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도 가끔 거기 머무나요 (이상수 시집)

그대도 가끔 거기 머무나요 (이상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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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이상수의 시에는 언제나 “작은 것들을 바라보는 섬세한 시선”이 먼저 도착한다. 번쩍이는 사건보다 등잔불의 떨림, 모시실의 촉감, 창호에 스미는 달빛 같은 생활의 감각이 앞서며, 그 물리적 감각들은 한 사람의 생이 버텨 낸 시간을 증언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집 “그리움과 사랑의 노래”라 정의할 수 있다. 그리움은 과거에 묶는 사슬이 아니라 오늘을 견인하는 힘이고, 사랑은 선언이 아니라 되풀이되는 돌봄의 습관임을, 낮지만 오래 가는 호흡으로 설득한다. 이를테면 「봄밤」의 풍경, “소쩍새 울음 꽃잎처럼 날리던 밤”에 “새끼손톱만 한 등잔불” 아래 모시를 삼는 어머니와 숙제를 하는 화자의 모습은 이 시집의 정서를 미세한 체온으로 재현한다. 기억은 때로 고통의 형태로 돌아온다. 「형상기억합금」이 말하듯 “아픈 기억은 수명이 없다.” 그러나 시는 회피나 단죄 대신 체온의 조절을 가르친다. “식어야 돌아온다/기다림이 약이다”라는 구절에서처럼 치유는 드라마틱한 사건이 아니라 시간을 잘 통과하는 생활의 기술이다.
장소의 기억 또한 이 시집의 중요한 축이다. 「칠갑산 휴게소」가 보여 주는 것은 소음이 사라진 자리의 평화가 아니라, 흥청이 빠져나간 후 남는 서늘한 무음의 상실이다. “옛사랑 앞/눈빛만 건네다가 돌아서는 중년”의 비유처럼, 떠남은 더 멀리 가는 일이 아니라 적절히 돌아서는 기술이기도 하다. 반면 「캘리그래피 반 사람들」은 머무는 법을 보여 준다. 퇴직자, 사장, 사모님, 동갑내기, 여대생이 모여 수다와 유머, 간식을 나누며 “그날이면 꽃이 핀다.” 상실의 시대에 가능한 공동체는, 거창한 연대의 외침이 아니라 “정신 차려 글씨나 쓰라”는 장난 섞인 타이밍, 이야기가 왕래하는 생활의 리듬 속에서 피어난다.
장소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구체적 감각을 떠올리게 한다. 「수국」에서 바지락이 끓는 냄비 위로 “울컥울컥 갯내음”과 함께 몸을 여는 순간, 부끄러움과 치욕, 노출의 공포가 견딘 열기의 형태 즉, 뜨겁게 핀 꽃으로 변환된다. 반대로 「노각」은 “고서의 표지 같은 빛깔”, “와불 같은 자세”로 ‘오래됨’의 존엄을 환하게 한다. 바닥을 친 이후에도 “그대로 있는 것”을 향한 경의는, 삶의 내구성과 오래된 것들의 품위를 다시 불러 세운다. 그리고 「금강 합류 지점에서」, 갑천이 더 큰 물을 만나 “품었던 이름을 내려놓”는 장면은 이 시집의 사유를 요약해 보여준다. “비워서 채워지는가” 이 물음 끝에서 사랑은 나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나를 흘려보내는 일, 섞임을 통해 넓이와 깊이를 동시에 얻는 일임을 시인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상수의 시들은 과시하지 않는다. 사물을 먼저 놓고 의미가 뒤따라오게 만든다. “괜찮다, 괜찮다/누구든지 밟고 가라” 같은 문장은 간명하지만, 그 간명함이 가능해지기까지의 관찰과 체험의 시간이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유머와 비애가 한 행 안에서 마주치고, 낮은 목소리가 멀리 간다. 책을 덮고 나면 독자의 마음에도 몇 군데 ‘머무는 자리’가 생긴다. 휴게소의 빈 마당, 요양원의 볕자리, 합류 지점의 물결, 캘리그래피 교실의 웃음 같은 곳들. 그곳에서 우리는 알게 된다. 사랑은 거창한 맹세가 아니라 “새끼손톱만 한 등잔불”을 지키는 일이고, 그리움은 잃어버린 것을 되돌리려는 발버둥이 아니라 “작은 물줄기로 섞이어/훠이훠이 바다로” 흘러가려는 마음이라는 것을. 이상수 시인의 시집 『그대도 가끔 거기 머무나요』는 묻는다. 당신에게도 그런 자리가 있느냐고. 있다면, 오늘은 그곳에 조금 더 머물다 가라고.
저자

이상수

1957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출생. 공주사범대학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40년간 교육계에서 일하다가 유성고등학교 교장으로 퇴직하였다. 2023년 「호서문학」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고, 「호서문학」과 『시삶문학』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네이버 블로그 「시꽃 마을」을 운영하고 있다. 시집으로 『그대도 가끔 거기 머무나요』가 있다.

목차

제1부

봄밤/ 제비꽃/ 환한 저녁/ 선물/ 살짝/ 장항선/ 둥구나무/ 꼭대기 집/ 배부른 밤/ 형상기억합금/ 박준의 시집을 다시 읽다가/ 가훈家訓/ My Friend/ 생가生家/
손녀가 왔다 갔다/ 고딕체/ 김홍빈 대장에 대한 생각

제2부

안부/ 사금파리/ 칸나/ 탑돌이/ 양수리에서/ 메밀꽃 필 무렵/ 구절초 연가/
3박 4일/ 여자 프로 골퍼와 차 한잔하고 싶다/ 새벽의 일/ 이런 날엔/ 옷장/
시인, 아직 멀었다/ 늦여름/ 망향/ 노을/ 어려운 부탁/ 김홍신 문학관에서

제3부

진군進軍/ 출소出所/ 겨울나무/ 유구무언有口無言/ 사발통문沙鉢通文/ 수국/ 겨울 어시장/ 파리의 항변/ 노각/ 사과나무의 독백/ 나무뿌리 보살/ 사바娑婆/ 굴레/ 그냥 입춘/ 신문에 대한 예의/ 어느 리어카를 위하여 / 세컨드의 푸념

제4부

돌탑/ 가랑잎 풍경/ 철없는 봄/ 곡비哭婢/ 가로지른다는 것/ 복사골 이야기/
지독한 당부/ 어떤 광고/ 딱한 봄/ 칠봉이 형네/ 한화이글스파크/ 유성호텔/
칠갑산 휴게소/ 캘리그래피 반 사람들/ 부고訃告/ 포스트잇/ 금강 합류 지점에서


해설 _ 결핍과 그리움의 시학
안현심(시인·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시는 ‘결핍’과 ‘그리움’을 먹고 탄생하는 아름다운 생명체이다. 결핍은 채워지지 않는 허기 또는 욕망을 의미하며, 그리움 역시 대상에 닿지 못하는 결핍에서 비롯되는데, 이러한 결핍을 채우기 위한 마음 작용을 형상화한 것이 곧 시이다. 이상수 시인이 건너온 가난과, 그 과정에서 형성된 그리움의 정서는 시집 전체를 관통하지만, 그중에서도 「가훈」은 가난을 온몸으로 밀고 가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형상화된 수작이다. 산문시 형식을 지닌 이 작품은 내용적인 측면이나 형상화 기법에서 ‘시적’이라는 게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시인은 삶을 건너는 방법으로 시 쓰기를 택한 사람이다. ‘파블로 네루다’가 “시는 구원이자 치유이며 숨통”이라고 말했듯, 시인은 시를 쓰며 애환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걸음을 내딛기로 맘먹은 사람이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연필이 뭉뚝해질 때까지 씨름한 흔적이 시의 행간마다 핏빛 지문으로 남아 있다.
_안현심(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