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여우가 우는 저녁

사막여우가 우는 저녁

$12.00
Description
사막여우의 울음이 멎은 자리,
다정한 생의 기척이 피어난다

“사막을 한 삽씩 퍼 올리며 모래 먼지를 만든다
그렇게 나를 평정해 가는 사막이 눈앞에 펼쳐진다”
정솔 시인의 시집 『사막여우가 우는 저녁』이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거대한 힘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에, 시가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하는지를 다시 묻는다. 패권의 언어와 독단적인 시선이 만연한 현실 속에서 시인은 오히려 작은 존재와 사소한 사물에 눈을 돌리며, 그 안에서 다정한 관계와 새로운 깨달음을 찾아낸다.
해설을 쓴 유종인 시인은 정솔의 시를 두고 “자아에 갇히지 않고 자기 응시의 정성스러움으로 나아가려는 용기”라고 말한다. 그의 시는 자기중심적인 울타리에서 벗어나 곤충, 식물, 사물 같은 타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자벌레」에서 작은 벌레에게 인품을 평가받는 화자의 모습은 인간이 더 이상 우월한 위치에 서 있을 수 없음을 보여 주며, 「수작」에서 땅콩 세 알이 각기 다른 길을 가는 장면은 생명이 서로의 선택과 만남 속에서 이어지고 있음을 일깨운다. 정솔의 시선은 거대하고 특별한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작고 평범한 존재들의 움직임에서 세계의 진실을 길어 올린다.
이 시집의 또 다른 힘은 일상의 사물과 풍경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데 있다. 버려진 종이컵과 꽃잎을 마주한 「공즉시색 색즉시공」에서 시인은 “입술은 색이고 컵은 공이다”라는 직관을 끌어내며, 고정된 관념을 유연하게 풀어낸다. 덧없는 시간을 사고파는 「시간 마켓」에서는 “갓 구운 빵 냄새, 주말여행, 파도 소리, 자전거 하이킹” 같은 순간들이 새로운 삶의 구성 요소가 되어, 시간조차도 함께 나누고 다시 살아낼 수 있는 대상으로 바뀐다. 이렇게 사소한 사물과 장면 속에서 시인은 삶을 새롭게 조립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도 정솔의 시는 멈추지 않는다. 「소망」은 죽음을 앞둔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를 통해 애틋한 어스름의 시간을 그려내고, 「순수의 기척」에서는 신생아의 웃음을 바라보며 “일생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웃고 싶은데”라는 고백을 들려준다. 웃음을 되찾고자 하는 이 소망은 삶의 무게를 견디는 근원적인 힘으로 이어진다. 시인은 무거운 주제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서 다정한 회복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독자와 나누려 한다.
동시에 그는 오늘의 사회와 생태를 응시한다. 「포노 사피엔스」에서는 스마트폰과 배달 문화에 길든 인간형을 새로운 이름으로 불러내며, 편리함 뒤에 숨어 있는 고립과 중독을 드러낸다. 「손」에서는 곶자왈의 덩굴을 가져와 돌보려 하지만 끝내 시들어버리는 순간을 기록하며, 인간의 욕망이 자연과 맺는 불안한 관계를 예리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시집의 「신성리 갈대숲」은 흔들림을 두려움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힘으로 바꾸어내며, 깨어 있는 존재의 태도를 전한다.
『사막여우가 우는 저녁』은 이처럼 작은 곤충과 씨앗, 종이컵과 웃음, 갈대숲과 덩굴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눈길이 닿는 모든 것들을 새로운 빛으로 되살려낸다. 거대한 패권의 논리를 거부하고, 미세하고 사소한 것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우리에게 잊고 있던 감각을 다시 불러낸다. 조용하지만 단단한 울림 속에서, 정솔의 시는 독자에게 서로를 바라보고 함께 살아갈 힘을 건네며, 일상의 풍경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저자

정솔

저자:정솔
충북진천에서태어나2015년《문학과창작》신인상을받으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새를데려오는일』이있으며2025충북문화재단예술창작활동지원사업을수혜했다.


작가의말

앎을알아야겠다고흔히말하는세월이라는것을낙타처럼걸어갔다걸어도걸어도세월은끝날기미를보이지않고나에게암이라는것을툭던져주었다그날부터나는앎보다암에목숨걸었는데지나고보니이또한앎의일부였다

요즘은저녁같은하루가내게있어
참다행이다
2025년가을
정솔

목차

1부턱에끈을단단히묶었는데도
선물
시간마켓
yes
통과신호
꽝꽝나무
삼촌신발
자벌레
수작
손없는날
수심
슬하
압정
물딱지
아래下

2부게발선인장처럼매달려있다
공즉시색색즉시공
고비사막
취준생
물수제비

피차
소망

암만
재물선
부탁
파스
자네의자
와봐

3부아무일없었던것처럼웃고싶은데
지지
무죄
빗금

순수의기척
나무침대
주변인
포노사피엔스
사막읽는법
서바이벌리즘
삼나무
다리
야옹!
말풍선

4부오늘도나는세상간보는일로
신성리갈대숲
빨래
흡연구역
훨훨
변심
일곱색깔무지개
유죄

반려봉투
궁리
가위사용법


접속

해설
상호주의적인간미와심미적각성의의미
-유종인(시인)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보내야겠다

수심에빠져있는돌을
수심에빠져있는나를

더이상수심의깊이를만들지말아야겠다싶어
돌을들고일어났다

화양동계곡수심은그대로였다

-「수심」부분

공원의자에빈종이컵놓여있다종이컵에꽃잎물려있다붉은입술물려있다꽃잎격렬하게물고있다비바람에도떨어지지않을기세다들켰다들켜서도붙어있다입술이문것은공이고컵이문것은색이다아니입술은색이고컵은공이다얼마나뜨거울까나는지금공즉시색색즉시공을적나라하게보고있다

-「공즉시색색즉시공」전문

사막여우같이생긴여자가오아시스물을퍼다물조리개로뿌려사막을가꾼다여자는메카를향해경배한후사막을한삽씩퍼올리며모래먼지를만든다그렇게나를평정해가는사막이눈앞에펼쳐진다

-「고비사막」부분

외면해야하는것들이니까지지라고했겠지

지지는쳐다봐도안되고만져도안되고먹어도안되고그렇게안된다고하는것들은모두지지하는것들이었어지지를철회해야했어

지지가무성한세상이야
지지가무서운세상이야

나는지지받고싶은데말이야

-「지지」부분

날아다니는날파리를낙타파리로읽어도
어디선가뛰어나온송장메뚜기를전갈로읽어도
물결무늬모래톱은보이지않아요

어디서찾아야하나요
힌트좀주세요

눈씻고찾아봐도온통가시뿐이에요
화분사막을뒤적일수록가시에찔린울음만터져요

사막여우가우는저녁입니다

-「사막읽는법」부분

삼나무는일생빙하속음표를채집하여제심장에저장하였다어쩌다칼바람소리는무릎에저장하였다가누군가가슴줄뜯으며울음을삼킬때칼부딪는소릴내며새하얀빙원을쏟아내기도하였다

내무릎에도칼부딪는소리요란하다

-「삼나무」부분
자연사박물관에서나비의감옥을보았다

나비숲이면서나비숲이아닌
나비세상이면서나비세상이아닌
나비들의감옥

이곳엔포물선을그릴바람이없어나비는날지못하고
나비의날아다니는법을훔쳤다는
라이트형제도없다

접히지않는날개를지고있는범나비가
오직바람만기다리고있어
혼돈이인다


-「훨훨」부분