계절처럼 앓고 계절처럼 나아가는 정서의 과정을 보여준다. 「오늘도 잠시 우울」은 우울을 ‘되감기’ 버튼처럼 눌러보는 사용설명서에 가깝다. 스스로의 치사함을 자각하면서도, “한 뼘 사랑에 퐁당 빠진 망고 요거트 스무디” 같은 구체적 이미지로 생의 단맛을 호출한다. 우울을 극복하는 길은 거창한 결의가 아니라, 몸에 착 붙는 작은 감각을 정성껏 되살리는 일임을 설득한다.
또한, 이 시집의 시들은 개인적 상처의 치유를 넘어 ‘함께 사는 세계’에 대한 구상을 펼친다. 「우리들의 나무」에서 사이프러스와 자작나무는 서로의 결핍을 메우는 공생의 삶에 대한 은유가 되고, “나무는 뿌리가 보이지 않아도/우리로 자라기”를 꿈꾸는 것처럼 시인의 꿈도 성숙해 간다. 「새가 된 휘파람」의 바다는 소유하지 않아도 즐거운 세계를 보여준다. 빈 쿨러의 행복, 계절을 앞서 도착한 꽃들의 “조잘조잘”은 소유의 논리를 비켜서는 공동의 환대 감각이다. 목구멍에 맺힌 숨이 타자에게 닿는 신호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홀로가 아니다.
표제작인 「계단에 앉아 있는 이야기들」은 이 시집의 정서적 합창이라 할 수 있다. 반장이 되어 층층 계단을 내려가며 주민들의 손을 잡는 화자의 동선은 도시의 해체된 커뮤니티를 다시 엮는 사회적이고 집단적 서정이다. “씨간장”처럼 숙성된 이야기, “균열이 선명한 복도”에 나란히 앉는 몸들은 공적 문서(사실 조사서)를 사적 서사로 환원한다. 행정의 언어와 생활의 언어가 만나는 지점에서, 시는 기록이자 환대가 된다.
최수지의 이번 시집 『계단에 앉아 있는 이야기들』은 슬픔을 부정하지 않되 가볍게 다루는 법을 가르친다. 그 가벼움은 표피의 농담이 아니라, 무게를 함께 들어 올리는 기술이다. 기억의 숲에서 발자국을 남기고, 상처를 유머와 리듬으로 재배치하며, 계단을 내려가 서로의 손을 잡는 일. 시집은 이 제 동작으로 우울을 건너와 “오늘도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삶의 자세를 제안한다. 결국, 이 시집은 한 사람의 기분을 돌보는 시집이면서, 한 동네의 마음을 되돌리는 공동체의 기록이다. 우리 모두가 앉을 수 있는 그 계단, 그 너른 디딤돌 위에서 독자들은 조금 더 가벼워지고, 조금 더 함께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저자

최수지

·2001년『한국예총예술세계』시등단
·한국여성시회장,부산여류문인협회회장역임
·부산여류문인협회,예술시대작가회회원
·국가보훈문화예술협회초대작가
·시집『그리운이의집은흔들리는신호등너머』
『손톱에박힌달』『달려도녹지않는설국』『계단에앉아있는이야기들』

목차

1부바람이나를데리고그숲에간다면

담장너머이어달리기/시도,기도/누수로핀꽃/그림으로들어온/
쓰읍,달이넘어간다/긴급문자/깨를까불리다/꽃들의맨발/
그숲으로가자하니/그늘을펼쳐놓고낮술/늦은이별/빰빠라밤빠,뺨/갑자기바빠지는/그림자를두고닫은문/간장종지/나이불문

2부틈사이사이별쏟아붓는

봄앓이/눈,소풍/비들이운다/빌딩풍/사금파리반짝/섬망,재미없다구요/시간을봉지째뜯어놓고/ 신나는날로잡힌초대/앙큼한그녀들/
어쭙잖은것이/따라온달은병원창밖에떠있고/마주엎드리기/
너는어디가서우나/저동네/번아웃/오늘도잠시우울

3부물어온소리하나

동쪽창식탁에앉아/저밖의봄날/계단에앉아있는이야기들/
중입자센터/지금부터인사를나눌시간/지켜보기/ 참,어이없는/
큰목소리가아픈/불빛에젖은것마다흔들리네/소리를지운곳/
우리들의나무/그리움에는파스/니까지와이카노/뭍에서보는저기저섬/성장기/병원셔틀버스/초원

4부붉다가볼가히젖어드는눈가

새가된휘파람/새와나의관계이어가기/세상모든신/숨어있는혀/
안전문자분리하기/영구치갈아엎기/영정사진찍는날/이것좀봐/
울음요리/숨을참을수록부푸는애드벌룬/일용할양식/기다림의정의/누워서보는직립세상/튕기는엘피판/타협/하루


해설_전기수의꿈,시인의‘젖은’마음
전해수(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해설중에서


때로는방백으로때로는독백체로눈시울을적시게하는시인의이이야기는그래서“멀리까지갔다가되돌아와건네는말”(「하루」중에서)처럼‘슬픔’에게도감사의인사를전하는‘시인의젖은마음’이라해도좋을듯하다.고통속에서“보고싶다는말”(「그리움에는파스」중에서)이저절로입속으로메아리치는,이특별한아픔의경험을,최수지시인의시를읽으면우리도자연스레쏟아져나올것이기때문이다._전해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