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윤현 시인의 시집은 거창한 수사나 인공의 장막 없이, 맑은 숨으로 적은 문장들로 세계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소망을 노래한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언어의 태도다. 시인은 “바람이여,” 하고 말을 건네며 시작한다. “새를 가두지 않고 꽃을 꺾지 않는 그곳”을 향한 호명은 선언이 아니라 청원이고, 이념이 아니라 간곡한 기도이다. 곁을 밀어내지 않고 끌어들이는 이 낮은 목소리는 곧 시집 전체의 정서이기도 하다. 삶의 진지한 소망을 말하면서도 과장을 모른다. 대신 한 줄기 바람처럼, 아니 “태양을 나침반 삼아 하염없이 떠도는” 바람처럼, 존재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스치며 공존할 수 있는 세계를 조용히 꿈꾼다.
그 소망은 생태적 상상력으로 구체화된다. 「바람」에서 시적 화자는 사람과 개와 고양이, 새와 풀벌레와 물고기까지 “그 무엇도 가두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바람이 농부의 등줄기를 훑고, 숲속 아가 새의 솜털을 건드리고, 섬집 아기의 머리칼을 넘겨주듯, 생명들은 서로의 경계를 파괴하지 않고도 서로의 온기를 주고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자연은 배경이 아니라 주체다. 바람, 흙, 별빛, 물과 같은 요소가 능동적으로 말을 건네고, 인간은 그 말의 속도를 따라 배우는 존재가 된다. 「꿈」에서 “빗물을 품는 황토”가 되어 “내일이라는 푸르른 새싹”을 틔우겠다는 다짐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손이 아니라 순환 속에 스며드는 몸이 되겠다는 윤리적 결심으로 읽힌다.
이 생태적 윤리는 환대의 정서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는 표제작 「시베리안 허스키」에서 두드러진다. 이 시에서 개는 “녹슨 사슬”에 묶인 채 눈만 껌뻑이고, 화자는 “숫자놀음”에 묶여 “무거운 등짐”을 나른다. 인간과 동물의 고통이 하나의 사슬이라는 인식, “그곳”의 자유를 상상할 때 비로소 “이곳”의 각박함을 직면할 수 있다는 자각이 함께 선다. 시는 “그곳에서라면”이라는 조건법으로 희망을 품되, 그 희망을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빼내어 미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집의 연민은 감상에 빠지지 않고, 환대는 제스처가 아니라 책임이 된다.
환대의 감각은 언어를 낮추는 방식으로도 드러난다. 「벌레 같은 놈 1」은 단정적인 혐오의 말을 뒤집어 묻는다. “벌레가 사람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라는 연속 질문은 우열의 사다리를 흔들고, 존재의 크기와 힘을 기준으로 삼아온 문명의 언어에 제동을 건다. “그저 분자의 무더기로써 결합과 해체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생명의 평등성 앞에서, 인간 중심의 오만은 설 자리를 잃는다. 시인은 설명 대신 설득을 택하고, 비난 대신 사유를 건넨다. 이 사유의 끝에는, 서로를 가장 먼저 인간으로-혹은 단지 하나의 생명으로-호명하려는 환대의 몸짓이 있다.
『시베리안 허스키』는 “그곳”을 묻는 시집이다. 그곳은 어디에 있는가? 시인은 답을 미루지 않는다. “깃털과 풀꽃이 총알과 미사일보다 가치 있는 그곳”은 약속된 하늘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의 선택으로 조금씩 옮겨앉을 수 있는 장소, 말하자면 태도의 또 다른 이름이다. 가두지 않기, 빼앗지 않기, 서두르지 않기, 나누기. 이 소박한 윤리들이 한 편 한 편의 시에서 숨을 쉬면, “이곳은 그곳이 아닌 이곳”일지라도 우리는 그곳의 조각을 살아낼 수 있다. 윤현의 시는 독자에게 거창한 결단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바람처럼 가벼운 손길로 등을 쓸어내리며 말한다. 당신이 먼저 바람이 되어 보자고. 그러면 언젠가, 우리가 함께 걷고 또 달릴 수 있는 흰 대지의 길도 멀지 않을 거라고. 이 책은 그런 희망의 문장들로 오래 귀에 남는다.
그 소망은 생태적 상상력으로 구체화된다. 「바람」에서 시적 화자는 사람과 개와 고양이, 새와 풀벌레와 물고기까지 “그 무엇도 가두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바람이 농부의 등줄기를 훑고, 숲속 아가 새의 솜털을 건드리고, 섬집 아기의 머리칼을 넘겨주듯, 생명들은 서로의 경계를 파괴하지 않고도 서로의 온기를 주고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자연은 배경이 아니라 주체다. 바람, 흙, 별빛, 물과 같은 요소가 능동적으로 말을 건네고, 인간은 그 말의 속도를 따라 배우는 존재가 된다. 「꿈」에서 “빗물을 품는 황토”가 되어 “내일이라는 푸르른 새싹”을 틔우겠다는 다짐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손이 아니라 순환 속에 스며드는 몸이 되겠다는 윤리적 결심으로 읽힌다.
이 생태적 윤리는 환대의 정서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는 표제작 「시베리안 허스키」에서 두드러진다. 이 시에서 개는 “녹슨 사슬”에 묶인 채 눈만 껌뻑이고, 화자는 “숫자놀음”에 묶여 “무거운 등짐”을 나른다. 인간과 동물의 고통이 하나의 사슬이라는 인식, “그곳”의 자유를 상상할 때 비로소 “이곳”의 각박함을 직면할 수 있다는 자각이 함께 선다. 시는 “그곳에서라면”이라는 조건법으로 희망을 품되, 그 희망을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빼내어 미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집의 연민은 감상에 빠지지 않고, 환대는 제스처가 아니라 책임이 된다.
환대의 감각은 언어를 낮추는 방식으로도 드러난다. 「벌레 같은 놈 1」은 단정적인 혐오의 말을 뒤집어 묻는다. “벌레가 사람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라는 연속 질문은 우열의 사다리를 흔들고, 존재의 크기와 힘을 기준으로 삼아온 문명의 언어에 제동을 건다. “그저 분자의 무더기로써 결합과 해체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생명의 평등성 앞에서, 인간 중심의 오만은 설 자리를 잃는다. 시인은 설명 대신 설득을 택하고, 비난 대신 사유를 건넨다. 이 사유의 끝에는, 서로를 가장 먼저 인간으로-혹은 단지 하나의 생명으로-호명하려는 환대의 몸짓이 있다.
『시베리안 허스키』는 “그곳”을 묻는 시집이다. 그곳은 어디에 있는가? 시인은 답을 미루지 않는다. “깃털과 풀꽃이 총알과 미사일보다 가치 있는 그곳”은 약속된 하늘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의 선택으로 조금씩 옮겨앉을 수 있는 장소, 말하자면 태도의 또 다른 이름이다. 가두지 않기, 빼앗지 않기, 서두르지 않기, 나누기. 이 소박한 윤리들이 한 편 한 편의 시에서 숨을 쉬면, “이곳은 그곳이 아닌 이곳”일지라도 우리는 그곳의 조각을 살아낼 수 있다. 윤현의 시는 독자에게 거창한 결단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바람처럼 가벼운 손길로 등을 쓸어내리며 말한다. 당신이 먼저 바람이 되어 보자고. 그러면 언젠가, 우리가 함께 걷고 또 달릴 수 있는 흰 대지의 길도 멀지 않을 거라고. 이 책은 그런 희망의 문장들로 오래 귀에 남는다.
시베리안 허스키
$1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