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바람이면 돼

그냥 바람이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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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최상경 시인의 시집 『그냥 바람이면 돼』를 읽고 나면, 그리움이란 말이 오래 입안에 남는다. 이 시집에서 그리움은 지나간 시간의 회고에 그치지 않고, 그것은 오늘의 일상을 견디게 하는 힘이고, 무너진 마음을 다시 세우는 손길이며, 사라진 것들이 아직 우리 곁에 머물고 있음을 알려주는 희미한 기척이다. 시인은 밤하늘의 달, 시장의 생선, 식탁 위의 사과, 요양원 복도, 빈집의 마당, 바닷가의 바람 같은 사소한 장면들 속에서 그리움의 흔적을 찾아낸다. 이 시집의 세계는 이런 평범한 일상의 일들이 깊이를 획득하는 순간들의 기록이다.
첫 시 「밤이면 달섬이 날 기다린다」에서부터 그리움의 정조는 선명하다. “가끔 그리움에 목메면” 대낮에도 창백한 얼굴로 떠오르는 달섬은, 밤이 되면 기다림의 얼굴로 다시 나타난다. 멀거나 가깝거나, 깊거나 얕거나, 그 섬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있기에 섬은 섬이 되고, 아침이면 화자 또한 “다시 섬”이 된다. 이처럼 최상경의 시에서 그리움은 대상에게만 머물지 않고, 그리워하는 사람 자신의 존재 방식이 된다. 우리는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어느새 하나의 섬이 된다.
이 시집의 그리움은 일상 속에서 자주 확인된다. 「중력」의 식탁 위 사과는 “걷다가 서고 서다가 걷고 밀고 당기는 그리움”을 불러내는 매개체이다. 「점심點心 할까요」에서는 밥 한 끼가 허기를 채우는 일을 넘어 마음에 점 하나를 찍는 일이 된다. 배가 고픈 것보다 “그리움이 고픈” 시간이 있다는 깨달음은, 일상의 가장 평범한 행위 속에 삶의 결핍과 애틋함이 숨어 있음을 보여준다. 시장, 식탁, 우편함, 병실, 여행지 같은 장소들은 시인에게 그리움이 묻어나는 생활의 증거들이다.
어머니를 향한 마음 역시 그리움의 한 축을 이룬다. 「407호 병실」의 병실 풍경, 「집안의 시계」의 요양원 복도, 「마음도 아프면 파스 붙일까요」의 파스 한 장, 「요양원의 봄」의 꽃과 어머니는 모두 노년과 돌봄, 기억과 망각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태어난 시들이다. 특히 「집안의 시계」에서 어머니가 화자의 이름을 한참 만에 부르는 장면은, 시간이 한순간 멈추거나 빼앗기는 듯한 아픔을 준다. 달력은 넘어가도 마음은 어제에 머물고, 시인은 자신이 먼저 잊을까 봐 그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른다. 여기서 그리움은 아직 곁에 있으나 조금씩 멀어지는 존재를 붙드는 간절한 방식이다.
또한, 시인은 그리움을 개인적 감상에만 가두지 않는다. 「희나리」에서는 기다림이 그리움이 되고, 그리움은 채 마르지 않은 장작처럼 축축한 한으로 남는다. 「한강恨江」과 「거창한 가을」 같은 작품들에서는 역사적 상처와 공동체의 슬픔이 개인의 감각 속으로 스며든다. 최상경의 시에서 그리움은 사적인 정서이면서 동시에 오래된 시대의 아픔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잊을 수 없는 이름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말하지 못한 울음이 시의 밑바닥에서 계속 바람처럼 분다. 그래서 그의 그리움은 연약하지 않다. 상처를 증언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표제작 「바람이면 돼」는 이 시집의 정서를 가장 잘 압축해 보여준다. “너의 바람이면 돼”, “그냥 바람이면 돼”라는 말은 체념처럼 들리기도 하고, 사랑의 가장 낮은 고백처럼 들리기도 한다. 무엇이 되겠다는 욕심보다, 다만 누군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면 충분하다는 마음이며, 그것은 붙잡지 않으면서도 끝내 떠나보내지 못하는 그리움의 태도다. 바람은 머물지 않지만 흔적을 남긴다. 이 시집의 시들도 그렇다. 읽고 나면 사라지는 듯하지만, 어느새 마음 한쪽에 오래 서늘하고 따뜻한 결을 남긴다.
저자

최상경

전남고흥출생
순천대학교교육대학원졸업
순천효산고등학교교장역임(2018~2021)
대한예수교장로회순천북부교회장로(2013~현재)
문학동우회〈시우림〉회장
전남문화재단창작지원금수혜(2025년)
시집『네모속에들어온달』(2025년)
『만약네가내게로온다면』(2025년)
『그냥바람이면돼』(2026년)
순천문화재단문화예술지원사업선정(2026년)

목차

1부나무에달린붉은언약

소지燒紙/밤이면달섬이날기다린다/돌아오는숫자/향수마일리지/
이젠,내가설렐차롄가보다/광야로간달팽이/낙엽,어디로가시려는지/환승역/
밤을삼킨달/비상시국非常時局/좀더기다릴걸/거창한가을/누군가의봄으로/
거저오지않는봄/407호병실/중력/가을여행/그속에는누가살고있을까

2부빛에파묻힌그림자가집을짓고

행간行間/정녕/호접지몽胡蝶之夢/속주머니로들어온너/언제쯤환복換服할까요/
뭍으로나온바다/결핍이된상실/이봄을어떻게할까/궤적/점심點心할까요/
단지,사나흘이지났을뿐인데/목에걸린종이달/콰트로/내쉼표는어디에서쉴까/
메소테스/플랫폼/페른베/고독사세요/

3부찬바람결에꽃잎내맡기든지

개는짖어도기차는간다/잠시라는기억/벽을두드리며그가온다/새벽은울지않는다/
아직,흐르지못한눈물방울/희나리/울음속의섬/어떤기억은기록보다진하다/
자각몽自覺夢/이소/길위의피아노/바람이면돼/머리위로날아간새/오는길/
빈집/우수/집안의시계/에이아이청문회

4부바다는달月을어디에감추었는지

어머니의지우개/기다리는손/아마도,그녀는인공콩깍지를했을거야/한강恨江/불갑산꽃무릇/
바다의고적孤寂/서랍을열어봐/달이발을헛디뎌/어떤밤은끝이보이지않아/얼음새꽃/
두고간인사/멍에/한점/겨울꽃/ 마음도아프면파스붙일까요/지난가을을이제야만나고/요양원의봄/이름이오는밤/상처를보듬는상처


해설_그냥몸으로느끼면된다
정재훈(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시집을열자마자,첫시에서부터바다냄새를품은밤이짙게펼쳐졌다.섬을둘러싼밤바다의파도소리와함께“검은밤하늘”(밤이면달섬이날기다린다)에“어두워야빛나는뭇별”이독자들의수평선위로마중을나왔다.시적심상으로써섬은그자체가‘관계의목마름’을내포한다.일상의평범한풍경과는철저히이질적이었을“대낮에도창백한얼굴”이곳곳을서성거렸을것같다.이방인의심정이었을까.

시인최상경의밤은‘한권의시집’처럼우리앞에서다시금온몸으로마주해야할시공간으로펼쳐진다.빗나간시선의그늘진사각지대,결코눈으로만볼수없는검은바닷속,그리고누군가의닳아진얼굴,거기에멍울처럼엉킨울음과아픔을진정인간으로서느끼고싶다면그냥몸으로다가가면된다._정재훈(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