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지도 않고 새벽이 왔다

밤이 깊지도 않고 새벽이 왔다

$12.00
Description
장상옥의 시집은 화려한 장식이나 관념의 고지대가 아니라, 손끝과 발목, 목울대와 허리처럼 생활의 말단부터 세계를 탐사하는 시집이다. 이 시집의 첫 작품인 「시작매듭」은 바느질의 첫 매듭을 삶의 수행으로 치환한다. 옹골진 첫 매듭이 있어야 박음질도 홈질도 곧게 나아간다. 터진 주머니 앞에서 ‘날것, 들것’을 가늠하는 일은 곧 삶의 무게 배분을 배우는 일이다. 매듭을 지을 자리를 안다는 것은 곧 “시작할 때를 안다”는 선언으로 귀결된다. 시인은 시작을 의지로만 밀어붙이지 않고, 조심스레 맺고 고이는 작은 동작들로 번안한다. 일상의 도道는 이렇게 손의 기술과 몸의 기억 속에서 자라난다.
그 도는 들에서 더 분명해진다. 「우두둑, 밭매기」는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라는 어머니의 말이 한낮보다 뜨겁게 맺히는 장면으로, 노동의 지혜를 눈앞에 펼친다. 여기서 지혜는 정답이나 교리가 아니라, 반복과 체험을 통해 맞아지는 각도의 문제, 곧 한 걸음을 어디에 딛느냐의 문제로 전환된다. 자연과 더불어 ‘올바르게 비추는 것’에 관한 시의 사유는 「귀들이 돌아오는 강가」에서 정점에 이른다. “제대로 비추는 것은 길을 묻지 않는다”는 문장은 이 시집이 시간과 장소를 대하는 태도를 통째로 가리킨다.
장상옥의 시들에는 사라지고 없어진 것들에 대한 진정한 애도의 정서가 깔려있다. 그 애도의 감각은 「속초에서」라는 시에서 빛난다. “떠난 사람 벗고 간 짐”을 남은 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삶의 이유로 전환하는지를, 먼바다와 부엌의 햇빛 먼지 사이에서 보여준다. 기억을 ‘털어내다 보면 어느새 가득 차는 빈자리’라는 역설적 정동은, 상실의 공백을 비워내는 행위가 곧 충만의 다른 이름이 됨을 알려준다. 시인의 애도는 울음의 과잉이 아니라 생활의 지속으로 걸음을 옮긴다. “밤이 깊지도 않고 새벽이 왔다”는 책의 제목을 담고 있는 「하지」는 이 애도의 정서가 아주 세련된 시적 표현으로 잘 그려져 있다. 시적 화자는 유난한 햇볕에 빨래를 널고, 손의 거칠음과 유리에 비친 내 얼굴에서 급작스런 노화를 훑는다. 그럼에도 그는 멀리 있는 친구의 소식을 그리워하며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쓴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이 시집의 애도는 장식적인 비감이 아니라, 구체적 실체를 기억하고 더듬는 데서 나온다. 그 구체는 「벽제, 목소리만 남았네」에서 기술의 언어와 상례의 시간표로 들어온다. 전광판의 번호, 시작과 종료 시각, ‘투명하고 정확하게’ 타오르는 절차 속에서 영정은 “아무것도 모른 체 웃”는다. 이런 구체성의 환기를 통해 시인은 우리의 상실감을 위로한다. 위로의 언어는 「숨은 그림」과 「배롱나무 아래서」에서 조용히 퍼진다. 아직 확인하지 않은 작은 그림을 다시 보게 하는 권유, 배롱나무 그늘의 통나무 의자가 허락하는 잠시의 체류, 즉 크게 울지 않고 자리를 내어주는 방식의 위로이다.
이 시집 『밤이 깊지도 않고 새벽이 왔다』는 상실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생활의 교본이다. 강가에 서면 귀들이 돌아오고, 포장마차의 하얀 김 사이에서 낯선 얼굴을 알아보고, 전광판의 번호표 틈에서 꺼지지 않는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의 언어는 일상의 물성과 기억의 온도를 바늘처럼 뾰족하게 세워, 우리에게 묻지 않고 우리를 비추고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깨닫게 한다. 제대로 비추는 것은 길을 묻지 않는다는, 그 오래된 진실을 한 권의 시집으로 다시 확인하는 시간, 바로 그 시간이야말로 이 책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새벽이다.
저자

장상옥

·한국문화예술대학졸업
·서울예술대학문예창작과졸업
·한국방송대학교국문학과졸업
·『자유문학』제10회신인상당선
·서울예술대학〈예술의빛〉상수상
·시집『밤이깊지도않고새벽이왔다』
·풀무문학동인

목차

1부한걸음짚어낼때마다
땅끝까지뻗은발목

시작매듭/봉숭아/우두둑,밭매기/강을건넜습니다/그림자저녁/바닷가놀이터/
대답없는답/이발소집아저씨/어둠속댄서/입석/그남자,그여자/
귀들이돌아오는강가/멸치의꿈/지구촌한남자/잔,잔/폭염주의보/생사게임

2부사람의손은간혹
신의손이되기도하네

사글세/과수원이모/우리들의속도/고라니길건너기/철든슬픔/또다른문/
집,그곳으로가는길/속초에서/칡뿌리/기일忌日/소래포구/11월/기사식당,김씨/
그리운것들은비에젖지않는다/하루란/밖섬/국밥과막걸리/가을에쓰는편지

3부쥔주먹다내놓아야
바람한점될수있는것

기봉이네불닭발집/속초희망번지수/비로소,인생/명숙이/하지夏至/진안삼거리/
궁금한천씨/명동지하도보름달/벽제,목소리만남았네/행복미행/강에두고온그림/
그때어디있었나/알수없는일/언덕을넘어가는법/오래된우물/순간접착제사나이/ 바람입니다/나무늘보를만나다

4부그사람도여기쯤서
쉬어가고싶었을까

너와나의거리/숨은그림/천사를만나보셨나요/푸른바다거북/배롱나무아래서/
설날아침/이명의밤/정동진,한잔의바다/출근길에/지하철서사/울지마라잘있거라/
짐/나를놓치다/카페섬/몸에게고하다/석주/석양여행/그대에게쓰는편지


해설_인간미넘치는성정의시,그넓은강
이영춘(시인)

출판사 서평

장상옥시인은소외계층에대한인생이야기에서부터자신이건너온인생이야기를객관적시선으로담담하고잔잔하게그려내고있다.그러나그이미지속에는작자의웅숭깊은아픔이내면화되어있어더욱시적효과가극대화된다.또한그아픔속에는그려내고자하는제재와주제가살아꿈틀대는생명력을동반하고있어더욱감동이깊다.이런시적작법은시인이그려내고자하는새로운언어와참신한정서의창조적발견의결과물이다.한편그의시세계가그잔잔하면서도큰울림을주는것은깊은바닷속파고와같은인간의내적고뇌와아픔의파동이큰파장으로번져오기때문이다.그것은바로독자와함께할수있는공감의창,그서정성때문이다.그리하여장상옥시인의시는문청시절부터시와함께살아온노련한시적승화의결과물이샛별처럼돌올하여눈부시기만하다._이영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