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가 없어서 봄은 오지 않았다 (한정원 시집)

의자가 없어서 봄은 오지 않았다 (한정원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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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제3회 선경작가상 수상작인 한정원의 시집 『의자가 없어서 봄은 오지 않았다』는 이유를 거대 담론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의자라는 사물의 부재에서 찾고 있다. 계절과 삶, 시간과 슬픔의 문제를 시인은 언제나 구체적인 사물의 옆모습에서 끌어올린다.
표제작이기도 한 「의자의 엔트로피 1」은 이 시집의 사유를 가장 잘 드러내는 시다. “의자가 없어서 봄은 오지 않았다”라는 첫 문장은 계절을 자연 현상이 아니라 앉을 자리의 유무로 정의한다. 구청이 버스정류장을 하나 더 만들고, 노인들을 기다리고, “의자를 놓기 위해 정류장을 늘리”는 장면은 복지 정책의 풍경처럼 보이면서도, 실은 시간을 견디는 방식에 대한 비유이다. 노인들에게 버스정류장과 의자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주는 시간의 매개체다. 이 시에서 봄이란 좋은 날씨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앉아 있을 수 있는 자리, “따뜻한 바닥”을 가진 의자가 열어주는 시간이다.
이 시집에서 슬픔의 근원은 단순히 상실이나 이별이 아니라, 바로 이런 시간의 비틀림에 있다. 「시간의 뒤편」에서 “기차는 언제나 방금 전 출발이었다”라는 문장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이 늘 한 박자 늦은 후회와 인식 속에 있음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한정원의 시에서 슬픔은 이미 지나간 것 때문에 생기지만, 그 기원은 늘 “조금 늦은”, “조금 모자란” 타이밍이다. 슬픔의 기원으로서의 시간은, 이렇게 연착된 열차처럼 우리 곁을 맴돌며 도착하지 못한 말, 미처 건네지 못한 손길의 형식으로 남는다.
그렇다고 한정원 시들은 슬픔을 외면하거나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슬픔으로 슬픔을 위로하는 쪽에 가깝다. 「눈사람의 시간」에서 화자는 “떨고 있는 눈사람에게 녹지 마, 라고 말하는 대신/울지 마, 하고 증발하는 어깨를 털어주었지”라고 위로한다. 더 나아가 이 시는 우주의 작은 숲으로 이어지는 순환을 하나의 거대한 슬픔의 회로로 묶어낸다. 소멸은 곧 귀환이고, 흘러내림은 곧 다시 모여드는 형식이라는 것이다. 슬픔의 물성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 그래서 거기에서 위로의 길을 찾는 것 이게 이 시집이 슬픔을 다루는 방식이다.
이 시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독특한 시선이다. 의자, 눈사람, 기차, 시계, 감자, 잉크 같은 것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렌즈이자 존재론적 장치들이다. 「잉크」에서 시인은 “내가 쓴 시는 잉크가 기억해 낸 것/잉크가 기록한 시는 나의 몸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잉크는 단지 글을 쓰게 해 주는 도구가 아니라, 기억과 몸, 언어와 역사를 이어주는 매개체다. 사물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눈은 늘 이렇게 구체적인 물질성에서 출발해, 존재와 기억, 역사와 시간에 대한 사유로 확장된다.
한정원의 시집 『의자가 없어서 봄은 오지 않았다』는 화려한 수사나 과장된 감정 대신, 사물의 옆모습과 시간의 뒤편에서 조용히 발생하는 슬픔을 포착해낸 시집이다. 슬픔의 기원을 시간에서 찾고, 그 시간을 견디는 도구로서의 사물들, 이를테면 의자, 잉크, 눈사람, 시계, 감자, 기차 등을 촘촘하게 배치한 뒤, 그 위에 개인과 사회, 타자와 역사, 젊은 날과 노년의 시간을 겹쳐 올린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문장은 대체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슬픔은 사라지지 않고 형태를 바꾸어 흐르며, 우리는 그 흐름 안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의 슬픔으로 겨우 위로받는 존재라고. 제3회 선경작가상 수상 시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시집은 오늘을 사는 독자들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봄은 어디서 지연되고 있는가? 지금 당신이 앉아 있는 의자는 어떤 시간과 슬픔을 품고 있는가?
저자

한정원

서울출생
1998년『현대시학』등단
시집으로『석류가터지는소리를기록했다』『마마아프리카』『낮잠속의롤러코스터』
『그의눈빛이궁금하다』『의자가없어서봄은오지않았다』등
제3회선경작가상수상
제1회미래시학문학상수상
한국문화예술진흥원문예진흥기금받음(2003년,2005년)
서울문화재단창작지원금받음(201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창작지원금받음(2022년)
현재신세계아카데미시창작교실출강중

목차

1부우리의바깥은아직사막

이상한열매/의자의엔트로피1/청동집게/눈사람의시간/유리커튼/
사과꽃이핀다/탭댄스/마이크/지금도걷고있는/불면은밤에만있는거래/
센트럴파크/태양의서커스/토트넘/신안

2부바닷속에있다면우산이필요할까

특이점singularity/런웨이/올리브나무는저녁을밀어내고/잉크/강아지찾기/고래를찾아서/벨파스트/슬픔의도구/나는영등포역에있었다/호루라기를불었다/살아남겨진사람들

3부수레국화방향으로기울던밤의외출

해바라기감정/가변풍경/페르시아어수업/타인의방/해바라기감정2/탄천炭川/
라이너스의담요/움직이는침대/사막의방식/식당의이유/나뭇잎사이로햇살/
플라스틱파도/슈투트가르트/도시의주름들/속수무책/일기예보/꿀벌의말을듣지못했다

4부슬픔은오래도록아프리카숲속을물들이다가

문경/의자의엔트로피2/Writer’sBlock3/눈雪/왜/옥상/시간의뒤편/포트메리온이있는후식/수색/손을놓치다/오늘,단풍/얼룩말,초현실주의/파로호破盧湖감성/내포


해설_소통과유대를꿈꾸는도시인의시
문혜원(문학평론가,아주대교수)

출판사 서평

해설중에서


시인은전혀무관한것들에서연계성을찾거나선후혹은인과관계를부여하며새로운해석을시도한다.시의대상은박물관이나전시회,영화,여행지의풍경등시인의생활속에있는모든것이다.시인이기본적으로부지런하다는것과언제어디서든항상‘시’에주파수를맞추고있다는것을짐작할수있는대목이다.경험한모든것을자신의언어로다시쓰고싶다는욕망이,낯익은것들에서낯선것들을발견하는동력이되는것이다._문혜원(문학평론가,아주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