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두운 그늘이었을 때

내가 어두운 그늘이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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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걷는사람 시인선 127
박시우 시집 『내가 어두운 그늘이었을 때』 출간

고통은 그림자처럼 내려앉고,
음악은 그 곁에서 조용히 흐른다

“남풍은 보았을 거야
피로 물든 가로수와 구덩이에 굴러떨어지는 그림자들을”
박시우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내가 어두운 그늘이었을 때』가 출간되었다. 첫 시집 이후 10년, 이번 시집은 오랜 침묵과 침잠의 시간을 지나 다시 언어 앞에 선 시인의 내밀한 고백이자 다짐이다. 시인은 “한동안 무기력증에 빠졌다. 진부한 언어와 낡은 서정 때문에. 그때나 지금이나 위로는 음악이었다.”라고 말하며, 그간의 시간을 ‘음악’이라는 감각으로 건너왔다고 고백한다. 이 말은 곧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미학적 중심이 음악임을 암시한다.
총 4부로 구성된 시집은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연민, 사회 구조에 밀려난 이들을 바라보는 윤리적 시선, 그리고 슬픔과 애도를 언어로 견디려는 시적 실천이 촘촘하게 이어진다. “바람의 파르티타가 흐르는 겨울밤 / 털모자를 쓴 노동자들이 / 발전소 굴뚝에 올라갔다”(「공소公所」)는 시구처럼, 시인은 가장자리로 밀려난 현실의 장면들을 정면으로 응시하지만, 그것을 고발하거나 재현하는 방식보다는 조용히 감싸 안는 서정으로 담아낸다. 그의 시에서 고통은 고요하게 흐르며, 그 고요는 음악의 감각과 맞닿아 있다.
음악은 이 시집에서 감정의 매개체이자 구조 그 자체로 기능한다. 시집의 정수를 응축한 「시적이고 종교적인 어느 변두리의 저녁 음화音畫」는 음악이 언어로 어떻게 전이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재개발을 앞둔 마을의 저녁 풍경, 허기를 채우는 국수 한 그릇, 그리고 서로를 향한 눈빛까지 시인은 이 모든 장면들을 마치 하나의 악보처럼 구성해 낸다. 이 시는 ‘음화音畫’, 즉 소리와 풍경이 한데 어우러진 정서적 회화로서의 시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러한 시적 감각은 단지 감성적 장식에 머물지 않고, 고통의 현장에 실제로 개입한다. “꽃잎이 아들 밥그릇에 붙은 밥알처럼 보여 / 거리를 벌벌 기어다녔네”(「흠향」) 같은 구절은 특정한 사건을 지목하지 않으면서도,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슬픔의 정서를 정확히 환기시킨다. 이때 애도의 대상은 이름을 넘어, 시대를 건너며 사라져간 모든 ‘그늘’로 확장된다.
박시우의 시는 비극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대신 그 주변을 맴도는 방식으로, 혹은 거리를 유지한 채로 대상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윤리적 긴장을 만들어낸다. 그 시선은 종종 음악적이고, 때로는 기도처럼 느껴진다. 문종필 평론가는 이러한 시인의 태도를 음악 속에서 시를 쓰는 시인으로 정의하며, 그것이 박시우 시의 고유한 차이이자 미덕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이 시집에는 ‘글렌 굴드’, ‘사라방드’, ‘아리에타’ 같은 음악에 관한 구체적 언급들이 자주 등장하며, 그 감각은 시의 리듬과 톤을 자연스럽게 지배한다.
삶의 가장자리에서 포착된 존재들도 이 시집의 중요한 축이다. 삼각김밥으로 하루를 버티는 청년, 폐지를 줍는 노인, 고시원에서 지내는 노동자, 언덕 위의 고양이 가족까지, 이들의 모습을 시인은 단지 스케치하지 않는다. 그는 이들을 고요한 리듬으로 안아주며, 다정한 거리로 바라본다. 그런 면에서 이 시집의 ‘거리감’은 단절이 아니라 연대의 다른 방식이다. 무책임한 외면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지속적으로 응시하는 윤리의 언어다.
시집 후반부에서는 시인의 사적인 기억과 정서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다. 어머니와 나눈 마지막 국수 한 그릇, 요양원에서 보내야 했던 시간, 더 오래 살면 짐이 될까 봐 걱정하는 노모의 고백 같은 장면은 슬픔과 책임이 동시에 얹힌 풍경으로 다가온다. 또한 “능소화 모가지들을 한 아름 꺾어 / 이끼 우물에 던졌다”(「장원의 여름」)와 같은 구절에서는 여름이라는 계절 이미지 속에 생과 사의 감각을 절묘하게 포개 놓는다.
『내가 어두운 그늘이었을 때』는 음악과 고통, 애도와 희망, 거리와 밀착이라는 상반된 요소들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한 시인의 분투다. 음악으로 고통을 달래고, 언어로 다시 그 음악을 품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닿으려는 이 시집은 조용하지만 단단한 리얼리즘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