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 없는 듯

아무 일 없는 듯

$12.00
Description
최태식 시인의 시집 『아무 일 없는 듯』은 제목부터 역설적이다. ‘아무 일 없었다’고 적힌 자리엔 균열과 상흔, 막 떠오르거나 꺼진 온도들이 어른거린다. 이 세계는 표면을 매끈히 봉합하는 말을 믿지 않고, 생활의 잔기술·생존의 반사신경·문명사의 비명이 스민 사물과 풍경을 앞세운다. 수건·깡통·침목·레일·폐사지·고속철·DMZ·오두산 등, 이 모두는 시대의 여러 요소를 말해주는 기호들이다. 시인은 이를 일상으로 끌어내 문명의 광장과 사적인 밀실을 왕복하며, 효율과 편의의 그늘에서 생겨난 결핍과 폭력의 문법을 여실히 까발려 내보인다.
이를테면 「수건 접기」에서 사랑은 형식미가 아니라 소모의 물성으로 증명되고, 베란다의 시듦과 호스피스의 손바닥 앞에서 ‘펴고 접는’ 몸짓은 생과 사의 최후 언어가 된다. 「1,435밀리」는 가까워지려 만든 철도의 표준궤도가 오히려 우리를 ‘나란히 달릴 뿐 만날 수 없는’ 레일로 고정하고 마는 것을 보여준다. 「스마트 기차」와 「깡통의 감정」은 속도·편의가 감정을 삭제하고, 내면의 공동이 네트워크의 소음으로 변환되는 오늘의 미디어 생태를 풍자한다. 문명 비판의 칼날은 「판의 명제」에서 노골적이다. 흰 닭과 검은 닭의 격투, ‘새로운 별자리’라는 선동, ‘광장을 찢는 외침’은 결국 우리의 미래를 울타리 밖으로 내쫓고 있는 모순으로 귀결된다.
분단 트라우마를 다루는 방식도 독창적이다. 「함수지대-DMZ」는 군사어를 생태 감각으로 전치하고, ‘새를 나눌 수 없으니 땅을 나누었다’는 문장으로 부조리를 투명하게 환기한다. 「오두산」에서는 김포, 관산 노을빛이 ‘아무 일 없는 듯’ 기록되는 오늘의 현실이 사실 상흔의 연속임을 환하게 보여주고 있다. 「펀치볼」과 「몰려드는 어둠을 태우면-황토현에서」는 전쟁과 민란의 역사를 현재의 공기 속에 소환해, 해방의 환희가 또 다른 폭력의 발화점이 되는 역설을 얘기한다.
환경을 보는 이 시집의 시선은 풍자와 공포로 교차된다. 「눈먼 새」의 변종 이미지는 폐기된 존재가 포식자로 귀환하는 역침투의 공포를, 「반가운 소식」은 쓰레기를 ‘해결’하는 괴물을 상상하는 문명의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언어에 대한 경계도 날이 서 있다. 「벽에 놓은 말」에서 ‘입속에 자라는 말’은 전파의 날개를 달고 타자를 짓밟고,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는 재개발·담보·유치권의 문법으로 몸과 관계가 기표화되는 현실을 폭로한다.
그럼에도 이 시집의 결론은 절망이 아니다. 「스며든다는 것」은 점령이 아닌 체류, 지배가 아닌 공명, 획득이 아닌 나눔의 윤리를 복원한다. 간병의 손, 침목 사이 거리, 김포의 노을, 「폐사지에서」의 바람과 돌탑, 이 낮은 온도의 장면들에서 미래의 감각이 발아한다. 이 시집은 거대한 선언 대신 작은 사물과 구체적 지명으로 자본의 과속, 문명의 역설, 환경의 자기기만, 분단 서사의 관성을 동시에 건드리는 의미 있는 노력의 소산이다.
이 시집 『아무 일 없는 듯』은, 언어의 호흡을 낮추고 사물의 본모습을 복원하는 노력의 성과이다. 여기서 서정은 문명의 반성으로, 풍경은 정치의 감각으로, 개인의 기억은 공동의 기록으로 전환된다. 아무 일 없는 듯 오늘을 적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끝내 배워야 할 문명의 기술이라는 것을, 이 시집은 오래,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증명한다. 우리는 광장에 환호하고 속도에 취하지만, 시는 마지막에 속삭인다, 스며들라고. ‘살며시/당신에게.’
저자

최태식

·정읍출생
·창작산맥신인문학상수상(2021)
·한국힐링문학상수상(2023)
·중앙일보시조백일장당선(2024)
·경남신문신춘문예시조당선(2025)
·제16회김우종문학상수상(2025)
·희망봉광장디카시신인문학상수상(2025)
·시집『아무일없는듯』
·숲생태지도자,한전지사장(전)

목차

1부너는긴여행의활자를풀어놓지

수건접기/망각의바다/마법에걸린항해사/차茶우림/모자이크양식/
주장의안에산다/1,435밀리/곡선의미학/갠잔애/붉은달이피는손/
여리고그리운/햇볕굽기/해/멍에의방식

2부미처풍경이되지못한사물

나를뭐라부를까/서로가개밥으로어두워질때/깡통의감정/퉁소/넝쿨가족/
사비성沙飛城/명성산억새/신발이신발을밟아도/부러진손/판의명제/
소음의거처/발자국을지우며/뼝창에피는/뒤끝의말/숲이야기

3부끝내다다를수없는

가위바위보/함수지대/아무일없는듯/두몸을끌어안은처음/펀치볼/
몰려드는어둠을태우면/사과선/에덴의서쪽/눈먼새/
당신의동전은어디에놓여있습니까/돌지않는바퀴/그들이온다/
반가운소식/우아한코끼리들의식사/커피벨트

4부기울어지는곡선으로짚어가는내일

장수풍뎅이/Ctrl+C&Ctrl+V/벽에놓은말/콜럼버스의실험/노르망디로가자/
스마트기차/그겨울을지나던우리의자세/눈사태/풍경바꾸기/청춘/폐사지에서/
네모를들켰다/내몸에손대지말아요/스키타이얼음공주/망치고기/스며든다는것


해설_여기우리가굽어지는시-간
정기석(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여기우리가굽어지는시-간

최태식시인은삶속에접힌시간을펼쳐내면서,시간속에서견디고있는‘당신’과,우리가삶이라고부르는것을시속에머물게한다.다만‘당신’이지금부재하다면,현실에서기억속‘당신’과실제만날수는없으니그만남은다분히마법적인시의시간이다.그러므로시인은“마법에걸린항해사”(「마법에걸린항해사」)이고,어느기억세계를펼쳐내기위한여정중에있다.하지만이마법적만남에는항해의고단함이필연적으로요청된다.그것은삶을견디면서만들어낸시적시간이다.그것은‘나’이전에‘당신’이먼저“모진시간을/휘어지며견딘”덕분이다.“휘어지며견딘”‘당신’이“굽은몸으로/백년송이되”어준덕분이다.(「곡선의미학」).그“아픔도눈이부”셔서,이를“저편으로떠나보낼수없는”시인은“기억을삼키며/계절을웅크린다”(「명성산억새」).그러면다시‘당신’은“긴여행의활자를풀어놓”는다(「차茶우림」).그속에서우리는우리각자의‘당신’을만난다.
‘내’가시간을사는것이아니라시간이주어가되어‘나’와‘당신’을산다.시간이‘나’를끌고가고‘나’는접히고펼쳐지면서,접힘과펼침의삶의굴곡속에서,최태식시인의시는그견딤을제몫으로두기로한다.시는시간의무게를함께떠안기로한다.그리고언제나그러했듯이지금의시-시간도접혀질것임을안다.지금시집을펼친‘당신’이시로두터워지는순간이다.“함께울어”(「명성산억새」)만들어내는시간의결정이다.

시인은시를통해서,그리고우리각각의삶이여기까지오면서만난모든‘당신’의단독성singularity이훼손되지않는선에서우리가서로의보편적‘당신들’과만나는자리를마련한다.우리는“개울에비친달처럼/병아리망막에맺힌하늘처럼”“구름이달을스치듯/쇠백로가물가를걷듯”“먹물이흰종이에번지듯//살며시/당신에게”스며든다(「스며든다는것」).우리는서로스며들기위해서,삶속에서서로를견디고,굽었을뿐이다.‘당신’의몸이굽은것은삶을견뎌온시간을안기위함이다.그러니삶속에굽어진시간이미학을만든다.당신은삶을어떻게견뎌왔는가.우리는삶을,서로를,더잘안기위해굽었을뿐이다.다시,이시간속에서우리는장면을접고또펼치며우리를공동창조한다.때로비극이고비애일지라도,괜찮다.우리는시간에스며든다.시간이우리를언제펼쳐낼지알수없지만,그것이삶이라는것을안다.
-정기석(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